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면조를 넘어서
글_윤진현
원작 심청전
작곡 Kevin B. Pickard
대본 박용구
안무 Adrienne Dellas, Roy Toblas 외
연출 유병현
단체 유니버설발레단
공연일시 2020/04/01 20:00
공연장소 유튜브 예술의전당 / 예술의전당 SAC on Screen 제한적 상영회2
관극일시 2020/04/01 20:00
Covid19는 정말 치료제와 백신이 나오기 전에는 종식되지 않으려나 보다. 세계는 Covid19 이전으로 돌아가지 못한다는 말도 차츰 현실로 느껴진다. 그렇다면 공연은 앞으로 어떻게 하면 좋을까? 걱정이 점점 더한다. 그러나 기필코 방법을 찾아내리라 믿는다. 호모 루덴스의 놀이 본능이 여럿이 모여 공연을 보는 즐거움을 포기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 않는다.
아주 잘 알려져 있지는 않았지만 예술의 전당에서는 벌써부터 ‘SAC on Screen’을 시행하고 있었다. 단체나 기관에서 장소를 정하고 작품을 신청하면 쉽게 볼 수 없던 공연영상을 함께 관람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다. 그러한 노하우가 있었기 때문일까? 이번 Covid19 사태에 국립극장 등은 기간을 정해서 공개하는 형식을 취했지만 예술의 전당에서는 실시간 공개방식의 제한적 상영회를 개최하였다. 3월 20일에 시작하여 4월 3일까지 연극 <보물섬>, 연극 <인형의 집>, 연극 <페리클레스> 등을 공개했고 그 외에 뮤지컬 <웃는 남자> 하이라이트, 발레 <심청>, 발레 <지젤> 등도 공개했다. 이들 작품은 모두 예술의 전당에서 이미 구비하고 있던 ‘SAC on Screen’의 레파토리이다.
공부 삼아 보기에는 여러 날 공개하는 것이 좋지만 실시간 채팅에 참여하며 떠들며 보는 재미는 실시간 상영회가 으뜸이었다. 실시간 상영회에 참여하는 특별한 활기와 즐거움은 멋진 공연이 끝나고 왁자지껄 품평하며 몰려나오는 시간이 신나게 늘어난 느낌이었달까? 게다가 영상에는 자막이 있어 발레 마임을 이해하는 데도 유용하였다. 가장 신나는 재미를 제공했다는 점에서 예술의 전당의 제한적 상영회가 조금 더 주목 받아도 좋으리라.
이중 유니버설 발레단의 <발레 심청>은 국립창극단의 창극 <심청가> 실황이 비슷한 시기에 공개된 터라 ‘심청’이에 대한 생각을 이어갈 수 있어 더욱 각별하였다. 유니버설 발레단의 <발레 심청>은 1986년 초연되었고 이후 전세계를 순회하며 100회 이상 공연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예술의 전당에서는 2016년, 2019년에 공연된 바 있다.
<발레 심청>을 보면서 채팅창은 기쁨과 즐거움과 웃음이 넘쳐났었다. 당시는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깊이 생각할 여유조차 없었다. 그러나 국립창극단의 <심청가>를 보면서 여러 판소리 중에서 ‘심청가’가 지닌 특징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우리 판소리 <심청가>의 음악적 특색을 하나 꼽는다면 ‘계면조’라 할 것이다. 자진모리도 계면조, 중모리도 계면조, 진양조는 당연히 계면조…. 생각해보면 심청전의 내용이 온통 그렇기는 하다. 심청이 태어나면서 청이네 어머니 곽씨 부인이 죽고 눈먼 심학규가 동냥젖을 얻어먹이며 어린 딸을 키우고 어린 딸이 자라서는 동냥과 날품팔이로 눈먼 아비를 봉양하니 얼굴 한 번 활짝 펼 날이 어디 있으랴. 게다가 눈먼 아비 눈 뜨게 한다고 죽을 자리로 팔려가, 바다로 뛰어드니 비통함의 극치란 바로 이런 것이 아니랴. 게다가 황후가 되어서도 눈먼 아비 걱정에 행복을 누리지도 못하니 심청이란 캐릭터의 운명은 오로지 심봉사의 개안광명이란 마지막 장면에 이르기까지 맘 놓고 웃어볼 날이 없는 것이다.
계면조로 수렴되는 이 도저한 비극적 정조는 어떤 면에서는 ‘심청’이란 캐릭터의 확장을 저해하는 요소라고 할 수 있다. 표면적으로 보면 「심청전」은 한국문학사상 특출한 판타지와 모험심을 보여주는 작품으로 흥미요소가 진진하다. 평범한 농촌에서 바닷속과 황궁으로 이어지는 대장정은 모험의 요소가 가득하고 연꽃을 타고 부활한다거나 봉사가 개안을 한다는 등의 극적 액션에는 판타지의 요소가 풍부하다. 그럼에도 심청이 모험과 도전의 캐릭터로 거듭 나기 위해서는 판소리 <심청가>의 음울하고 구비구비 구절양장의 비극적 사연을 뒷받침하는 계면조를 넘어서야만 한다. 판소리 다섯마당 중 편안히 듣기 어려운 작품을 꼽는다면 첫째가 <심청가>일 것이니 듣다보면 일찍이 이해조가 「심청전」을 ‘처량 교과서’라고 혹평했던 사정이 이해가 될 만큼 심청 부녀 사이의 음울한 침통성은 끝없이 이어지며 참을성 없는 관객을 기진하게 만든다.
