이재진의 에세이

브레히트는 古典主義 작가인가?(1) 

 

글_이재진(단국대 명예교수)

 

숙명적인 보헤미안

‘로렐라이’(Loreley. 1824)로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낭만주의의 마지막 시인 하이네(Heinrich Heine. 1797*-1856)는 자유를 위해 투쟁하고, 세상의 사악함을 고발하고 폭로하기 위해 앞장서서 북을 치던 언론인이었으며, 붓을 칼처럼 날카롭게 뽑아 든 신랄한 풍자 시인이었다. 태어난 년도를 보면 알 수 있듯이 하이네는 어제와 오늘 사이에서 방황할 수밖에 없는 얄궂은 숙명을 안고 태어났다.

“나의 요람 위로 18세기의 마지막 희미한 달빛이, 동시에 19세기의 여명이 붉게 비춰주고 있었다.”

하이네는 뒤셀도르프에서 태어났지만, 파리에서 활동했다. 프랑스에 정치적 뿌리를 두고 있었지만, 고향 독일을 늘 그리워했다.

“내게도 한때 아름다운 조국이 있었지. 그건 꿈이었어.”

유대인으로 태어난 하이네는 기독교인으로 살았다. 서정적 시인이지만 마르크스, 엥겔스와 친분을 맺은 정치적 시인이었다. 그렇다고 공산주의자가 되지는 않았다. 하이네는 종교와 국적을 뛰어넘는 무산계급과 유산계급 간의 무자비한 투쟁이 오리라 예견하였다.

 

하이네

 

브레히트(1898-1956)도 한 세기가 끝나는 마지막 순간에 태어났다. 19세기의 마지막 불빛이 사그라진 동시에 20세기의 여명이 밝아오고 있었다. 그날 눈발이 흩날리고 있었다. 아우그스부르크 시립극장에서는 바그너의 오페라 로엔그린(Lohengrin)을 공연하고 있었다. 지방신문에 이르기까지 독일은 온통 드레퓌스(Dreyfus) 사건으로 떠들썩했다. 에밀 졸라(Emil Zola. 1840-1902)가 “나는 고발한다!”(J’Acccuse!)라는 기사로 조국 프랑스를 고발했기 때문이다.** 세기말은 너무나 어수선했다. 다가오는 새로운 20세기를 눈앞에 두고 모두 알 수 없는 희망에 들떠 있었고 그에 못지않게 묵은 19세기를 서둘러 청산하려는 마음으로 불안에 휩싸여 있었다. 하이네가 한 세기 전에 그랬던 것처럼 19세기에 슬쩍 한 발을 걸쳐 놓고 태어나 20세기를 살아간 브레히트는 운명적으로 자유분방한 생활을 살아가는 보헤미안이었다. 세상을 변화의 대상으로 삼았던, 변증법적 서사극의 극작가, 이념적, 변혁의 브레히트는 이중적 명제를 숙명적으로 안고 태어났다. 브레히트의 작품은 생애만큼이나 “모순의 모순”이라는 변증법적 역설과 반어로 짜여 있다. 자연주의 연극이 활발하던 시기에 태어난 브레히트는 반자연주의적 연극을 추구했다. 표현주의란 전통 연극의 흐름에서 벗어나 서사극이란 새로운 연극이론을 정립했다.

 

브레히트

 

Smoking-Theatre

브레히트의 다양한 연극 세계는 어린 시절 다락방에서 시작되었다. 종이공장 공장장의 어린 아들은 동네 아이들을 다락방에 불러 모으곤 했다. 동생이 때때로 책가방을 들어줄 정도로 작고 나약했지만*** 브레히트를 일생동안 쫓아다니며 괴롭힌 단어는 ‘죽음’이었다.

첫 번째 무대에 오를 작품은 원래 <스파르타쿠스>였는데, 그 당시 뮌헨 지역의 예술계를 주도하던 포이히트방거(Feuchtwanger. 1884-1958)와 부인의 권유로 <한밤의 북소리>로 바꾸었다. 하지만 브레히트는 북소리를 싫어했다. 그 리듬은 브레히트에게 죽음을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20대 중반에 브레히트는 이미 묘비명을 짧게 써 두었었다.

“이곳에 BB 잠들다. 순박하지만 까다롭고 독한 놈이었다.”

