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승무(연극평론가)
* 본 글은 <공연과 이론> (2020년 가을호)에 게재되었던 리뷰입니다.
공연명: <쉬지 스톨크>
원작: 마갈리 무젤
연출: 까띠 라뺑
극단: 프랑코포니
상연일시: 2020.09.15.-2020.09.27.
상연장소: 선돌극장
관극일시: 2020.09.17.
소극장 공연은 이러해야 한다
선돌극장은 무대장치란 걸 설치할 수가 없다. 뭔가 설치하는 순간, 미장센도 망가지고 관객 시선도 망가진다. 그렇다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건 아니다. 공간을 어떻게든 활용하긴 해야한다. 그 중용점을 찾는 게 관건이다. 이때 필요한 게 콘셉트! 최소한의 장치로 무대도 살리고, 관객 시선도 살리는 공간적 구상이 필수적이다.
<쉬지 스톨크>의 무대 콘셉트는 무엇인가. 빨래 더미에 눌린, 혹은 둘러싸인 무대-감옥, 시침· 분침이 무한 반복 회전하는 시계판, ‘잘’ 봐야 눈에 띄는 구겨진 표면. 이 세 구문을 결합하면, ‘사람을 숨막히게 하는 답답하고 초조한 시·공간’이라는 콘셉트가 도출된다. 이 콘셉트 덕에 관객 시선을 방해하지 않고 동선을 단순화한 소극장 최적화 무대가 만들어진다.
암전도 허투루 쓰지 않는다
감옥처럼 사방을 가로막은 기다란 빨래, 둥근 바닥 시계판, 그리고 그 위에 놓인 테이블과 의자. 도입부부터 코러스는 반복적으로 6월 17일의 저녁 시간을 상기시킨다. 그 파국의 시간을 향해 퍼즐이 하나둘씩 끼워진다. 장면 전환 시에도 시간은 ‘가시적으로’ 흐른다. 조명은 날카롭게 원을 가른다. 뚜렷하게 그어진 조명 선은 두 사람의 소통을 방해하는 장벽이기도 하고, 서로의 피부를 후벼파는 날 선 칼이기도 하고, 임박한 6월 17일을 재촉하는 성마른 시침이기도 하다. 이것이 암전까지도 상징화하는 소극장의 경제학이다.
이렇게 판이 좋으면 볼거리도 어깨춤을 추는 법이다
소극장의 매력은 역시 ‘대면’이다. 대극장에선 잘 보이지 않고 잘 들리지 않던 것들이 소극장에선 돋보기를 들이댄 듯 선명하게 보인다. 마치 시계판의 구겨진 표면처럼, 무탈해 보이던 쉬지의 고통스러운 삶처럼, 보이지 않던 것을 보게 하는 것이 소극장의 힘이고 매력이다. 분노하고 소리치고 힘겨워하는 한 인간이 코앞에 있으니 거울세포가 훨씬 더 강렬하게 반응한다. 배우의 섬세한 내적·외적 행위가 결손 없이 그대로 심장에 꽂힌다. <쉬지 스톨크>처럼 불규칙적 시간 흐름과 시적인 대사를 지닌 작품은 배우가 생산하는 미시적 정보가 작품이해에 큰 역할을 한다. 좋은 판을 깔아놓으니 소극장의 매력이 진동을 한다.
기본 모티프는 희생양 제의이다
쉬지는 반복해서 희생양의 피 냄새를 맡는다(그 반복적 피의 이미지가 시각화되지 못한 것은 아쉬운 대목이다). 르네 지라르에 따르면, 희생양 제의는 더 작은 폭력으로 더 큰 폭력을 막는 일종의 제어장치이자 예방백신이다. 여성의 출산/육아는 가부장적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항상 양보하고 인내해야 하는 고통이었다. 공동체의 질서라는 더 큰 가치를 위해 개별 여성의 고통은 그 합이 막중함에도 불구하고 무시되고 은폐되었다. <쉬지 스톨크>는 묻는다. 누군가의 고통 위에 지은 누각이 과연 안전할 수 있는가? 누군가의 출혈로 지탱되는 질서가 과연 평온할 수 있는가? 차별과 착취를 통한 손쉬운 질서보다, 도달하기 어렵더라도 평등과 균형을 통한 건강한 질서가 필요하지 않냐고 묻는다.
물론 쉬지는 묻고 따지기보다 제단에서 피를 흘리며 쓰러져갈 뿐이다. 남편을 설득할 언어도 없으며, 자신의 처지를 사회학적으로 해석할 논리력도 갖추지 못했다. 그저 고통을 호소하고 살아보려고 허덕일 뿐이다. 때로는 아픔을 설명하는 것보다 보여주는 것이 더 절절하다.
