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아시아 연출가전-낭독극
<버거운 삶(Labor of Life)>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허무함.
반복 그리고 고통
글_오유경(극단 그룹動·시대 연출)
작: Hanoch Levin
번역: 이단비
연출: 김민경
단체: 극단 노마드
공연장소: 아르코예술극장 소극장
공연일시: 2020/11/05
본인은 가톨릭 신자다. 매일 아침 신부님으로부터 좋은 글귀와 함께 본인을 위한 아침 기도가 문자로 전해진다. ‘깊어진 고독이 울고 있었다. 바다가 들려준 生의 비밀,-모든 운명은 끊임없이 철썩철썩 자신을 때리는 존재의 신음이라는- 아픈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주님, 아픔까지 사랑할 때 비로소 눈 뜨이는 믿음의 길, 비구름 뒤 맑아지는 기쁨이게 하소서.’…작품 《버거운 삶》 속 요나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 매일 밤 몸서리치고, 고통에 몸부림친다. 하지만 그 고통은 그의 유일한 생생한 삶, 실존의 순간이다. 그는 외친다. ‘내 고통만큼은 낡아빠지지 않았어!’
요나와 레비바는 부부다. 오늘밤도 나란히 침대에 누워 있다. 레비바는 이미 잠들었다. 하지만 요나는 침대에 드러누워 잠들지 못하고 분노에 찬 말을 쏟아낸다. 대략 이렇다. ‘길을 잃었어. 내 고통은 생생해. 낡아빠지지 않았어. 실망도, 절망도 내가 만든 게 아냐. 친애하는 고통은 가라앉지 않아. 요나 포프의 삶은 가버렸다!’ 요나는 자신에게 얘기한다. 그것은 타인과 나누는 대화가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말하는 심리적 내면의 대화다. 자신의 존재에 대한 그의 허무와 공허는 그를 참을 수 없는 고통에 몸부림치게 한다. 반면, 아내 레비바는 코를 골며 잔다. 그의 고통에 가득 찬 불면의 밤과는 상관없이 아주 깊은 평온한 잠이다. 그런 레비바를 요나는 참을 수 없다. 요나는 침대를 뒤집어 자는 레비바를 깨우고 그녀를 침대 밖으로 내동댕이친다. 그리고 운다. 노래 부른다. 오밤중에 뛰어다닌다. 출항의 노래… 새로운 세상을 향한 모험을 꿈꾸는 늙은 남자의 기백이 슬프다.
요나의 불만은 아내 레비바를 향해 잔인하게 드러난다. 그는 레비바의 존재도 참을 수가 없다. 남편은 아내의 다음 행동, 다음 말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예측한다. 요나는 요나를 향한 레비바의 모든 것이 늘 항상 똑같이 반복됨을 안다. 그는 반복되는 레비바와의 관계, 그 똑같은 일상이 몸서리치게 참을 수 없다. 요나는 레비바에게 폭력적이다. 대략 이렇게… ‘넌 내 다리에 연결된 엉덩이다. 넌 천박하고 평범하다. 순수한 영혼으로 둔갑하려 하지마.’ ‘싸구려.
당신이 너무 잘 읽혀. 따분해. 당신의 유통기한이 지났어. 남자는 복잡해. 내 내면은 바닥의 깊이를 알 수 없어. 당신의 깊이는 차 한잔의 깊이. 싸구려 재료로 만든 평범함.’ 요나는 레비바를 떠나 더 젊은 여인과 사랑을 나눌 거라고 부르짖는다. 젊은 여자들에게 밀리는 여인, 30년간이나 요나 옆을 지킨 레비바는 이 지독한 평범한 일상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할 것이며, 차라리 이를 받아들이는 것이 마음의 안식을 줄 것이라고 그를 달랜다. 아니 호소한다. 레비바도 잘 안다. 요나의 이러한 폭주가 매일 밤, 반복적으로 일어나며, 그런 그를 대하는 그녀도 요나가 레비바를 예측하듯 그녀도 요나를 예측한다는 것. 레비바는 요나의 폭주를 매일 밤 기꺼이 상대해주고 있었던 듯하다. 요나는 울부짖는다. 일상을 떠나는 모험. ‘모두가 도망치고 싶어해. 아무런 이유 없이 이 세상에 태어났고 아무 이유 없이 이 세상을 뜰 거야. 당신과 나 사이에 있는 것은 아무 이유가 없어.’ 일상의 무가치함이 그를 울린다.
