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고치는 연극

 

백승무(공이모 회원)

공연명: <의자 고치는 여인>

원작: 기 드 모파상

연출/각색: 송현옥

극단: 물결

상연기간: 2020.03.12-2020.03.14

상연장소: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

관극일시: 2020.03.12. 20:00

사진: ⓒ옥상훈, ⓒ극단 물결. 김동락

 

대중적 성공의 공식

확고한 연출문법과 특유의 무대언어를 소유한 몇몇 연출가가 대중적 성공을 거두는 공식이 있다. 바로 쉬우면서도 서정적인 텍스트를 선택하는 것이다. 길고 복잡한 텍스트는 연출술을 발휘할 여지가 부족하다. 서사전달과 이념설명에 매달리다 보면 기법, 기술, 기예, 장치 따위는 꿔다놓은 보릿자루가 된다. 억지로 기술을 넣으면 리듬이 깨지고, 허술하게 기법을 남발하면 산통이 깨진다. 하지만 얌전하고 촉촉한 텍스트를 만나면 리듬이 춤을 추고 상상력이 하늘을 뚫는다. 기술학으로서 연출술이 곡예를 부리기 시작하는 것이다. 연출술의 묘미가 객석으로 흘러넘치는 데에 작약 구실을 하는 것이 텍스트의 서정성, 즉 정서적, 감성적 요소이다. 텍스트의 단순성과 서정성은 연출술을 가진 연출가의 두 날개이다. 볼거리 중심의 형식미와 감성적 내용이 적절히 결합했을 때 대중은 환호한다. 물론 이들이 어렵고 딱딱한 작품에 어눌하다는 말은 아니다. ‘대중적 성공’에 한정해서 말하면 그렇다는 거다.

 

 

대표적 사례가 고선웅의 <푸르른 날에>와 <조씨고아>, 양정웅의 <한 여름밤의 꿈>. <푸르른 날에>는 신파성 강한 멜로드라마가 고선웅의 연출술이 가진 냉온탕 왕복술에 의해 명작으로 환생한 경우. <조씨고아> 또한 고대 서사의 비현실성과 과장이 연출가 특유의 양식적 연출술과 결합하여 정서적 폭발을 가져왔다. <한 여름밤의 꿈>도 텍스트의 단순화 각색이 연출술을 발휘할 토양이 되었다.

 

 

실천하는 몸, 말을 능가하는 몸

송현옥 연출이 드디어 밀물을 만났다. 역시 비법은 연출술을 꽃피울 수 있는 비옥한 텍스트의 토양! 전작인 <인형의 집>이나 <밑바닥에서>는 텍스트와 신체조형술 간의 대결·경쟁이 지배적이었다. 텍스트는 몸을 배제했고, 몸은 텍스트를 침범했다. 고전 텍스트가 가진 권위 때문이리라. 텍스트를 완전히 해체·조합할 권리까지 확보하긴 쉽지 않다. 하지만 <의자 고치는 여인>은 다르다. 기술학적 연출술이 구상부터 실현까지 일관되게, 첫 장면부터 종결부까지 연속적으로 관철된다. 연출술의 진면목을 제대로, 전체적으로 일람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의자 고치는 여인>은 연출가 개인의 성취를 넘어선다. 몸 언어, 신체조형술, 움직임 미학에 있어서는 송현옥 연출이 닿은 곳까지가 한국연극의 영토이다(비슷한 구성법을 가진 ‘극단 사다리’는 팬터마임 베이스의 이웃 영토이다).

 

 

더 중요한 것은 항목 일람에 있는 게 아니라, 그 형상화의 높은 경지이다. ‘주어진 상황’에 맞게 조형적 움직임을 구성·배치하는 것은 어지간한 내공이 아니면 쉽지 않다. 몸 언어의 역동성과 감각적 직접성, 그 강렬함과 원초적 표현성에 대한 구호는 많다. 하지만 말보다 더 설득력 강한 몸, 혀보다 더 직관적인 형체, 소리보다 더 자극적인 움직임을 본 적이 있던가. 방식도 기발해야 하고, 의미도 충분히 전달되어야 하고, 형식도 아름다워야 한다. 뻣뻣한 몸, 어설픈 동작, 부자연스러운 동선, 밋밋한 구성, 단조로운 리듬, 유치한 표현력 등 넘어야 할 산이 태산이다. <의자 고치는 여인>은 잘 조련된 몸과 창의성 넘치는 연출술, 오랜 훈련으로 빚어진 앙상블로 차원 높은 예술성을 보여준다.

 

아름다움은 예술의 본령

그 높은 예술성의 원동력은 ‘자유’. 원작이 산문이자 짧은 단편인 것이 적중했다. 텍스트 곳곳의 빈 구멍을 자신의 상상력으로 가득 메울 자유가 생기자 연출가는 나래를 펼쳤다. 장막희곡인 전작들에선 대사 파트와 무용 파트의 할당을 텍스트 논리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지만, <의자 고치는 여인>에서는 모든 장면 할당과 구성을 연출가의 논리와 감각으로 밀어붙일 수 있다. 흐름은 자연스럽고, 리듬은 생동감이 넘치며, 힘의 분할(강약)도 균형감 있고, 호흡조절(완급)도 부드럽다. 이렇게 텍스트 정지(整地)작업이 매끈하다 보니 그 위에 올라선 건축물도 찬연하다.

 

 

가장 시선을 끄는 건 매혹적인 미장센의 쉼 없는 퍼레이드. 최근 들어 이렇게 아름다운 미장센(들)을 본 적이 없다. 장면 하나하나가 한 폭의 회화처럼 눈부시다. 1~3선, 상·하수의 고른 공간활용, 주인공을 중심으로 한 상징적 공간배치, 대·소도구의 난이도 높은 유희, 인물군의 흥미로운 뭉침과 흩어짐, 교과서 같은 조명과 감성적 음악 등 어느 것 하나 빠질 게 없는 미장센이다. 새삼, 연극은 아름다운(움의) 예술이다.

