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과에 대한 치밀한 계산이 아쉬운 연극

<작가, 작품이 되다1 장 주네>

 

_오세곤(연극평론가, 순천향대 교수)

 

원작: 장 주네

연출: 박정희

단체: 극단 풍경

장소: 대학로예술극장 소극장

기간: 2020.05.02.-2020.05.10.

관람일시: 2020.05.08. 오후 7시 30분

 

 

어렵다. 그런데도 집중을 안 할 수는 없었다. 무대도 집중에 최적화되어 있고 연기도 때로는 제의적으로 때로는 유희적으로 관객의 감각을 이끈다. 바닥에 누운 채 무대를 종단하는 동작은 무척 경이롭다. “못생김” 같은 추상적 어휘까지 주어로 동원된 대사는 비록 생경하나 연극적 호기심을 자아낸다. 그러나 역시 어렵다. 공연 내내, 그리고 끝난 후에도 계속 생각하지만 정확히 이 작품의 의도가 뭔지, 설령 꼭 어떤 전언(傳言)의 시도는 아니라 하더라도, 과연 관객들로 하여금 무엇을 느끼게 하려고 했는지 모르겠다. 물론 느낌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것조차 딱히 무엇이라 단정 짓기가 어렵다. 한마디로 의문과 혼란 그 자체이다.

이오네스코, 베케트, 주네, 아다모프, 아라발 등 프랑스 부조리극의 주요 작가 중 유일하게 주네만 프랑스 태생이다. 물론 주네는 태생이 어떻든 자신을 이방인 내지 외계인으로 여겼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과 상관없이 프랑스어가 모어(母語)인 주네의 글은 프랑스어가 외국어인 다른 작가들에 비해 훨씬 어렵다. 마치 우리가 일상에서 그렇듯 수많은 생략과 비약이 포함된 비문, 사전에도 없는 은어와 욕설까지 그 범위가 대단히 넓다.

 

 

그래선지 장 주네의 희곡은 어렵고 난해한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그러나 그 어려움과 난해함은 번역자나 연출자, 배우들에게 해당될 뿐 관객에게까지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사실 관객의 입장에서 연극이 어렵다는 것은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는 뜻이라 할 때, 그렇게 전달이 완벽하지 못한 상태라면 그 작품 또한 불완전한 것이 되고 만다. 왜냐하면 연극 작품에 필수 구성요소로 포함되는 관객이란 보고 듣고 이해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즉 전달이 불완전하면 관객의 상태가 불완전한 것이고 그것은 작품의 불완전함으로 귀결될 것이다.

주네는 어떤 대담에서 “스트린드베리의 <줄리 아씨>는 좋지만 브레히트의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싫다”고 했다. “스트린드베리가 하는 이야기는 시적으로밖에는 표현할 수 없는 것들이지만 브레히트는 누구나 할 수 있는 뻔한 이야기 밖에 안 한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러니 주네의 작품도 당연히 시적이어서 곳곳에 추상과 상징이 넘쳐난다. 대개 작품이 추상적이면 어렵다고 한다. 그러나 그건 맞는 말이 아니다. 본래 ‘추상(抽象)’이란 아르토가 말한 “중국의 침술”처럼 단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한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상징(象徵)’ 역시 막연하고 모호한 것으로 생각한다면 대단한 오해이다.

 

 

주네는 어떤 편지에서 이런 말을 했다. “어떤 젊은 작가한테 들은 얘길세. 애들이 공원에서 전쟁놀이를 하고 있더라네. 두 편으로 갈려 공격 채비를 갖추고, 밤이 됐다고 하더래. 그런데 하늘은 대낮이었지. 그래서 아이 중 하나를 밤으로 정했다네. 제일 어리고 약한 아이가 졸지에 자연의 기본 현상이 되어서 전투를 지배하게 된 셈이지. ‘그’는 시간이자 순간이요, 그러니까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존재가 된 거야. 천체의 순환처럼 고요하게, 황혼의 우수와 화려함에 짓눌린 채, 멀리서부터 그가 다가왔다네. 그가 가까워짐에 따라 다른 자들은, 즉 인간들은 불안하고 예민해졌다네…… 연극이 날 도취시킬 수 있다면, 바로, 이런 형식 때문일 걸세.”

