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연과 연극의 경계가 무너진 무대 위에 펼치는 욕망에 관한 인문학적 성찰의 퍼포먼스
연극 <욕망이론: 배반의 심장>
글_김효(연극평론가)
작 에드거 앨런 포, 나진환
연출 나진환
단체 극단 피악
일시 2020년 2월 9일~16일
장소 동양에술극장 3관
관극일시 2020년 2월 16일(오후 3시)
<욕망이론: 배반의 심장>은 극단 피악이 <악령>(2010)을 시작으로 꾸준히 무대에 올려 온 ‘인간에 대한 인문학적 성찰 시리즈’의 여섯 번째 작품이다. 이 작품은 현대 인문학의 가장 뜨거운 화두인 ‘욕망’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는 점에서 강한 흥미를 자극하며 인문학의 학술적 담론과 예술작품의 경계를 무너뜨린다는 점에서 도전적이다.
인문학은 인간을 탐구하는 학문 즉, 인간존재의 본질에 대한 탐구이며 예술 또한 그점에 있어서는 인문학과 다르지 않다. 다만 인문학이 추상적인 설명을 통해 인간존재의 문제를 다룬다면 예술은 인문학적인 주제를 구체성의 용기에 담아 가공한다. 극단 피악은 최근 10년에 걸쳐 ‘인간에 대한 인문학적 성찰’이란 캐치프레이즈를 내걸고 5편의 공연, <악령>, <죄와 벌>,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오를라>, <이방인> 등을 꾸준히 무대에 올려 왔다. 이 5편의 공연은 이른 바, 세계 명작의 반열에 속하는 문학작품들을 토대로 하는 만큼 법과 자유, 종교와 신 등 인문학적인 주제에 관한 성찰의 무대를 선보였다. 헌데 그것들은 내용적으로는 ‘인간에 대한 인문학적 성찰’을 하는 것이지만 형식 면에서는 여전히 가상의 인물이 등장하는 연극 ‘작품’의 양상을 띠었다. 즉, 인문학적인 주제를 다루되 형식은 재현에 토대한 연극이었다. 헌데, <욕망이론: 배반의 심장>은 욕망의 이론들에 대한 강연 형식의 퍼포먼스가 공연을 이끌어 간다. 강연을 연극화 하고 연극을 강연처럼 만들어 예술과 학술담론의 경계를 허문다. 그럼으로써 학술담론은 예술적 감수성으로 이해와 공감을 증폭시키고 연극은 성찰의 깊이와 함께 자유로운 형식으로 충만해지는 신선한 공연을 선보였다.
이 작픔은 한 강연자가 무대에 나와 르네 지라르(Rene Girard)의 ‘욕망의 삼각형’ 이론에 대해 강의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그 이론의 핵심은 욕망은 언제나 타자에 의해 매개된다는 것, 따라서 욕망은 욕망의 주체와 대상이 만들어내는 이자 관계가 아니라, 주체와 대상 사이에 타자가 끼어들어 셋이 형성하는 삼자 관계로 작동된다는 것이다. 즉 우리는 남이 욕망하는 것을 욕망하지, 자신이 가지는 욕망의 주체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와 같은 욕망이론에 대한 강연은 불현듯 극장 공간을 울리는 전화벨 소리에 의해 중단된다. 곧이어 소설 <배반의 심장>의 화자가 등장하여 소설 속의 독백을 읖조린다. 머지않아 다시 욕망에 관한 강연이 이어지고 그것은 다시 소설에 의해 중단되는 식으로 공연은 욕망이론에 대한 강연과 소설 <배반의 심장>의 텍스트를 각각 여러 조각으로 분절하여 교차 편집하는 식으로 진행된다. 소설 속의 화자는 노인의 시선을 견딜 수 없어 살인을 저지르고 시체를 마루 밑에 암매장하지만 노인의 심장 소리의 환청이 엄습하면서 자신의 범죄를 토설하여 파멸이 이르는 정신분열적 존재이다. 타인의 시선에 강박되어 있는 사람에게 타자는 감옥과 같다. 소설 <배반의 심장>은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는 우리는 타자의 감옥에 갇혀 있는 것이며 결국은 파멸에 이르게 된다는 인간존재의 비극적 운명을 웅변하는 듯하다. 소설의 화자가 3명의 배우에 의해 연기되면서 화자의 분열적 성격이 극적으로 표현되고, 텍스트의 발화는 배우들이 펼치는 춤과 마임으로 이중화된다. 이처럼 파편화와 콜라쥬는 이 공연을 이끌어 가는 미학이자 이 공연이 일깨우고자 하는 인간존재의 본질을 은유하는 것처럼 보인다. 강연자가 이끌어 가는 욕망의 담론은 지라르의 욕망이론으로부터 시작하여 라깡의 이론에 대한 소개와 설명으로 이어지지만 그렇다고 그러한 이론들의 전모를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그들의 이론에서 작가-연출가가 공감하는 부분들을 따다가 병렬·전시한다. 라깡의 경우, 그의 욕망이론은 1970년을 기점으로 전기와 후기로 나뉘어지며 후기에는 타자의 욕망으로부터 벗어나 진정한 쾌락에 이르는 주체의 주이상스에 대한 탐구 쪽으로 방향을 틀지만 이 공연에서는 “욕망은 타인의 욕망이다”로 압축되는 라깡의 전기 이론만을 간취한다. 그렇게 이 공연은 현대의 욕망담론의 파편들을 콜라쥬하여 작가 자신이 생각하는 욕망담론을 구축한다. 욕망에 대한 강연의 진행은 다양한 극적 장치에 의해 파편화된다. 한 명의 강연자 역할을 세 명의 배우가 번갈아 가면서 맡아 함으로써 강연의 내용이 파편화되도록 하며, 그 사이사이에 다양하게 코드화된 욕망의 이미지들이 끼어든다. 근대화의 욕망의 아이콘과도 같은 ‘새마을운동’이 ‘짐승의 시간’의 이미지로 소환되기도 하며, 한 개인의 내면을 억압하는 죄의식에 대한 고해성사가 끼어들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욕망과 대립하고 모순되는 죽음의 주제를 화폭에 밀어 넣은 한스 홀바인의 그림과 네덜란드의 바니타스 정물화의 이미지가 욕망을 논하는 강연의 사이사이를 자르고 끼어든다.