피아노 보다는 기타를 제법 잘 다루던 브레히트는 다락방에서 랭보(Rimbaud. 1854-1891)의 시를 읊거나 자신이 지은 시를 기타에 맞추어 노래로 불렀다. 친구들은 관객이었고 다락방은 브레히트에게는 훌륭한 극장이었다. 노래와 시와 연극 대사가 뒤범벅되어 어울리는 카바레였다. 브레히트는 카바레 연극을 주도하던 발렌틴(Karl Valentin, 1882∼1948)을 뮌헨 거리에서 만났다. 풍자와 해학으로 관객을 휘어잡는 언어의 파괴자 발렌틴은 어느새 브레히트의 스승이며 친구가 되었다. 1917년 뮌헨 대학에 들어간 브레히트는 의외로 의학, 철학을 전공한다. 후방에서 병사들의 피를 닦아주는 브레히트 의병은 전선에 나가 총알받이가 되고 싶지는 않았을 것이다. 당시 주로 문학강의(Kutscher-Seminar등)에만 관심을 보였다. 베데킨트(Frank Wedekind, 1864∼1918)의 강의도 빼놓지 않고 들었다. 쿠처 교수는 세미나에 베데킨트를 초대했다. 베데킨트는 브레히트의 우상이 되었다. 브레히트는 그분의 노래를 교실에서만 들은 것은 아니었다. 강철 같은 체구의 베데킨트가 카페에 앉아 세기말의 타락과 규범을 질타하며 새 세기의 희망을 발라드에 담아 기타에 맞추어 야하게 부르면, 이를 들으며 브레히트는 자신이 지향할 연극의 길을 떠올렸다. 대화, 춤, 노래, 시, 팬터마임, 독백 등 온갖 표현 형식이 뒤섞인 풍자적이고 희극적이면서도 사회 비판적인 무대예술은 카바레 문화이다. 카바레에서는 무대와 객석이 직접 소통한다. 그곳은 담배연기로 가득하다. 무대와 객석은 각자 자기 위치를 한순간도 잊지 않는다. 환상의 세계를 불러일으키기 위해 관객과 무대 사이에 설정해 놓는 혹은 그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소위 전통극의 ‘제4의 벽’은 존재하지 않는다. 배우는 관객을 희롱하며 함께 떠들고 직접 소통한다. 브레히트는 격식에 얽매인 정통연극무대 대신 술 마시며 담배피우며 즐기는 연기 자욱한 연극무대를(“Rauchtheater”) 제안했다. 이런 ‘카바레 무대’에서 브레히트는 연극의 틀을 단순화시켜 서사극의 근간을 세웠다.

 

브레히트

 

새로운 형식과 내용을 찾기 위해 브레히트는 사회주의란 지름길을 선택했다. 하지만 브레히트는 한낮 이데올로기에 갇힌 작가는 아니었다. 일생 브레히트를 억누르며 뿌리내린 이념은 없었다. 젊은 브레히트는 1920년 일기장에 다음과 같이 써넣기도 했다.

“세계관 같은 것 나는 줄곧 잊고 지낸다. 죽기 살기로 그런 것을 머릿속 깊이 새겨 넣으려고 애쓸 수도 없는 일이고.”

지나간 것은 점차 희미하게 잊혀갈 것이니 자신이 한 말을 너무 글자 그대로 받아들이지 말라고 브레히트는 여러 번 강조한 바도 있다. 우리가 고전주의 작가 브레히트를 만나려면 그러므로 잠시 안주했던 사회주의라는 이념의 벽에서 끄집어내고 서사극이란 좁은 무대의 틀에서 끌어내 주어야 한다. 스탈린 평화훈장을 받기도 한 브레히트는 동독에서 오히려 더 뼈아픈 비판을 받기도 했다. 브레히트의 이상주의는 동독 사회주의의 건설보다도 오래되었다. 사회주의가 브레히트에게 궁극의 목적은 아니었다. 브레히트는 사회주의 혁명을 부르짖는 이데올로기 작가가 될 수는 없(었)다.