제일 어리고 약한 아이가 모든 것을 지배하는 자연 현상으로 돌변할 수 있다는 것이야말로 상징의 힘이다. 아이의 약함과 거대한 자연의 힘, 그 간극이야말로 ‘시적 힘’의 전형이라 할 것이다. 주네는 바로 이런 ‘시적 힘’을 연극이 지녀야 할 최고의 가치로 여겼다. 실제 첫 희곡 <엄중한 감시>로부터 <하녀들>, <발코니>, <흑인들>을 거쳐 마지막 <병풍들>까지 그가 생전에 발표한 다섯 편의 희곡 모두 ‘시적 힘’을 추구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특히 <병풍들>은 그 이전에 시도했던 모든 수단이 총동원된 작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극단 풍경은 <작가, 작품이 되다 1 –장 주네>라는 명칭으로 이번 공연을 올렸다. 앞으로 여러 작가들을 대상으로 이어나갈 시리즈의 첫 번째 작품이라 한다. 관객이 입장하여 앉고 나면 앞무대 전체를 가로막고 있는 벽 앞에 배우들이 나와 각자 장 주네로서 간단히 생애를 소개한다. 그런 뒤 벽면의 문이 열리고 빛이 쏟아져 나오는 가운데 배우와 관객들이 모두 그 문을 통해 안쪽 무대로 이동한다. 그 무대에는 다시 가운데 연기 공간을 두고 양쪽에 객석이 마련돼 있다. 그러니까 전체 극장이 객석과 무대로 나뉘고 무대가 다시 객석과 무대로 나뉘는 셈인데 주네의 작품에서 꾸준히 나타나는 ‘극중극’ 내지는 ‘극중극중극’의 시도로 볼 수 있다.

무대는 전체적으로 완전히 까맣다. 특히 윤이 나는 까만 바닥은 흰색 그림에 적당하다. 실제로 라일라 역의 박재현은 몇 차례 그렇게 그림을 그린다. 원작 <병풍들>에서는 배우들이 수시로 하얀 평판들에 그림을 그린다. 색깔로만 보면 까만 색 바탕에 흰색 그림이 훨씬 돋보인다. 그러나 <병풍들>의 그 많은 상징들이 아닌 간단한 몇 가지 그림만 그리고 만 것은 무척 아쉽다. 처음 라일라가 그림을 그리는 것을 보면서 모르긴 해도 극의 마지막이 되면 그 넓은 바닥면이 온갖 상징의 그림으로 가득 채워져 장관을 이루리라 기대했던 때문일 것이다.

 

 

작품의 내용은 <병풍들>에서 발췌한 장면들이다. 사실 발췌라고는 하지만 어느 정도 길이를 가진 장면이기보다는 파편적인 조각들을 이어놓은 형태에 가깝다. <병풍들>은 알제리 독립전쟁을 배경으로 한다. 아랍인은 죄수, 하녀, 민중, 흑인에 이어 주네가 소외된 자들로 선택한 마지막 대상이다. 유럽인의 지배를 벗어나고자 아랍인들이 벌이는 투쟁이 <병풍들>의 주된 내용이다. 물론 주네는 대단히 시적이고 연극적인 방식을 이용한다. 이리저리 펼쳐진 병풍에 그리는 그림들은 곧바로 거대한 불이 되고 대포가 되고 전쟁이 되어 무대를 압도한다.

<병풍들>에서 아랍인들은 죽어서도 계속 움직인다. 죽음, 어둠, 악, 범죄, 독약, 파리, 벼룩 등과 같은 부정적 범주들은 동류인 아랍인들을 결코 해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것들을 두려워한다면 진정한 아랍인이 아니다. 원작에서 사이드(라일라의 남편, 아랍인의 상징이지만 아랍 전사들의 총을 맞고 죽음, 김보라 분)의 엄마인 옴무(이번 작품에서는 어머니, 남기애 분)는 그런 아랍의 정체성을 외면하고 유럽인을 흉내 내어 유럽인의 제도와 무기를 갖고 싸우려 하는 아랍인 지도자들에게 경고한다. “그들을 흉내 내면, 그들의 영상이 되면, 이미 그들이 된 거지.” 사실 이 대사는 주네가 아랍 세계에 보내는 예언이자 경고라 할 수 있는 것이 현재의 아랍은 식민 잔재도 청산 못 하고 제대로 된 독립이나 혁명도 이루지 못 한 채 소수 권력자의 독재 아래 대부분의 민중들이 여전히 핍박받고 있기 때문이다.

 

 

장 주네라는 작가가 작품이 되려면 무엇을 보여주어야 할까? 무엇보다 ‘지배와 피지배’에 대한 그의 ‘세계관’이나 ‘시적 힘’을 중시하는 ‘예술관’이 아니었을까? 그러나 극단 풍경의 이번 공연은 둘 중 어떤 쪽의 시도인지, 아니면 또 다른 시도인지 불분명하다. 물론 예술은 실패의 확률이 높다. 즉 시도한다고 모두 전달에 성공하는 것도 아니고, 설령 성공했다 해도 그것이 곧바로 예술적 성공을 뜻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연출과 배우가 무엇을 시도해서 어떤 결과를 빚을지에 대한 계산만은 분명해야 한다. 그리고 계산대로 되지 않으면 비판을 받아야 한다. 분명한 시도, 즉 치밀한 계산에 따른 비판은 이후 성공 가능성을 높이는 데 크게 유효하다. 문제는 시도 자체가 불분명할 경우 그 가능성이 크게 줄어든다는 것이다. 아무리 추상과 상징이라도 배우들은 구체적 확신을 가지고 있을 때 비로소 표현할 수 있다는 당연한 원리를 재차 확인해 준 공연이었다.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