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진의 에세이
브레히트는 古典主義 작가인가? (2)
글_이재진 (단국대 명예교수)
독일의 셰익스피어
1782년 1월 13일 만하임 국립극장은 흥분의 도가니에 휩싸였다. 실러(Schiller. 1759-1805)의 첫 작품, [군도](Die Räuber)의 막이 오르기 때문이었다. 4시간에 걸친 긴 공연이 끝나고 막이 내리자 극장 안은 마치 뜨거운 용광로처럼 이글거렸다. 그 당시 공연을 보았던 사람들의 말을 빌리면: “관객은 주먹을 불끈 쥐고 눈을 휘둥그레 뜨고, 발을 구르며 고함을 쳐댔다. 낯선 사람들끼리도 흐느끼며 서로 얼싸안았다. 기절할듯 쓰러질듯 사람들은 비틀거리며 눈물을 닦으며 힘들게 극장 문을 찾아 나가고 있었다.” 혼란의 순간이기도 했다. 일 년 전에 죽은 레싱(Lessing. 1729-1781)도, 열 살 위인 괴테도 이룩하지 못했던 엄청난 무대 성공이었다. 그렇게 오랫동안 기다리고 기다리던 “독일의 셰익스피어”가 드디어 탄생하는 순간이기도 했다.
실러와 브레히트
실러는 연극이란 예술매체를 시민들을 계몽하는 정치적, 사회적 도구로 보았다. 연극무대는 아름다움을 창조하는 미학적 기관일 뿐 아니라 시대를 뛰어넘는 보편타당한 모범적 규범을 구현하는 도덕적 산실로 본 것이다. 연극무대는 국가와 종교에 이어 제3의 권력이다. 그러므로 국가행정 체제나 종교가 마비되어 법이 가동되지 않을 때는 연극이 도덕적 기관으로서 그런 역할과 기능을 할 수 있을 것이라 실러는 생각했다. 하지만 브레히트는 이에 대해 회의적이었다. 실러가 살던 사회상황과는 이제 많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19세기 초 지식인들은 온통 이상주의에 들떠 여러 가지 요구를 크게 떠들어댈 수 있는 주체였지만 20세기는 그런 요구 자체와 맞서 싸우는 투사가 되었기 때문이라는 주장이다. 연극은 이제 실러가 말하듯 도덕적 산실이 아니라 사회를 변화시켜, 결국 인간을 변화시키는 구심점이 되어야 한다고 브레히트는 주장한다.
실러가 인간을 변화시키려 들었다면 브레히트는 사회를 변화시키려 한다. 브레히트는 인간을 구하기 위해 세상을 변화시키려 한다면 실러는 자유를 얻기 위해 인간을 변화시키려 했다. 실러에게는 인간이 변해야 자유를 얻게 된다면 브레히트에게는 사회구조가 바뀌어야 인간은 자유를 얻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두 작가는 잔다르크(Jeanne d’Arc. 1412-1431. 독일식 이름은 Johanna)를 소재로한 작품에서 서로 다른 세계관을 보여준다.
실러의 [오를레앙의 聖 처녀](Die Jungfrau von Orleans. 1801)에서 요한나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성전(聖戰)을 외치다가 부상을 당한다. 죽음의 길에 오르며 마지막 장면에서 조용히 하늘의 기쁨을 노래한다. 하늘나라로 떠나는 요한나의 온몸에 환희의 기운이 가득하다.
요한나 (깃발을 손에 들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반듯하게 서 있다.) … 오르리라 – 오르리라 – 땅덩이가 저 아래 멀어지누나 – 고통은 잠시일 뿐, 하지만 기쁨은 영원 하리라!
반면 브레히트의 [도살장의 성 요한나] (Die heilige Johanna der Schlachthöfe. 1931)에서 주인공 요한나에게 하늘은 끝내 허상으로 보인다. 구세군 소령 요한나는 시카고의 차디찬 도살장을 돌아다니며 노동자들에게 찬송가를 부르고 성경 이야기를 들려준다. 일자리를 빼앗긴 노동자들을 위해 국을 퍼서 빈 배를 채워주며 위로도 해준다. 요한나는 공장문을 닫으려는 정육업계 대부들과 총파업에 돌입하려는 노동자들 사이를 정신없이 뛰어다니며 두 사이를 중재하려 든다. 하지만 요한나가 주저하는 바람에 총파업은 무산된다. 결국 요한나는 구세군에서 쫓겨나고 급성폐렴으로 눈보라 치는 도살장의 앞마당에 쓰러진다. 요한나는 “죽음 후에 갖게 될 약속된 하늘의 기쁨에서 위안을 찾으라”며,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으라고 외쳤던 자신의 믿음이 허구였음을 인식하기에 이른다. 종교에 대한 환상이 깨지고, 실러의 요한나와는 달리 하늘의 기쁨을 노래하지 않는다. (브레히트의 “성 요한나”는 다음번에 제법 상세하게 다를 것이다.)