 

Playwright Bertholt Brecht in a cloud of cigar smoke, testifying into microphones in a thick German accent, before the House Un-American Affairs Committee, that he wasn’t a member of the Communist Party. (Photo by Leonard Mccombe/The LIFE Images Collection/Getty Images)

 

천재 시인들의 아내

괴테(Goethe. 1749-1832)는 글을 쓰기 위해 여자가 필요했고 여자가 옆에 있었기에 많은 시를 썼다. 그래서 한 여인과 결혼이란 굴레 속에 결속될 수가 없었다. 1788년 이태리 여행에서 사랑하는 여인과 헤어진 채 바이마르로 돌아온 괴테는 허전함과 절망을 느꼈다. 이런 상황에서 만난 여자가 꽃가게 아가씨 크리스티아네(Christiane Vulpius. 1765-1816)였다. 23살이었다. 혈통은 원래 아카데미 집안의 출신이었지만 너무 가난해져서 크게 교육을 받지 못했다. 괴테는 크리스티아네에게 집안일을 맡겼으나 이 여인은 곧 다른 일(!)까지 떠맡게 되었다. 바이마르에서는 누구나 39세의 괴테가 이 여인을 데리고 잠깐 재미나 보는 줄 알았는데 1806년 결국 결합을 한다. 늘 귀족출신의 여인을 가까이하며 예의범절을 지키고, 여인들 남편의 눈을 피해야 했던 괴테로서 술주정뱅이 아버지를 둔 이 시골색시에게 괴테는 전혀 부담을 느끼지 않았을 것이다. 이 여인은 아이를 다섯이나 낳았다. 첫째 아들을 제외하고 모두 일찍 죽었다. 이 아들에게는 아이 셋이 있었으나 그나마 모두 미혼상태로 살았고 결국 괴테의 직계 후손은 한 명도 없게 된다. 괴테에게서 나오는 것은 모두가 빈껍데기뿐이었다. 하느님은 더 이상 이 천재에게 줄 선물이 없었나보다. 그만큼 많은 것을 한 몸에 지니고 괴테는 태어났기 때문이리라.

 

크리스티아네(괴테 아내)

 

하이네의 부인 마틸데(Mathilde. 처녀 때 이름은 Mirat. 1815-1883)는 프랑스 여자였다. 1834년부터 두 사람은 동거하다가 1841년에야 결혼한다. 두 사람 사이에는 아이가 없었다. 마틸데는 독일문학은 물론 하이네의 작품을 읽은 적도 없었다. 돈의 씀씀이도 몰랐다. 마틸데가 알아듣는 독일어도 두 문장뿐이었다.

“Nehmen Sie Platz! / Have a seat!” / 앉으세요!
“Das ist meine Frau. / This is my wife.” / 제 집사람입니다.

사투를 헤매는 하이네 옆에서 마틸데는 이렇게 불평을 늘어놓기도 했다.

“안돼, 앙리! 당신 죽어서는 안 된다고! 내가 불쌍하지도 않아요, 오늘 아침 내가 아끼던 앵무새가 죽었단 말이에요, 당신까지 죽어버리면 나는 얼마나 불쌍하겠어.”

 

마틸데(하이네 부인)

 

mattress-grave

하이네는 만년에 척추가 마비되면서 침대에 갇혀 꼼짝하지 못했다. 이를 스스로 ‘이불무덤’(Matratzengruft)이라 불렀다. 한 번의 실수로 얻은 매독(!)이 원인이라 자책하면서! 1848년 하이네는 마지막으로 루브르 박물관을 찾아간다. 그곳은 늘 자기에게 창조의 힘을 북돋아 주던 평화와 안식의 보금자리가 아니었던가! 너무나 고통스러워 결국 대리석 바닥에 쓰러지고 만다. 팔이 없는 밀로의 비너스 앞이었다. 대리석상의 차가운 발이 따스해질 정도로 그렇게 오랫동안 하이네는 여신의 발목을 붙잡고 울고 또 울었다. 동정 어린 눈빛으로 미의 여신은 그저 한동안 시인을 내려다볼 뿐이었다.

“이 사람아, 내가 팔이 없는 것이 보이지 않는가, 그래서 자네를 도와주지 못하는 것을?”

죽기 며칠 전 아내가 침대 가에 무릎을 꿇고 앉아 남편을 용서해 달라고 하느님에게 기도하고 있었다. 하이네는 울며 기도하고 있는 아내 마틸데를 오히려 위로해 준다.

“그분은 정령 나를 용서해 주실 거야, 그것이 그분의 본분이니까!”
il me pardonnera; c’est son métier! / Er wird mir verzeihen. Das ist sein Geschäft! / He will forgive me; It’s his job!

하느님에게서 버림받았다고 괴로워하던 베토벤은 하늘에 대고 이렇게 따져 물었다.

“내게 음악의 재능을 주시더니 이제 와서 내 귀를 막아버리는 이유는 또 무엇입니까?!”

