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몸으로 듣는 아름다운 참언어의 세계

연극 <화전가>

글_윤진현(연극평론가)

     

작 : 배삼식

연출 : 이성열

단체 : 국립극단

장소 : 명동예술극장

일시 : 2020/08/06~2020/08/17

사진제공_국립극단

얼마 만이던가? 눈물을 흘리며 공연을 본 것이….

오래 그립던 극장, 문을 열지 않아서, 시간이 맞지 않아서, 예약이 늦었더니 자리가 없어서…. 자리에 앉은 순간, 극장이 실감 났다. 연극은 어떻게든 볼 수도 있겠지만 극장은 대체 불가능일 수 있다. 극장을 신전으로 섬기던 자들의 믿음이 과장이 아닐 수도 있다. 그리고 배삼식 극본, 이성열 연출의 <화전가>는 그 행복한 순간을 완벽하게 만들어줄 만큼 좋은 작품이었다. 무엇보다 이야깃거리가 많다. 이 작품이 보여주는 역사의식, 이 작품의 인물과 사건, 공간적 배경과 배우들의 연기….

그 모든 것이 어우러진 <화전가>에서 한 부분만을 특정하는 것은 비생산적이다. 그럼에도 <화전가>를 특별하게 만드는 지점을 꼽아야 한다면 이 작품을 가득 채운 ‘안동 말’을 들어야 할 것이다. 흔히 경상도 사투리라고 뭉뚱그려 지칭하지만 경상도 방언도 경주 이남과 이북이 다르다고 한다. 울림소리에 둘러싸인 ‘쌍기역(ㄲ)’의 질문을 듣고 있노라니 안동 말이 가진 어여쁨과 역동성과 솔직한 인정미가 감미로웠다. 그리고 이어서 한국어가 잃어버린 수많은 발음, 문자표기에서 놓치고 포기해버린 한국어 음운의 세계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사진제공_국립극단

연극에서 방언의 사용은 제한적이다. 우선 의미전달에 방해가 되기 쉽고 대사전달력을 약화시키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현대의 배우들이 방언을 익히기 위해서는 문자로 기록된 대사를 다시 청각적으로 재해석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방언이란 문자체계 안에서 표기방식을 부여받지 못한 언어, 파롤(parole)의 세계에 머무는 언어이다. 따라서 문자로 기록된 방언을 대충 익혀서는 방언으로 ‘말하기’가 아니라 ‘흉내내기’에 그치게 된다. 배우로서는 연기설계에 치명적인 구멍이 생기는 셈이다.

뿐만 아니라 근대 한국어는 독립과 분단극복이란 민족사적 과제에서 한시도 자유로울 수 없었다. 민족어의 정립, 이 과정에서 제도화된 ‘표준어’의 제정이란 상상의 민족공동체를 전제로 이를 선취하는 과정에 다름 아니었다. 다시 말하면 ‘민족어’가 곧 ‘표준어’로 등치되면서 비표준어 영역은 주변화되었고 표준어/방언은 서열화, 위계화는 공고해졌다.

이러한 경향은 연극 속의 인물에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표준어를 구사하는 프로타고니스트와 사투리를 구사하는 안타고니스트, 표준어를 구사하는 주인공과 사투리를 구사하는 주변 인물의 구도는 상투적이고도 확고했다.

문학영역에서는 이러한 구도를 깨고 지방어를 한국어의 지평을 확대하는 기회로 폭넓게 활용해왔다. 그러나 연극에서는 요원한 일이었다. 이는 앞서 말했듯 별도로 방언을 배워 연기를 설계해야 하는 배우의 신체적 한계를 넘어서야 했기 때문이다.

사진제공_국립극단

그런데 <화전가>는 극적 언어에 대한 기존의 상식과 한계를 완전히 넘어섰다. 문학어 또는 일상어로서만이 아니라 극적 언어로서의 역할과 가능성을 드디어 비표준어 영역으로 확장해갈 수 있다는 확신을 제공한다. 더구나 그 결과 언어를 매개로 한 의미의 전달과 이를 기반으로 한 재현의 상투성마저 재고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말하자면 방언을 사용함으로써 민족어의 지평을 넓힌다는 문학사적 가치와 역할을 넘어 언어적 이해 없이도 소통과 공감의 지평이 무한대로 확장되는 경험을 제공하였다.

<화전가>의 많은 관객은 이 도저한 방언의 세계에서 이들의 언어를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했다는 사실 때문에 조금은 당혹감을 느꼈을 것이다. 그러나 ‘소통’이란 전달과 이해의 영역에서 완결되지 않는다. 안동사투리로 쉽게 동의할 수 없다면 셰익스피어와 T.S. 엘리어트의 ‘영시’는 어떤가? 영어 한 마디 모르는 ‘고모’(전국향분)가 그러했듯 우리 또한 저절로 알아듣게 되지 않던가. 이 작품이 보여주고 이 작품으로 이해하고 수용하게 되는 아름다움과 즐거움과 아련한 슬픔은 메시지에 한정되지 않는다. 표준어 문자 텍스트가 아니라 온몸으로 발신하는 비언어적 의미의 세계가 있다는 것을 <화전가>는 증명하고 있지 않은가.

사진제공_국립극단

‘민족어’라는 상상의 공통언어이며 이를 지탱하는 것이 ‘표준어’라는 제도인 것을 근본적으로 문제라고 단정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표준어/방언으로 언어를 서열화하고 표준어를 사용해야만 의미 전달이 용이하다는 판단은 재고해야 한다. 또한 비표준어 영역을 인물의 성격에 부수되는 열등한 속성으로 사용하는 것은 무책임한 미망이다.

극적 언어란 문자로 순수하게 환원되지 않는 입체적 언어이다. 언어와 언어, 지역과 지역이 우열로 수용되지 않는 세계, 통역이나 해설 없이도 평등하게 대화하는 세계를 가능하게 한다. 아름답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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