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제(剝製)

사회적 망각으로부터의 거리두기!
일상이 잠식한 잃어버린 기억, 그 박제된 파편의 되새김.
전시극(展示劇) <2020망각댄스-4.16편>

극단 그룹動·시대 연출 오유경

거의 20년 전이다.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왕립미술관을 거쳐 다른 미술관으로 관람 시간을 맞추려고 서둘러 이동할 때였다. 지름길로 가고자 그 두 장소 사이에 있는 식물공원을 가로지르고 있었는데, 작은 온실에서 소박한 사진 전시가 있음을 알리는 분홍빛 홍보 깃발을 보았다. 젊은 모습의 사진작가의 얼굴과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을 날아가는 선명한 빨간색 비닐봉지 하나가 찍힌 사진 한 장이 인쇄된 것이었다. 비닐봉지가 떠다니는 것을 집중해서 찍었다는 점이 재밌었고, 사진 속 그 빨간 비닐봉지가 너무도 당당해서 신기했다. 더위도 식힐 겸 사진이 전시된 온실로 향했다. 전시공간은 양쪽으로 좁고 길게 나 있는 복도식 구조였는데, 왼쪽 공간엔 그 당당한 빨간 비닐봉지가 찍힌 사진 7점이 전시되어 있었다. 설명에는 그날 그 봉지가 하루 1시간 동안 파란 하늘을 자유롭게 날아다녔다고 적혀있었다. 그 작가의 익살스러움에 유쾌해진 기분으로 오른쪽 전시공간을 들어섰다. ‘또 어떤 재치 있는 발상이 즐겁게 해줄까!’ 이번엔 사람의 얼굴만 조명해서 찍은 사진들이 죽 연이어 전시되어 있었는데, 이들은 이라크전쟁에 파견된 영국 군인들의 얼굴이었다. 사진은 한 사람당 2장을 찍어 나란히 걸어두었는데, 첫 번째 사진은 전쟁에 파견되기 직전 얼굴 모습이고, 두 번째 사진은 전쟁에서 돌아온 이후의 얼굴 모습이었다. 첫 번째 사진에는 당사자의 이름과 파견되기 전의 나이가 적혀있었고, 두 번째 사진에는 전쟁 후 귀국한 당시의 이름과 나이가 적혀있었다. 파견 전 그들은 대부분 18~20세였고 그들의 얼굴은 매우 해맑고 천진했고 반짝이고 있었다. 바로 연이어 볼 수 있는 2~3년 후 전쟁을 겪은 그들의 얼굴은 빛을 잃고 아무것도 담기지 않은 공허한 눈빛으로 카메라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렇게 한 8명의 어린 군인들의 변화를 묵도하며 도달한 복도 끝에는 작은 동영상 전시실이 마련되어 있었는데, 거기엔 머리를 짧게 민 한 젊은 여성 군인, 이라크전쟁에서 돌아온 그 군인이-아무래도 그 사진 속 한 얼굴의 소유자인 듯 여겨지는- 군복을 입은 채 격렬히 춤을 추는 모습이 편집 없이 기록된 영상이 상영되고 있었다. 영상은 전혀 어떤 소리와 음악도 담고 있지 않았다. 그 방에는 2명 정도가 겨우 앉아 볼 수 있는 작은 등받이 없는 벤치가 2대 놓여 있었는데, 하나에는 등이 넓은 한 유럽인 아주머니 한 분이 이미 그 동영상을 관람하며 앉아 있었다. 전시실에는 정말 사람이 없었다. 어떤 부드러운 감상용 음악도 흐르지 않았고, 오직 하나의 앵글로 그 여성 군인의 춤추는 움직임만 화면 가득 출렁이고 있었다. 보아야 하나 말아야 하나 소극적인 자세로 그 아주머니 등 뒤에 있는 다른 벤치에 앉았는데…5분, 10분, 15분, 30분, 40분, 1시간…적당히 멈추고 다시 시작하는 영상인 줄 알았는데… 그 영상은 1시간이 넘어가도록 멈추지 않고 계속되었다. 중간에 멈춰 다시 시작하는 여느 전시 관람용 동영상과 달리 그 동영상은 멈추지 않았고, 마치 1시간 넘게 그 군인이 음악도 없이 같은 동작을 반복하며 춤을 추고 있는 모습을 실제로 내 눈앞에서 그녀와 같은 공간 안에서 지켜보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착각이 들었다. 적당히 보고 나올 수도 있었는데, 무엇이 그리 했는지 그 군인의 슬프고 공허한 몸짓을 감히 적당히 보고, 그만 보고, 아니! 보기를 멈추면 그 처절한 몸짓이 그 좁은 방에 홀로 남겨지고 외면당하는 것처럼 여겨져, 감히 그만두고 나올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것을 같이 지켜보던 아주머니의 등이 조용히 떨리는 것을 느꼈고, 내 눈에 눈물이 흐르는 것을 알았고, 이윽고 그 아주머니와 나의 흐느끼는 울음소리가 점점 커져 숨 막히게 무거운 침묵이 짓누르던 그 공간을 저릿하게 채우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인생 최고의 전시 관람이었다.