하이네가 고통을 누르며 흐느끼는 소리는 베토벤의 원망소리보다는 나의 가슴을 훨씬 더 아프게 한다. 하이네는 매독이 아니라 베토벤처럼 라인강의 수은오염으로 저주를 받았던 것이니! 언젠가 나는 뒤셀도르프에 있는 하이네의 생가를 찾아간 적이 있었다. 그곳은 이제 책방이 되었고 이것저것 물어보려는 외국사람이 점원에게는 그저 귀찮을 뿐이었다.

 

하이네 생가

 

예술작품은 하느님도 그렇지만, 팔 없는 사랑의 여신 비너스처럼 우리를 내려다볼 뿐 일으켜 세워줄 수는 없을 것이다. 브레히트와 같은 작가라면 서양과 동양, 과거와 현재라는 문화적 혼란 속에서 방황하는 우리를 이끌어 줄 수 있을까? 우리에게 브레히트와 같은 작가가 필요하긴 할까? 그런 고급스럽고 시적 지적 풍자적 언어와 기지로 가득 짜인 브레히트의 서사극이 빠른 인터넷 시대의 거친 우리 관객을 만족시켜줄 수 있을까? 브레히트의 변증법적 서사극이 제멋대로 돌아가는 우리의 현실을 반영할 수 있을까? 그런데 브레히트는 우리가 지금 찾고 있듯이 지역과 시대를 뛰어넘는 고전주의 작가일까?

 


* 화재 등으로 인해 20년간의 온갖 서류가 분실되어 하이네의 출생연도가 분명치 않다. 학회에서는 1797년을 공식적인 출생년도로 사용한다. 브레히트와 비교해 보면 신기하게 1세기 후에 거의 같은 해에 태어나, 같은 해에 죽었다.

** 19세기 프랑스에서 가장 큰 사회적 스캔들이라 할 수 있다. 1894년 드레퓌스는 국가반역죄로 중형을 받는다. 무죄임이 들어났지만 군부, 사법부, 교회는 거짓과 속임수로 유죄를 주장한다. 에밀 졸라 등 많은 지식인들이 이에 항거한다. 결국 프랑스 전체가 들고일어나자 국가는 이에 굴복한다. 이 사건으로 인해 언론, 교회 등 프랑스는 다시 태어나게 된다.

*** 자료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참고하시라: Brecht 1,67m. Goethe 1,69m. Schiller 1,79m. Heine 1,60m

 


이런 저런 질문을 던져보며 첫 번째 에세이를 끝낸다. 앞으로 대략 열 번에 나누어, – 독자가 지루해 하는 것 같으면 줄이고 아니면 좀 늘이고 하면서 -, 브레히트의 연극세계를 에세이 형식으로 풀어나갈 것이다. 뒤렌마트는 원래 화가지망셍이었다. 어찌하다 극작가가 되었는지 묻자 이렇게 대답했다: “내 작품이 처음 무대에 올랐을 때 큰 박수갈채는 없었지만 그래도 관객들이 하품은 하지 않더구먼.”. 관객이 하품할 정도로 지루한 공연을 만든다면 그런 사람은 큰 죄를 짖는 셈이다. 마찬가지로 만약 독자를 지루하게 만든다면 이또한 범죄행위와 다름없을 것이다. 일단 큰소리부터 치고보지만, 나의 이런 약속이 허풍이 아니기를 바랄뿐이다. 이 에세이를 읽으면서 질문이나 혹 건의사항이 있으면 chechinyi@hanmail.net으로 연락주기 바란다.

 

9 thoughts on “

  1. 세계관 같은 것들을 줄곧 잊은 채 살고 싶습니다.
    한 줄 글에도 한 마디 말에도 어줍지 않은 이데올로기의 잣대를 들이대려하는 ‘이데올로기 과잉’의 시대입니다.
    우리 모두, 이념의 벽에서 벗어나 여유있게 좀더 깊고 넓고 더 높은 수준의 자유로움을 이야기 하는 세상에서 살고 싶습니다.
    요즘 흔치 않은 知的인 에세이였습니다.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이런 글을 놓치는 일이 죄입니다. 두번째글을 기다립니다.
    교수님,좋은 글 감사합니다.

  2. 잘 읽었습니다 형님
    저애게는 평소 먼듯했던 분야였는데 웬지 브레히트가 가까이 닥아오는 느낌입나다. 그나저나 코로나19로 독일에서 온다는 전공자도 방한이 취소되였다니 시국이 어수선하기는 합니다.
    그래도 형님 다음 글을 기다려 보며 요즈음의 어수선함을 달래봅니다.

