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하일 레르몬토프
‘가면무도회’
글_임야비
인생은 길에 불과하다고 말했소. 하지만 그건 아름다울 동안만이오.
그 아름다움이 오래갈까? 인생은 무도회와 같소. 춤추며 돌다 보면 즐겁고 온통 빛이 나고 밝지…
하지만 집에 돌아와 구겨진 옷을 벗는 순간 모든 건 기억에서 날아가고 피로가 덮쳐 온단 말이오.
– 레르몬토프: 가면무도회 3막 2장 중 (박선진 옮김)
27살이라는 너무 짧은 생을 살다 간 미하일 레르몬토프(1814~1841). 기라성 같은 선배 푸슈킨과 그로테스크한 후배 고골 사이에 끼어 있는 바람에 상대적으로 큰 주목을 받지 못하지만, 러시아 문학사에서 절대 빠져서는 안 될 작가다.
1835년 그가 21살 때 쓴 ‘가면무도회’는 총 4막으로 이루어진 희곡이다. 주인공인 아르베닌은 사교계를 주름잡던 유명한 도박사로 재산과 명성을 쌓은 후 도박에서 손을 떼고 사랑하는 아내 니나와 안정적인 삶을 살고 있다. 우연히 가면무도회에서 아내가 다른 남자(즈뵤즈디치 공작)와 함께 있는 장면을 보게 되고, 그날 이후로 끝없이 아내를 의심하게 된다. 아내가 잃어버린 팔찌로 인해 의심은 확신으로 바뀌고 결국 아이스크림에 독을 타서 아내를 살해한다. 모든 것이 오해였음이 밝혀지고 아르베닌은 스스로 파멸한다.
레르몬토프가 이 극에서 표현하고자 주제는 두 가지다. 하나는 이성을 단숨에 마비시키는 ‘치정(癡情)’이고, 다른 하나는 당시 사교계의 ‘위선’이다.
치정의 주제는 현재의 ‘어두운 절망’과 한때 아름다웠던 ‘사랑의 추억’이 어지럽게 엉기면서 ‘시간’의 축을 형성한다. 위선의 주제는 ‘화려한 무도회의 가면’과 ‘추악한 욕망의 민낯’이 양극단으로 서로를 밀쳐내면서 모순된 ‘공간’의 장을 만든다. 이 네 가지를 메스로 깔끔하게 박리해서 분리 배치하면 다음 도식과 같다.
이제 아람 하차투리안(1903~1978)이 1939년에 작곡한 극부수음악 ‘가면무도회’ 중 제 1곡 왈츠(Waltz)를 살펴보자.
하차투리안은 쇼스타코비치, 프로코피에프와 함께 구 소련을 대표하는 작곡가다. 활동한 시기상으로는 현대 작곡가에 속하지만, 음악적 내용은 서유럽 낭만주의에 더 가깝다. 이 때문에 스탈린 체제에서 살벌한 핍박을 받았지만, 당이 원하는 선전용 음악도 작곡하면서 간신히 살아남았다.
레르몬토프의 ’가면무도회’가 발표되고 100년 후 하차투리안은 이 비극에 극부수음악을 작곡한다. 총 5곡으로 제1곡 왈츠(Waltz), 제2곡 녹턴(Nocturne), 제3곡 마주르카(Mazurka), 제4곡 로망스(Romance), 제5곡 갤롭(Galop)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중 가장 유명하고 동시에 가장 중요한 제1곡 왈츠에 대해 살펴보자.
본격적인 고찰에 앞서 우리가 말하는 음악 ‘왈츠’의 음악적 구성을 간단하게 알아보자. 왈츠는 보통 ‘왈츠-트리오-왈츠’라는 ‘A-B-A’의 3부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중 왈츠 부분(A)은 4분의 3박자의 밝고 신나는 춤곡이며, 중간의 트리오 부분(B)은 앞뒤로 반복되는 왈츠 부분을 환기하는 보조적 역할을 하는 것이 보통이다.
하차투리안은 이 곡을 작곡할 때 엄청난 창작적 고통을 겪었다고 한다. 여러 시도 끝에 내린 결론은 ‘우울한 단조(短調)의 왈츠’였다. 왈츠 부분에서 화려한 가면을 관통하여 가슴으로 파고드는 멜로디는 비장하며, 3박자의 스텝은 한숨의 그림자를 쫓아간다. 트리오 부분에서 분위기가 급반전한다. 타악기가 작렬하며 밤을 대낮같이 밝히는 화려한 불꽃놀이를 선사한다. 다시 왈츠 부분으로 돌아와 반복 후, 장대한 비극의 막장이 내려가듯 곡을 끝맺는다. 이 왈츠는 초연 후 극장에서는 물론 콘서트홀에서도 열광적인 찬사를 받는다.