사랑과 순결을 지키려는 여인들
고전주의 작품의 주인공들은 구속에서 벗어나 자유를 얻기 위해서라면, 신념을 지키고, 정의나 선을 실현하기 위해서라면, 진정한 사랑이나 충절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목숨을 바친다. 브레히트는 현실주의자였다. 그런 자기희생적 주인공들을 그려내지 않는다. 이상을 위해, 사랑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그런 감상주의자, 그런 이상주의자는 아니다. 여기 레싱이나 실러가 그린 사랑과 순결을 위해 죽어가는 두 여주인공의 모습을 예로 들어본다.
실러의 [군도]는 형제간의 갈등에서 빚어지는 비극이다. 마지막 장에 이르면 그간의 오해가 모두 풀린다. 주인공 카알 모아(Karl Moor)는 자신을 아직도 사랑하고 있는 아말리아(Amalia)에게 돌아가기만 하면 된다. 하지만 이때 도둑의 무리들은 옷을 찢어 온몸의 상처를 보이며 숲속에서 맺은 ‘배반하지 않겠다!’는 맹세를 상기시킨다. 아말리아는 맹세 때문에 카알이 도둑의 무리와 헤어질 수 없음을 알게 된다(시민사회에서 ‘맹세’는 지켜야 될 어떤 가치보다도 우선된다.). 아말리아는 사랑하는 사람이 없으면 더 이상 삶의 의미도 찾지 못하기에 절망 속에 오히려 그 사람에게 죽음을 간청한다. 카알이 주저하자 아말리아는 다른 도둑에게 대신 죽음을 부탁한다. 도둑중 한 사람이 칼을 뽑아들자 이를 막아서며 카알 모어는 끝내 자신의 손으로 아말리아를 찌른다“: “카알 모아: 모어의 여인은 모어의 손에 죽어야지!” [현자 나탄]으로 우리에게도 알려진 레싱의 [에밀리아 갈로티](Emilia Galotti. 1772)를 살펴보자. 주인공 에밀리아는 영주의 손아귀에서 빠져나갈 수 없음을 알게 되자, 순결을 지키기 위해 죽음을 선택한다. 아버지 오도아르도에게 죽임을 부탁한다. 아버지가 망설이자 딸아이는 스스로 칼을 치켜든다.
에밀리아. 예전에는 그런 아비가 있었지요, 딸아이를 치욕에서 구해주려고, 아끼 던 귀한 칼을 아이의 가슴에 찔러 넣은 아비가, 그래서 아이에게 새로운 삶을 찾아 주었던! 그런 일은 모두 옛날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단 말인가요, 그런 아비는 이제 없단 말인가!
오도아르도. 없다니, 애야, 그런 아비가 없다니! (찌른다.) …
에밀리아. 장미꽃 한 송이 꺾여 부서지네, 세찬 바람이 불어와 떨어트리기 전에!
(V/7)
라오콘(Laocoon) 논쟁
바티칸 박물관에 들어가면 많은 예술작품을 만나게 된다. 미켈란젤로의 “피에타”, “천지창조”도 있지만, 작가 미상의 “라오콘 군상”도 서있다. 라오콘은 아폴론 신전을 지키는 트로이의 신관이다. 트로이 전쟁은 10여 년이나 지속한다. 지치고 지친 그리스 연합군은 고향으로 돌아간다며 진영을 거둔다. 철수하며 신들에게(아테네) 목마를 받친다. 하지만 이는 속임수로 목마 속에는 그리스 군사들이 숨어있었다. 이 비밀을 라오콘이 폭로하려 들자 아테네 여신이 뱀을 보낸다. 거대한 뱀은 두 아들과 함께 라오콘을 감아 죽인다.
조각품에는 죽음과 싸우는 라오콘의 고통이 절제되어 묘사되어있다. 죽음 앞에 터져 나오려는 절규는 입가에 머물러있을 뿐, 밖으로 흘러나오지 않는다. 라오콘은 괴로워하면서도 참고 견딘다. 그 고통은 보는 이의 가슴을 억누르지만 귀에는 들리지 않는다. 라오콘의 죽음은 로마의 시인 베르길리우스(Vergilius. 70-19 BC)의 서사시 [아이네이스] (Aeneis)에도 등장한다. 조각품과는 달리 서사시에서는 뱀에 물려 죽어가며 라오콘과 두 아들은 “짐승처럼 소리를 쳐댄다.”
예술사가 빙켈만(Winckelmann,1717-1768)은 절제, 품위, 조화롭게 아름다움을 묘사하는 것이 예술의 가장 큰 과제라고 생각했다. 서사시 [아이네이스]에서 “그 고함소리는 하늘까지” 닿을 정도로 시끄럽다는 이런 소란을 빙켈만은 비예술적이고, 예술의 품위를 손상시킨다고 비판했다. 결국 아이네이스는 최고의 예술품의 품격에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평가절하했다. 라오콘 군상을 보면 그 고통의 소리가 입에 갇혀 나오지 않을 정도로 인내하고 절제되어 있지 않은가! 빙켈만은 고전주의 작품을 라오콘의 절제된 신음처럼 “고상하지만 담백하고 조용하지만 거대해야”(edle Einfalt und stille Größe/”noble simplicity and quiet grandeur”) 된다고 정의 내렸다. 빙켈만의 이런 정의는 한때 괴테, 실러가 이끌었던 바이마르 고전주의의 지침이기도 했다.