전시극(展示劇)!

극단 신세계의 작품 《박제(剝製)》에는 전시극(展示劇)<2020망각댄스-4.16편>라는 부제(副題)가 달렸다. 부제가 말해주듯 작품은 2014년 4월 16일에 있었던 세월호, 그 비극적 참사를 다루고 있다. 정확히 말하면 세월호의 침몰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그 비극적 사건을 지켜본 대중의 기억 흐름, 그 망각의 역사, 현재에도 꾸준히 진행되고 있는 그 기억의 박제화(化)의 현주소를 다루고 있다. 역시 부제 속 ‘전시극(展示劇)’이라는 용어처럼, 작품은 짧은 총 9개의 장면-한 장면당 5분에서 길게는 15분으로 진행되는 장면-이 8개의 흩어진 공간 전시실에 시간차(差)를 두고 전시 공연되는 형식을 가진다. 형식에 맞게 4명의 도슨트(docent)들이 관람객을 2팀으로 나누어 관리 안내하며 작품을 진행한다. 관람객의 팀은 하나는 1년의 간격을 둔 시간순(順)으로 2014년에서 2020년 현재까지, 또 하나는 그 반대의 시간순으로 2020년 현재에서 2014년까지로 나뉜다. 이 결정은 관람객이 티켓을 수령하는 단계에서 스스로 선택하며 결정되고, 각 팀에 맞는 종이 색 띠를 팔목에 차면서 도슨트들이 쉽게 이들을 구별하고 안내할 수 있도록 준비된다. 본인은 시간의 역순(逆順)을 택했다.