희곡의 힘
무대에서 ‘차별’은 막연하고 ‘고통’은 무감각하다. 그래서 성차별은 지적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고, 그 고통은 외침에 그치는 경우가 다반사다. 하지만 <쉬지 스톨크>은 살벌하다. 고통에 있어서 더 그러하다. 젖몸살은 살갗까지 육박해온다. 절규에 가까운 쉬즈의 호소(황순미 배우의 쩌렁쩌렁한 발성이 애썼다)와 “유방을 자르고 싶어”, “자궁을 꿰매야 해” 같은 섬뜩한 대사 덕분이다. 무엇보다 차별이니 가부장, 착취 같은 추상적 단어를 전혀 사용하지 않고 오직 육체의 언어에만 의지한 게 힘을 발휘했다. 페미니즘의 승리를 앞당기기 위해선 이런 통증서사가 좀 더 개발되어야 하지 않을까? 서로를 헐뜯는 진영싸움과 상대를 제압하는 논리싸움으로 페미니즘 승리는 오지 않는다. 그런 대결 양상은 페미니즘의 진정한 대의와도 맞지 않다. 이렇게라도 싸우니 이 정도 하는 거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이 정도까지는 그렇다 쳐도 이 이상은 싸움만이 능사가 아니다. 페미니즘 연극은 좀 더 감성적으로, 좀 더 직관적으로, 좀 더 친화적으로, 좀 더 포용적으로 모순을 타개하는 전략을 써야 할 것이다.
창세기가 끝나고 있다
에덴동산에서 퇴출당한 아담과 이브는 육체노동과 출산/육아에 시달리는 처벌을 받는다. 남성의 육체노동은 여성의 육아노동을 착취하면서 신성시되었고, 자본가는 그 육체노동을 착취하면서 부를 축적했다. 19세기 계급투쟁은 육체노동에 대한 정당한 대가와 합법적 승인을 요구하는 운동이었고, 20세기 페미니즘은 육아노동에 대한 승인을 요구하는 운동이었다. 21세기는 인류가 창세기 서사에서 해방되는 원년이 될 것이다.
노동의 고통은 AI 로봇의 등장으로 다소간 해소될 것이다. 출산/육아의 고통도 어느 정도 줄어들고 있다. 저출산 전략 때문이다. 저출산은 일종의 복수이다. 사회적 가치를 독식한 기성세대, 희생양 제의를 상습적으로 반복해온 선배세대를 향한 젊은 세대의 독설이자 저항이자 응징이다. 우리나라는 저출산으로 인한 노동력 고갈로 망하는 최초의 나라가 될 것이다.
인류의 절반이 쉬지 스톨크라면, 21세기 지구멸망서사는 수정되어야 한다. 혜성의 충돌이나 화성침공보다는 이상기후와 대규모 감염병, 그리고 저출산이 훨씬 더 유력한 멸망 원인이 될 것이다. <쉬지 스톨크>는 성차별과 희생 강요가 어떤 임계점에 도달했음을 말한다. 그 임계점 너머의 결과는 끔찍하고 참혹할 것이다. 한 영아의 죽음은 가정비극으로 끝나지 않고 인류 몰락을 서술하는 묵시록의 새로운 첫 문장이 될지도 모른다.
21세기 노라
19세기 말, 노라(<인형의 집>)가 “좀 앉아요. 할 얘기가 많아요.”라며 헬메르를 착석시켰을 때, 버나드 쇼가 바로 그 순간 현대극(modern drama)이 시작되었다고 너스레를 떨었듯이 노라는 그때 스스로 결정하고 행동하는 현대 여성(modern woman)으로 다시 태어난다. 쉬지가 “난 다시 일을 하고 싶어.”라고 말했을 때, 물론 앙스는 키위가 없다는 투정으로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었지만, 바로 그때 필요한 건 다름 아닌 ‘국가’가 아니었을까. 맞벌이 부부의 육아 문제를 해결해줄 국가 말이다. 시설을 만들고 인력을 양성하여 육아 시장을 키우고 관리하는 일은 국가의 업무이다. 오늘날 1인당 국민소득은 3만 달러를 넘었지만, 맞벌이로 뼈 빠지게 일해도 내집마련이 힘든 게 현실이다. 그만큼 빈부격차가 커졌기 때문이다. 그 빈부격차를 줄일 능력이 없다면 맞벌이 노동환경이라도 제대로 구축해야 하는 게 국가다. 물론 그렇다고 쉬지의 전쟁이 종결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녀의 옷장에 직장과 가사노동을 병행해야 하는 슈퍼우먼의 슈트가 추가될 뿐이다.
그러니 제발 앙스가 철들면 해결될 가정불화라든가, ‘육아 번아웃 증후군’ 전문가를 찾아가 상담과 약물치료를 병행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등의 (비)현실적 진단과 충고는 그만두는 게 좋다.
우리의 쉬지 스톨크
2020년 9월 14일, 코로나 비대면수업으로 인해 학교에 가지 못한 두 초등 형제는 끼니를 해결하려고 라면을 끓이다 불을 냈다. 우울증을 앓는 어머니는 전날 외박을 했다. 아동학대와 방임으로 세 번이나 신고를 받은 경력이 있다. 법원은 지난 8월 27일, 모자를 격리해달라는 보호명령청구를 기각했다. 법만 눈이 먼 게 아니라, 법관도 눈이 멀었다. 2020년 9월 25일 현재 두 형제는 아직 의식을 찾지 못하고 있다. 어머니는 사건 현장에 도착하자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방안을 왔다갔다 하는 이상행동을 했다고 한다.
쉬지 스톨크는 어디에나 있다. 아니, 우리의 경우는 더 많고 더 잦고 더 처참하다. 그리고 더 무관심하다. 위험은 경시되고, 경고는 무시된다. 수많은 쉬지가 뜨거운 뙤약볕 아래서 위험 신호를 보내며 쓰러지고 있지만, 사회는 여전히 냉정하고 잔인하다. <쉬지 스톨크>는 아픔을 말하고 아픔에 동참하라고 말한다. 고통의 연대는 연극이 제일 잘할 수 있는 일 중 하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