요나가 짐가방을 들고 서 있다. 새벽 2시. 요나는 드디어 이 집을 떠날 것 같다. 그런데 불쑥 불청객이 방문한다. 이웃 궁켈이다. 그는 뜬금없이 모자를 찾겠다며 요나와 레비바의 침대에 들어간다. 그리고 요나처럼 레비바를 만지고 싶다고 한다. 궁켈은 요나와 레비바가 매일 밤 싸운다는 것을 알고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혼자서 죽게 될까 봐 두려워요. 난 그냥 궁켈입니다. 궁켈일 뿐입니다. 당신들은 서로 짖어댈 상대가 있지 않나요? 난 짖어댈 상대가 없어요.’ 궁켈의 외로움은 그래도 서로를 상대하는 부부의 지루한 일상 따윈 오히려 행복한 삶으로 보이게 한다. 그래서 궁켈은 그들의 일상에 뛰어 들어온 것이다. 궁켈의 침입은 요나와 레비바에게 더욱 지독한 실존의 공포를 안겨준다. 요나와 레비바는 절실히 마지막 대화를 나눈다. 대강 이렇다. ‘우리가 다 궁켈이야. 도망가도 갈 곳이 없어. 30분이 쌓여서 삶이 된다. 더 이상 아무것도 없다. 아무 일도 안 일어난다. 처음엔 엄마 집에서 밥 먹고, 다음은 아내 옆에서 밥 먹고, 다음엔 병원에서 밥 먹고, 침대에 누워 죽는다. 30분들이 쌓여서 인생이 된다.’ ‘당신이 죽으면 내가 당신을 기억할 거야.’ ‘사라지는 것이 두려워. 당신의 기억 속에도 나를 새겨줘.’ ‘당신은 내 마음 깊이 들어왔어. 당신의 헌신이 노고가 실패한 우리 삶에 새겨졌어. 당신을 잊지 않을 게.’ ‘서로의 마지막을 보며 하루하루 늙어가고 있어. 아무것도 해결된 게 없어. 똑같은 무덤. 똑같은 사체.’
다음 날, 요나가 누워 있다. 요나가 죽는다. 요나 포프의 삶이 끝났다. 그의 몸부림이 허망하게도 지독히도 가벼운 무게의 죽음이 된다. 이러한 죽음은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한 세대가 다음 세대에게 물려준다. 마지막 말처럼. ‘함께 끝마치자. 이 버거운 삶을!’
에필로그가 이어진다. 관객을 향한 말. ‘소소한 기억이 남길 바래요. 우리가 있었다고!’ 레비바와 달리 요나는 끝까지 말한다. ‘우리 삶 자체가 지루할 거야. 쓰레기 같은 이런 삶을 지워야 해.’
실존주의자 까뮈와 샤르트르는 ‘이 세상에 절대적 진리나 믿음은 존재하지 않으며, 인간은 목적의식을 갖고 태어난 것이 아니라, 단지 이 세계를 표류(漂流)하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인간은 이 세계에 대한 어떠한 책임도 없고, 어떠한 기존의 가치관이나 질서를 따를 필요도 없다.’라고 주장했다. 지독한 염세주의적 실존주의는 부조리연극을 낳았다. 신이 없는 현세에서 인간 스스로 인간을 구원할 수 없는 세상의 삶이란 그저 생물학적 죽음의 순간을 기다리며 견디는 버거운 시간에 불과하다. 이스라엘 작가, Hanoch Levin의 작품, 《버거운 삶》은 견딜 수 없는 평범한 일상의 무가치함, 그 지긋지긋한 지루함의 실존을 노부부 한밤의 울부짖음을 통해 짙게 드러낸다.
작품 《버거운 삶》은 낭독극으로 올려졌다. 막이 오르기 전 계속 반복적으로 들리던 어느 여인의 가녀린, 읊조리는 듯한 노래가 기억난다. 2개의 나무의자. 2개의 바퀴 달린 나무보면대. 간단한 의상을 갖춰 입은 세 명의 배우는 깊이 있는 뜨거운 언어들은 물론, 나란히 혹은 서로 멀리 떨어져서 심리적 관계와 내면의 역동성을 표현하였다. 평범한 일상에 가치를 부여하려 애쓰는 일명 ‘소확행’과 정반대의 시선은 위험한 칼날처럼 인간 본질의 실존적 인식을 파고들어 아프게 찌른다. 요나의 말처럼. ‘조금 더 오래 산다고 무슨 대수라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부님의 메시지처럼 기도한다. ‘시나브로 남루해진 하루가 친근해지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