첫 전시실은 2020년 현재에 모두 모여, 2020년 현재 지금 순간에서 당시 세월호 사건을 기억하는 불특정 다수의 당시 기억 조각을 듣는다. ‘2014년 4월 16일 나는 그때 무엇무엇을 하고 있었다.’라고. 잔잔한 파도 소리가 계속 들리는 가운데, 2020년 현재의 우리는 ‘당시 그날 그 순간, 나는 무엇을 하고 있었나’를 잠시 무덤덤하게 떠올리는 시간을 가진다. 도슨트들은 그 어떤 장면의 목적을 홍보하거나 어떤 정서를 목적하여 유도하는 행위를 하지 않기 때문에, 수명의 관람객들이 한팀을 이루어 함께 관람은 하지만, 철저하게 독립된 개인으로서 각 전시된 장면을 목격하고, 느끼고, 참여할 수 있다. 두 번째 전시는 2019년 4월 16일이다. 복합문화예술공간 행화탕은 일제강점기때부터 있었던 과거 목욕탕이었던 공간으로, 지금은 건축골절구조만 살려 각종 전시와 독특한 형식의 공연들에 어울리는 환경을 제공하고 있다고 한다. 재밌게도 2019년 4월 16일은 좁은 골목을 끼고 돌아, 과거 이 행화탕 주인의 살림집이 아니었을까 여겨지는 2층 집 2층, 3개의 방에서 3개로 나뉜 전시로 보여진다. 두 방에는 T.V. 1대가 놓여 있고 한 여인이 진행하는 아주 발랄한 유튜브(U-tube)방송이 진행된다. 이 방송 소리는 모두 귀에 꽂은 헤드셋(head-set) 통해 매우 개별적이며 입체적으로 각자의 귀에 요란하게 들린다. 영상 한구석에는 자막이 계속 올라가고 있는데, 매우 작은 글씨로 빠르게 지나가서 미처 무슨 내용인지 파악하기 어려운 것들이다. 다음 방에서 겨우 조금 더 큰 글씨와 조금 느린 자막에서 겨우 확인할 수 있는바, 그것은 2019년 진행된 세월호 관련 조사 진행사항 기록이었다.

영상에선 한 여인의 능숙한 pole-dance가 계속 진행되고 있다. 그 영상은 관람객들이 2019년 벌어진 세월호 관련 진행기록들을 읽는데 집중할 수 없게 방해가 된다. 마지막 방에서 그 여인은 실물로 의자에 앉아 있고, 그 방은 온통 세월호 참사를 향한 사람들의 마음과 위로의 한마디들이 적힌 메모로 가득 차 있다. 관람객은 자신도 한마디 적어 붙인다. 세 번째 2018년 4월 16일 ‘보경이의 방’은 2019년이 전시된 세 개의 방을 잇는 2층 거실에 꾸며져 있다. 방은 온통 엉망으로 어지럽혀져 있고 벽 한 면은 통째로 뜯겨 나가 위태로와 보이는데, 공사장 위험표시 리본이 처져 있다. 2018년 보경이는 침대에 누워 깊은 잠에 빠져 있다. 아이유의 ‘밤편지’가 흐른다. 관람객은 순간 잠시 보경이 방에 놀러 온 사람처럼 친근함을 느낀다. 보경이가 잠에서 일어난다. 그녀가 혼자 독백을 시작하는데, 그 내용은 2018년에 진행된 세월호 관련 진행기록이다. 역시 원체 빨라서 각각을 기억하기 너무 어렵다. 다만 죄 있는 자들이 모두 보석으로 풀려났다는 격앙된 목소리가 들린다. 벽면 한구석 빼꼼히 열린 낮은 창고 문틈으로 조사진행기록을 읊는 소리가 흘러나오는데, 이조차 보경이가 그 문을 닫자 억지로 입이 막힌 것처럼 멈춰진다. 2017년 ‘잔치’. 1층 마당으로 내려와 계단에 앉아 2017년 행위자들이 나눠준 오제미로 박을 터트리고 다시 계단을 올라 따로 독립된 작은 공간으로 이동해서 문재인대통령 당선을 축하하는 파티를 함께하며 십오야 노래와 흥겨운 춤 공연을 감상하면서 화채를 먹는다. 다시 안내된 지하실. 2016년 4월 16일. 지하 그 작은 방에는 한 남자, 광대인 듯. 마임 동작으로 반복해서 그 방을 나가려 시도하지만 철문에 막혀 매번 탈출에 실패한다.