그런데, <발레 심청>은 시작부터 달랐다. 춤, 그것도 ‘발레’라는 장르는 그 매체적 메시지가 판소리와 다르다. 발레는 가능성의 미학이다. 발레는 마치 중력에서 해방된 듯, 불가능을 넘어선다. 고도로 재조직된 신체에서 뿜어져 나오는 아름다움은 생의 기쁨을 분출한다.
어린 심청이의 깜찍한 춤, 자라면서 아버지와 보여주는 개구지고 명랑한 파드되는 심학규와 심청의 관계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그렇다. 동냥젖으로 자라나 동냥으로 눈먼 아비를 봉양한다고 하여 이들 부녀 사이에 기쁨의 순간이 없었으랴.
생각해보자. 효성스러운 마음, 자녀를 사랑하는 마음은 부모, 자식 간의 혈연으로 당위가 되지 않는다. 가장 가까운 곳에서, 가장 무력하고 홀로 설 수 없는 순간에 돕고 지지하고 함께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시간과 기억을 통해서 사랑과 행복이 확대된다. 이 원체험은 무의식에 저장되어 가족에 대한 비논리적인 애정을 길어내는 근원이 된다. 바꿔 말하면 ‘효’라는 전통적 이념으로 수렴되지 않는 개인적 내면에서 심청이의 극적 행동의 동인을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이다.
고난 속에서 공유한 행복한 기억은 당연하지만 심청이의 존재와 행복의 원천이다. 덕분에 심청은 황후가 되어서도 미완성일 수밖에 없는 생의 기쁨을 위해서 아비 찾기를 결단한 것이었다. 말하자면 황후가 되어서 행복했으나 더 행복하기 위하여, 더 완결된 행복을 추구하기 위하여 심청에게는 아비 심학규가 필요했던 것이다. 말하자면 단순히 ‘효’라는 가치로 수렴되지 않는 심청 자신의 행복이 <발레 심청>을 통해 발견된다.
<발레 심청>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심청을 사랑하는 용왕과 아름다운 사랑의 파드되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 순간 심청은 행복으로 빛난다. 심청을 사랑하는 용왕은 청혼하며 용궁에 머물러 살기를 권한다. 이 러브라인은 원작이 없는 것이지만 대단히 아름답다. 관객들은 놀라 열광하면서 용왕 편과 지상의 황제편으로 나뉘어 채팅창을 달구었다. 심청이 황후가 된 뒤에도 용왕 편이 아쉬움이 너무 커서 급기야 심청 역의 황혜민이 황제 역의 엄재용과 현실 부부라는 사실까지 내세워 용왕 편을 달래야 했을 정도였다. 그만큼 용왕 역의 강민우가 매력적이었다고도 할 수 있겠고 아버지를 떠나 다른 세상으로 옮겨온 심청이 먼저 사랑에 빠진 것을 지지하는 의미도 크다.
그러나 용궁이란 장소는 아비 심학규가 닿을 수 없는 곳이다. 심청은 불완전할 수밖에 없는 행복을 뒤로 하고 다시 지상을 향한다. 연꽃에 담겨 황궁에 도착하고 황제와 결혼하게 된 심청이 아비를 찾기 위해 맹인잔치를 열고 천신만고 끝에 심학규가 도착하는 것은 이미 알려진 내용과 같다.
그런데 이렇게 각색되자 의외의 파급효과가 발생했다. 소설 「심청전」에서 가장 빛나는 부분은 맹인 잔체에서 전체 맹인이 함께 눈을 뜨고 이로써 심학규의 딸 심청이 황후로서 전 백성의 딸로 거듭나는 장면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이는 한국의 고전, 또는 판소리 장르가 가진 공동체와 연대의 미학의 절정에 해당한다.
그런데 심청의 내면에서 극적 동력을 만들어내고 용왕, 황제와의 사랑을 거치며 자신의 행복을 완성해가는 순간에는 이러한 공동체, 여러 맹인들이 끼어들 여지가 많지 않다. 그래서 맹인 잔치가 맹인의 개안 잔치로 재편되는 것은 대단히 돌연하고 억지스러운 사건이 되고 만다.
새로운 해석의 가치는 원작의 의미를 구축하는 데 있다기보다 결합하여 상승하는 데 있다.발레 <심청>이 판소리가 지닌 비통한 계면조를 넘어 도전적인 심청의 내면을 발견하도록 전개되는 것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이는 효도라는 전근대의 가치, 효녀라는 전근대의 캐릭터가 어떻게 현대적으로 개편될 수 있을까를 구상하는 시초가 될 것이다. 그러나 원작에 이어져오는 공동체의 가치를 개인적인 목표의 추구로 대체하는 것이 과연 온당할까? 그러고 보니 시그널 화면은 ‘孝’자이다. 대본과 병진하는 서사의 힘이 아니라 발레하는 무용수의 신체를 통해 달성된 의미일 수도 있을 터, 작품 자체가 원작의 한계를 넘어 새로운 고전으로 거듭나기 위해 무엇이 부족한가를 발본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