이에 대해 레싱은 빙켈만을 비판했다. 빙켈만과 레싱 사이에서 벌어진 소위 “라오콘 논쟁(1766)”이다. (두 사람은 만난 적도, 서신교환을 한 적도 없다. 빙켈만이 비명횡사하지 않았더라면 이 논쟁은 계속되었을 것이다.) 라오콘 군상의 절제된 아픔과 아이네이스 서사시의 시끄러운 고통 사이에는 서로 다른 예술매체의 특성 때문이지 예술성과는 관련이 없다고 레싱은 주장했다. 즉 조각품과 서사시라는 예술매체 때문에 일어난 표현의 차이점이지 예술혼의 차이는 아니라는 분석이다. 빙켈만은 라오콘을 그리스 시대의 조각품으로 보았다. 나중에 밝혀지지만 실제로 바티칸 뜰에 있는 라오콘 군상은 그리스 작품이 아니라 로마시대의 조각품이었으니! (본 주제에서 우리가 지금 많이 벗어난 것 같지만, 언제 바티칸 박물관 뒤뜰에 들리게 되면 오늘 이야기를 기억하며 즐거워하리라!)
전 바티칸의 라오콘 앞에서
그들의 절규를 들었던것 같았는데
빙켈만은 입술에만 머물렀다고 했군요
많이 재미있습니다 ㅎㅎ
다음 연재가 기다려집니다
1) 트로이 목마의 비밀을 알아차린 신관은 라오콘 외 또 한 사람이 있었다. 기회가 되면 파리스의 누이, 즉 troja/illion의 공주 카산드라(cassandra)의 비극을 이야기할 것이다.
2) 빙켈만이 이태리에서 칼에 맞아 객사하지 않았다면 바이마르 독일 고전주의는 좀 더 빨/달리 성숙했을 것이다.
3) “바이마르 고전주의”는 보통(!) 괴테의 첫뻔째 이탈리아 여행(1786)에서 시작해서 실러의 죽음(1805)으로 끝맺는다.
4) 레씽은 연극을 체계적이고 이론적으로 분석, 비평한(Hamburgische Dramaturgie) 최초의 연극비평가이다.
5) 괴테는 라오콘 조각품에 대해 “ … 고통과 격정의 폭풍우가 우아함과 아름다움으로 부드러워진다.”고 평했다.
예술적 정의(과제,추구)에 있어서 빙켈만과 레싱중 저는 빙켈만을 지지합니다. 표현의 절제는 표현의 과잉보다 품위 있을 뿐 더러 더 설득력이 있는 거 같습니다.
예술은, 모든 것을 다 쏟아 놓기보다 담백하게 보여만 주는 것으로 더욱 풍요로운 해석이 가능하기 때문이 아닐까싶습니다.
표현의 과잉, 감정의 과잉 시대를 살면서 빙켈만의 주장이 수준 높은 예술을 구별하는 중요한 잣대가 될 수도 있겠네요.
‘고상하지만 담백하고 조용하지만 거대한다’는 예술의 정의가 고전주의의 지침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다음 글을 기대합니다.
댓글 고맙습니다.
레싱은 빙켈만의 예술관을 비판한 것이 아닙니다. 예술은 매개체에 따라 표현방식이 서로 다를 수 있음을 빙켈만이 간과하고 있다고 지적한 것입니다. 빙켈만과 달리, 레싱은 그리스와 로마의 서로 다를 수 있는 예술양식에는 손데지 않고 있습니다. 즉 조각품이라서 표현의 제한이 뒤따르고, 그에 반해 서사문학이라서(Vergil) 표현의 폭이 좀 더 자유로울 수 있음을 강조했습니다.
더구나 빙켈만이 그리스 예술의 표본으로 삼은 라오콘 군상은 그후 밝혀지지만 로마시대의 작품입니다.
댓글 고맙습니다.
레싱은 빙켈만의 예술관을 비판한 것이 아닙니다. 예술은 매개체에 따라 표현방식이 서로 다를 수 있음을 빙켈만이 간과하고 있다고 지적한 것입니다. 빙켈만과 달리, 레싱은 그리스와 로마의 서로 다를 수 있는 예술양식에는 손데지 않고 있습니다. 즉 조각품이라서 표현의 제한이 뒤따르고, 그에 반해 서사문학이라서(Vergil) 표현의 폭이 좀 더 자유로울 수 있음을 강조했습니다.
더구나 빙켈만이 그리스 예술의 표본으로 삼은 라오콘 군상은 그후 밝혀지지만 로마시대의 작품입니다.
바티칸 라오콘 군상은 플리니우스가 박물지에서 로도스 출신의 세 조각가가 제작했다고 이름을 밝히고 있습니다. 작가 이름이 모두 알려져 있는 작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