이렇게 조각조각 파편화되고 맥락 없이 이어 붙여진 듯이 보이는 텍스트와 이미지, 배우의 몸짓과 발화, 음악과 소리 등, 서로 뒤섞이고 빠르게 교체되어가는 무대의 기호들이 가지는 의미를 관객들은 낱낱이 명료하게 파악할 수는 없다. 그로 인해 이 공연은 난해하게 느껴질 수 있다. 난해함은 대체로 흡인력을 떨어뜨리고 흥미를 감소시킨다. 헌데 난해한 듯이 보이는 이 공연은 의외로 관객을 강하게 흡인하며 지루하지 않게 느껴진다. 그 비결은 선명한 주제의식과 풍성하고 강렬한 이미지의 활용에 있다.
무대에는 이파리 하나 없이 밑둥이 잘려나간 앙상한 나무가 거꾸로 세워져 무대 양 옆에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고 중앙에는 커다란 세 개의 거울이 놓여 있다. 거꾸로 선 앙상한 나무는 주객이 전도된 도착적인 인간의 욕망과 죽음을 상징하는 기호처럼 보이며, 이쪽을 비추는 거울이 되었다가 저쪽의 대상을 보여주는 유리창처럼 변화무쌍하게 기능하는 커다란 직사각형의 구조물은 ‘나의 욕망은 타자의 욕망’이라는 공연의 주제를 명료하고도 강력하게 대변하는 메타포로서 작동한다. 극의 마지막 부분에서 강연자가 강연을 하는 동안 하나하나 옷이 벗겨지고 포획되어 죽음의 장소에 끌려가게 될 때까지 자신의 죽음을 의식하지 못한 채 강연의 열변을 토하고 용수가 씌워져 그 말소리가 웅웅거리는 소음처럼 들리게 되고 결국 생명이 파괴되는 장면은 강렬한 은유로서 우리 인간 삶의 실체를 적나라하게 폭로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한 무대의 기호들과 조우하면서 그림들에 대한 강연자의 상세한 설명을 들을 때 관객들이 발견하는 이 공연의 메시지는 비교적 간단명료하다. 우리의 욕망은 타자의 욕망이며, 인간은 반드시 죽는다는 것! 따라서 이 공연의 주제음악의 제목처럼 인생은 “바람에 날리는 먼지(Dust in the Wind)” 같은 것! 모두가 알고 있으나 잊고 사는 자명한 진리를 이 공연은 새롭게 환기시키는 듯하다. 무대를 마주한 관객은 질주하는 욕망의 열차를 멈추고 자신의 욕망에 관하여, 삶과 죽음에 관하여 사유하게 된다. 이렇듯 이 공연에서 이미지들은 얼핏 보기에 명료한 의미를 송출하는 것처럼 보이고, 그럼으로써 관객들의 관심을 끌어당기고 만족감을 느끼게 한다. 하지만 이미지는 하나의 의미로 환원되지 않는 잉여가 범람하는 곳이다. 그것이 이미지의 힘이다. 이 공연은 일정한 의미화를 통해 상징의 프레임 속에 포섭하면서 동시에 자유로운 상상의 여백을 남기는 방식으로 이미지를 다룸으로써 관객들에게 고갈되지 않는 재미를 유도한다. 뿐만 아니라, 배우의 발화와 움직임, 빛과 어둠, 침묵과 소리 둥 대립적인 무대요소들에 고저와 장단, 완급과 강약을 적절하게 부여하여 대위법적인 리듬감을 조성한 것도 관객이 지치지 않고 무대를 쫓아갈 수 있게 한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였다.
다만, 한 가지 욕심을 내자면, 욕망의 이론과 소설은 이 공연을 구축하는 씨실과 날실이다. 어차피 욕망이론은 서구의 이론이다. 그렇다면 소설을 서구의 것이 아닌 한국의 것으로 했다면 관객들에게 더욱 깊은 성찰을 유도하고 이질적인 것이 충돌하면서 더욱 흥미로운 공연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앞으로 더욱 성찰적이면서 예술적으로 풍요로운 극단 피악의 퍼포먼스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