장면이 끝난 후 나눠 준 작은 촛불을 켜고 잠시 침묵의 시간을 갖는 관람객. 다시 새로운 공간으로 안내되는데, 거기엔 분노에 찬 두 명의 사람이 있다. 2015년 ‘말의 파도’. 세월호 1주기에 박근혜대통령은 남미순방을 가고 정부는 그 참사의 진실을 부당하게 외면한다. 벼락소리, 주파수 소리, 파란 불빛들이 행위자들의 분노처럼 공격적이고 날카롭다. 2014년 ‘입력’. 안내된 공간은 바닥이 고르지 못하고 여전히 위험해 보이지만 높은 천장이 있어, 창문 없이 밀폐된 공간이라도 조금은 숨통이 트였다. 바닥에는 작은 원들이 그려져 있는데 행위자들은 게임을 유도한다. ‘안경 쓴 사람들은 다른 원으로 이동하라.’ ‘가방을 맨 사람들은 다른 원으로 이동하라.’ 등으로 즐거운 이동 게임으로 인식된다. 이 게임의 지시는 벽면에 글로 지시되는데 그 말투는 점점 폭력적인 명령조로 바뀐다. ‘아무도 움직이지 마라’ ‘기다려라’ 세월호 탑승객들에게 내려진 안전 지시문이다. 공간의 바닥에서 문이 열리고 누군가 탈출하려 한다. 문을 닫으라 명령한다. 문이 닫히면 진실도 닫힌다. 2020년 현재에 다시 모인 사람들. 각 년도 마다 행위자로 있었던 그 다수의 불특정 사람들은 각각의 연도가 새겨진 단 위에 올라서서 처음에 그랬던 것처럼 당시 그들이 ‘무엇을 하고 있었나’ 기억의 파편들을 되새긴다. 박제된다.

이 작품은 2017년 4월부터 꾸준히 올려졌다. 그 연보는 망각으로 박제된 기억들을 해마다 헤집어 떠올리고 붙들려는 간절한 노력의 기록 같아 보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망각으로 박제되는 기억을 재생하는 것은 불행히도 점점 더더욱 어려워질 것이 자명하다. 그때마다 이 노력은 새로운 방법들로 무장해야 할 것이다. 죽은 기억을 되살리려면 더욱 강하고 자극적인 효과들을 내어야 할지도 모른다. 아르또의 잔혹연극처럼. 행위자들의 신념과 마음은 더욱더 간절하고 절박해져야 할 것이다. 그것이 이 공연의 숙명이다. 시작했으므로 이 진실의 규명이 끝날 때까지 끝날 수 없을 것이다. 그 긴 여정에서 우리는 얼마만큼 오래도록 버틸 수 있을 것인가. 중도에 그만둔다면 이조차 슬그머니 꼬리를 뺀다고 폄훼할 것이다. 사회를 제대로 곧추세우려는 예술의 절박한 책무는 앵무새처럼 똑같이 반복재생하는 것만으론 목적을 이룰 수 없다. 매번 처음처럼 똑같이 상처 입고, 고통을 느끼고, 다시 처음처럼 진실 앞에 두 눈을 부릅뜨도록 박제된 우리를 무자비하게 흔들어 깨워야 한다. 부디 그 여정 속에서 지치지 않기를. 날카로운 명경(明鏡)으로 새롭게 공부하고 공부하길 멈추지 말기를.

2014년 4월 16일 오전 8시. 세월호 참사를 생중계 뉴스로 접하며, 수많은 죽음을 어이없게 지켜보던 그 참담함의 기억. 2015년, 1년 내내 올렸던 카톡의 노란 리본 상태 메시지가, 2016년은 한 달 전에, 2018년은 1주 전에, 2019년은 3일 전에. 그리고 2020년은 3일 지나고서야 ‘아차! 16일이었지!’ 하고 기억하기를 잊었다는 것을 인식했다. 본인도 박제된 기억을 다시 춤추게 할 처절한 망각의 댄스를 절박하게 추어야 한다. 그 젊은 여성 군인처럼. 음악이 없어도 5분, 10분, 15분, 30분, 40분, 그리고 1시간. 아니, 1년, 2년, 3년, 4년. 그 후로도 오래도록 생생히 기억하기를 멈추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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