  3. 고맙네. 이렇게 깊고 고운 답글을 받아본 적이 없었네.
    더욱 좋은 글을 쓰기 위해 이념의 벽을 기어 올라가 보겠네.
    혹 그 뒤로 넘어가면, 아니면 이쪽으로 떨어지면
    그래도 어느 곳이든 누군가는 나를 기다리고 있겠지?!
    다시 이곳에서 만나기 위해 한달을 서둘러 살겠네.

  4. 교수님의 에세이감상하다가 학창시절 mann ist mann 공연기억이 나네요^^
    저 우리야쉘리 상우예요…..
    벌써 30년이 넘었는데 시간이 무색할 만큼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하신 교수님을 보며 늘 감사하고 고맙습니다….

  5. 교수님 에세이 감상하며 학창시절 mann ist mann공연 기억이 나네요^^

    교수님 처음뵌지가 벌써 30년이 훌쩍 넘었는데 시간이 무색할 만큼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하신 교수님을 보며

    늘 감사하고 고맙습니다……

  6. 저는 항상 선생님을 응원하고 있습니다
    지겨운 코로나가 물러가야 하는데
    막 피어오르기 시작한 벚꽃
    지난해 벚꽃 막걸리가 너무 그립습니다
    다음 편도 기대하고 있습니다

  7. 과거 대학시절에 선생님 말씀을 쫓아가기 어렵고 문학적 재질이 아둔하여
    일 찌감치 포기하고 일본에서 자연과학을 공부할 시기였습니다.
    교토대학 Ecological center에 장기방문한 Universität München의 학장인 Dr. Peter Fabian과 세미나 후, 저녁식사와 술을 마시며 Bioklimatologie und Frosch의 상호관계에 대한 토론을 자유롭게 이어갈 때였습니다. “인간을 포함한 생물적 다양성과 상호계약”이라는 어려운 주제부분에 부딪치자 참석자 모두들 취기가 올랐던 것 같았습니다. 이 때 함께 동석한 Dr. Peter Fabian의 부인은 갑자기 인류의 평등/불평등 결혼관에 대하여 역설하며, 그 예로서 베르톨트 브레히트와 그의 부인인 헬레네 바이겔의 사이의 결혼관에 비추어 끊임없이 불평등 상호조력을 비판하고 그 관계를 조명하였습니다. 결국, 브레히트는 부인 잘 만나 이혼 당하지 않고 사후에도 그의 부인은 베를린 극단을 이끌며 브레히트 작품을 세상에 널리 알리는 역활을 했다고합니다. 외형이 거인같이 키가 큰 Peter Fabian의 부인은 웃으며… 요즘 본인의 삶이 헬레네 바이겔과 같다며 “심장과 머리가 분리되었다고 외쳤습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Peter Fabian의 부인은 오랫동안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시를 전공한 연구자였습니다.
    오래전 선생님으로부터 멀리 도망가서
    비록, 타국에서 잠깐 동안지만 독일인으로부터 진지한 베르톨트 브레히트 관련 이야기를 들었을 때
    대단히 기뻤고 가까이 선생님을 마주대하는 듯한 추억이 떠올랐습니다.
    첫번째 에세이에서 천재 시인 괴테와 하이네의 삶과 부인(여인)들의 이야기처럼 국내에서 잘 알려지지않은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작품과 인생에 영향을 끼쳤던 그의 부인인 헬레네 바이겔의 삶에 대하여
    언젠가 기회가 되신다면 에세이에 담아주시기를 소원합니다.
    항상 기쁘고 감사합니다.
    주승진(마싱) 올림

    p.s 선생님! 전혀 지루하지 않고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요즘, 코로나19 감염병에 대비한 사회적 거리두기 켐페인 운동이
    마치 세상이라는 무대에 서사극 기법인 낯설은 소외 효과와 비판적 거리를 적용시켜
    과학적이고 이성적 판단을 대단위로 상기시키는 것 같습니다.
    더 더욱 그럴수록 그 영향은 타인과 제 자신과의 상호관계를 더욱 크게 상세히 들여다 볼 수 있었습니다.

  8. 선생님! 좋은글 잘 읽었습니다.
    브레히트나 지금의 우리나
    그때나 이때나 이념이…
    다음글이 기다려 집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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