수직축의 모순성은 화려함(가면)과 추악함(민낯)의 간격이 벌어질수록 극적인 장(場)을 증가시킨다. 그 벌어진 공간으로 질투와 사랑의 비극이 수평으로 관통한다. 이 비극성은 연극의 진행이자, 음악의 흐름인 시간이다. 하차투리안은 화려한 무도회는 왈츠라는 음악 형식으로 추악한 욕망은 단조 조성으로 치환한다. 레르몬토프가 의도한 모순성을 고스란히 악보 위 무대에 마련한 것이다. 그리고 어두운 절망을 왈츠(A)의 멜로디에 싣고 사랑의 추억을 트리오(B) 부분으로 표현한다. 극의 스토리 라인은 A-B-A로 진행되는 음악적 심상과 진폭을 함께 한다. 이 진폭은 주인공 아르베닌의 심리 궤적과도 일치한다. 이렇게 극은 음악이 된다.
하차투리안의 천재성은 위 그림에서 표시한 두 개의 별표(★) 부분 즉, 왈츠에서 트리오로 넘어가는 부분(★1)과 트리오에서 다시 왈츠로 넘어가는 부분(★2)에서 특히 빛난다. 하차투리안은 어두운 왈츠 분위기에 정반대되는 눈부시게 밝은 트리오를 중간에 두었다. 이러한 극단적인 고도차, 조도차 때문에 첫 번째 별표에서 트리오는 더욱더 화려해지는 효과를 보게 되고, 두 번째 별표에서 왈츠는 더욱 침통하게 가라앉는다. 왈츠를 작곡할 때 대부분의 작곡가들이 트리오 부분을 간과하는데, 하차투리안은 이 부분을 매우 극적으로 이용한 것이다. 도식의 붉은 곡선처럼, 하차투리안의 왈츠는 모든 사분면(四分面)을 휘저으며 가면과 민낯으로 벌려 놓은 모순이라는 무대 공간을 광적으로 휘젓는다.
이렇게 하차투리안의 음악은 레르몬토프의 4막 비극을 5분이라는 시간 속에 온전히 담아 놓는다.
추천 음반은 간결하게 1장이다. 키릴 콘드라쉰이 1958년에 RCA Victor Symphony Orchestra를 지휘한 앨범으로 이 곡의 수많은 녹음 중에서 항상 우위를 점하는 명연이다. 오케스트라의 연주적 역량보다는 지휘자의 명민한 해석이 돋보이는 음반이다. 특히 왈츠에서 트리오로, 트리오에서 다시 왈츠로 넘어가는 부분(★1, ★2)의 선명한 대비는 그 어떠한 연주와도 비교할 수 없는 감동을 준다.
굳이 연극을 알지 못해도 이 곡은 청자의 감정을 송두리째 뒤흔드는 격정적인 곡이다. 하지만 좀 더 깊고 색다른 공감각적 감동을 느껴보고 싶다면 먼저 레르몬토프의 연극을 깊이 있게 읽어보자. 그리고 하차투리안의 천재적이고 치밀한 의도를 파악한 후, 다시 이 왈츠를 다시 들어 보자. 그러면 레르몬토프 비극의 심리적 무대는 가면의 안쪽과 맨얼굴 사이의 공허한 공간이라는 생각이 들 것이다. 동시에 하차투리안 왈츠는 당신의 귀가 아닌 당신의 가면 안쪽과 당신의 민낯 사이의 틈에서 울려 퍼질 것이다.
사족1) 알프레드 슈니츨러의 소설 ‘꿈의 노벨레(Traumnovelle)’를 영화화한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Eyes Wide Shut’에서도 비슷한 수법이 쓰인다.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음악은 우리에게 익숙한 쇼스타코비치의 왈츠 2번이다. (곡의 정확한 명칭은 ‘다양한 오케스트라를 위한 모음곡’ 중 왈츠 제2번이다. 원래 이 곡이 널리 알려진 계기는 큐브릭의 영화 때문인데, 우리나라에서는 ‘번지점프를 하다’라는 영화와 CF 음악으로 소개가 되면서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다.) 이 곡도 하차투리안의 곡처럼 구슬픈 단조 왈츠와 화려한 트리오 부분으로 구성되어있다. 소설(영화)의 내용에서도 레르몬토프의 희곡(연극)과 비슷한 요소가 많다. 부부, 외도, 의심, 살인 그리고 가면이다. 심도 있게 연구를 해 본다면 매우 흥미로운 논문 하나가 나올 수 있을 것이다. (참고로 쇼스타코비치의 왈츠 2번은 1938년에 작곡되었고, 스탠리 큐브릭의 유작 ‘Eyes Wide Shut’은 1999년 완성되었다.)
사족2) 부끄럽지만, 필자가 약 15년 전에 레르몬토프의 ‘가면무도회’와 하차투리안의 ‘왈츠’ 사이의 놀라운 공감각을 발견하고, 이에 흥분한 나머지 이를 음악극, 총체극 형식으로 제작해 길거리 공연을 한 적이 있었다. 열정만 앞서고 서툴렀던 때라 사진만 슬그머니 첨부해 본다.
임야비(tristan-1@daum.net)
– 자유기고가, 서울 신포니에타 기획 및 연출
– 극단 동맹 연출부 드라마트루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