 

황금 구성미, 모범적 소품활용법

미장센 美학의 한 축은 작품의 구성원리에서 나온다. <의자 고치는 여인>은 솔로씬―2인씬―집단씬이 반복되는 고전발레의 구성법을 닮았다. 화려한 디베르티스망을 겸비한 이 고전적 구성법은 다양한 취향의 관객을 지루함 없이 만족시키는 황금률이다. 이 역동적 구성법이 성공하려면 각 장면이 논리적으로 이어질 뿐만 아니라, 강약·완급의 원리에 맞게 조화로운 균형감을 확보해야 하며, 무엇보다 군더더기 없는 매끈한 이음새를 가져야 한다. <의자 고치는 여인>이 놀라운 것은 각 장면이 철저한 미장센 미학에 입각하여 제작되었음에도 그 등퇴장 이음새가 그렇게 유려할 수가 없다는 점이다. 대극장 무대의 장면 전환을 이렇게 자연스러우면서도 예쁘게 수행할 수 있는 비교집단은 ‘극단 사다리’뿐일 것이다. 등퇴장에 소요되는 5초 때문에 리듬감을 잘라먹는 대극장 공연이 얼마나 많았던가! 속도와 방향, 겹침, 시각성을 정밀하게 계산한 이런 장면 전환은 공연의 리듬감을 살려준다.

 

 

미장센 미학의 다른 한 축은 쓰임새와 규모와 시간이 적절하게 고려된 소품(의자, 벽면)의 사용에 있다. 고정소품보다는 이동성 소품이 많은 움직임 공연은 소품의 활용도가 매우 높다. 의자 같은 작은 소품이 집단적 규칙성과 기하학적 배치, 적절한 활용도를 보일 때 시각적 만족도는 높아진다. 이합집산하는 소품이 미장센의 주요 구성물로 동원되는 것이다. 약국 벽면 소품은 유려한 움직임도 장관이거니와 사실성과 안정성을 주는 공간감도 수려하다. 문과 창을 세 조각으로 나눈 것도 효과 만점! 회전 기법으로 역동성을 준 것, 신속한 조립·해체를 통해 긴장감을 유지한 것, 안팎을 교대로 보여주며 입체적 상상력을 자극한 것도 더없이 훌륭하다. 단, 좀 더 가벼운 의자를 사용해 시각적 조형성을 높일 순 없는지, 육중한 의자山은 꼭 필요한지 궁금하다.

 

 

음악성: 창작원리이자 형식률

<의자 고치는 여인>의 백미는 역시 음악성에 있다. 조형적 동작은 음악적이다. 음악에 맞춰 조형(造形)되었기 때문이다. 음악성은 창작원리가 된다. 음악이 없어도 조형적 동작은 음악성을 뿜어낸다. 배우들의 동작 하나하나가 보이는 악기가 되어 우리의 시각세포에 음악을 들려준다. 음악 없이 진행되는 ‘여인’과 슈케의 2인씬(일부)는 그 한 사례이다. 들리는 음악은 더 강력하다. 관객의 정서를 직접 자극한다. 소프라노의 성악곡은 그 반대편 사례이다.

 

 

음악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원리에 대해선 아직도 밝혀진 바 없다. 플라톤부터 쇼펜하우어, 니체에 이르기까지 음악에 관한 논의는 그 강한 힘에 대한 숭배 외에는 밑줄 칠 곳이 없다. 연극에서도 마찬가지다. 과잉감정을 유발하는 멜로드라마와 음맹 사이의 균형점은 알려진 바 없다. 확실한 것은 좋은 공연은 시종 음악적이며, 연주 음악은 적재적소에 배치되고, 연주 음악과 무대 리듬 사이에는 대위법적 긴장이 유지된다는 점이다. 개인적으로는 음악 제목을 인지하지 못할 정도로, 심지어 음악이 흐른다는 사실 자체도 잊을 정도로 미장센과 내용에 몰입하게 만드는 공연을 음악적이라 판단한다. <의자 고치는 여인>처럼, 연주 음악이 상황을 지배하는 게 아니라 배우의 몸과 감정이 연주 음악을 끌고 다니는 경우, 귀보다 눈이 먼저 반응하는 경우, 음악적이다.

 

배우 개입은 정당한가?

아마 이 부분이 <의자 고치는 여인>에서 가장 논쟁적 대목일 것이다. 백 년 넘은 이 낡은 사랑 얘기를, 그것도 집착이나 맹목에 가까운 한 여인의 사랑을 애틋하게 그리는 것은 동시대인의 거부감을 불러오진 않을까. 무가치한 헛된 사랑이라는 마지막 반전을 어떻게 설득시킬 수 있을까. 원작의 단순한 스토리와 허약한 플롯이 어딘가 허전하지 않을까. 그 대안이 관객의 해석이라는 제2의 텍스트를 추가하는 것. 득실을 따져볼 만하다. 하지만 변명이고 군말이고 사족이다. 오히려 정당성 없는 배우 개입은 작품의 총체성을 파괴한다. 정교하게 쌓아 올린 건축물이 휘청거릴 정도다. 눈을 홀린 그 미장센 이미지들이 하염없이 지워진다. 연극은 시간의 싸움이고 기세다. 영화 <기생충>을 패러디하자면 이렇다. “연극이라는 게 뭐야, 앞으로 치고 나가는 거야. 그 흐름을, 그 리듬을 놓치면 완전 꽝이야… 연극은, 기세야. 기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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