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 모호의 세계에서 지속되어야 하는 삶에 대하여

연극 <아들>

글_윤진현(연극평론가)

작 플로리앙 젤레르

연출 민새롬

단체 연극열전

장소 대학로 아트원시어터 2관

관극일시 2020.11.21. 18:30

공연일시 : 2020.09.12 ~ 2020.11.22.

알고도 속고 싶어

당했다. 뻔히 알만했다. 자해중독에 빠진 고3, 그의 집 옷장에는 망각된 총이 있었다. 결말은 뻔했다. 우울하고 염려스러웠다. 그러나 아들을 데리고 돌아온 순진한 부모, 명랑한 아들은 부모를 위해 다과를 준비했고 이 순간, 잠시 옛 생각에 젖으며 아들의 미래를 위해 달콤한 상상을 하는 것은 당연했으며 그 순간은 그들에게 참으로 완벽하게 행복한 순간이었다.

그래서 나는 더욱 분명히 알 수 있었다. 극 속에서 이 같은 완벽한 순간은 언제나 파국의 전조가 아닌가. 그러나 그 잠깐 사이에 나는 니콜라의 부모와 한통속이 되어 마치 그들 앞에 놓인 마들렌이 나의 입 안에서 녹는 듯 마음을 놓고 말았다. 당연히 들려온 총소리에 그래서 더 화들짝 놀랐고 놀란 나 자신을 믿을 수 없었기에 다음 순간 성장한 니콜라를, “아이구! 살았구나!” 하면서 반기고 말았던 것이다.

서양에서는 남자들의 자살시도가 여성보다 횟수는 적지만 성공률은 훨씬 높다고 한다. 여성들은 약물을 주로 사용하지만 남성들은 총기류를 사용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런데도 니콜라가 살아서 그 위기를 넘기고 훌륭하게 성장하여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게 된다는 피에르의 환상에 동조하고 만 것은 더 이상 궁금한 것이 없을 만큼 그러한 이별의 형식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 때나 환상 속에서 잃어버린 존재를 만나게 되는 것을 알까? 부모가 아니어도 그 친구가 살았더라면 지금쯤 몇 살이 되어서 결혼해서 아이 걱정도 같이할 만큼 변하겠지만 또 똑같이 실없는 우스갯소리를 하고 변함없이 존재 자체로 위로가 되는 순간을 함께 누렸으리라 되풀이 골몰하게 되는 것을 떠난 자들은 절대 알지 못할 것이다. 모든 이별에는 예의가 필요하다. 이 예의는 진정 생존을 위한 것이다. 바닥까지 남아있던 모든 끈적끈적한 삶의 잔재를 징글징글, 기진맥진할 때까지 털고 닦고 쓸어서 가볍게 떠도는 먼지처럼 만드는 것이다. 때로 마주쳐도 견딜 수 있도록.

모르겠어!

이 작품에서 한 단어를 고른다면 당연히 ‘모르겠어!’이다. 우리는 모른다. 삶에 대해서, 나에 대해서, 부모에 대해서, 자식에 대해서. 현재에 대해서, 미래에 대해서,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에 대해서 알지 못한다. 심지어 무엇을 모르는지 확정할 수도 없을 만큼 모른다. 오로지 이것만이 확실하다.

무지는 공포다.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데 불가해한 느낌으로 포착되는 실존은 얼마나 두려운가. 인간이 이 두려움을 이기기 위해 이 절대 무지를 시작으로 삼아왔던 영웅적 결단을 부정하기는 어렵다. 말하자면 무지(無知)한 자신이 지(知)의 세계로 가는 출발점이고 시작이므로, 용기를 내라고 격려할 때, 그 실효를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외길은 역시 위태롭지 않은가? 해결방법이 오로지 하나뿐이라면 그 길을 능히 갈 수 없는 자들에게는 아무 해결방법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 아닌가. 기껏해야 “그런 질문을 더 이상 하지 않겠다고 결정하라”고 조언하고 “당신 잘못 아니라”고 위로하는 소피아가 있을 뿐이다. 소위 객관적 거리를 확보할 수 있는 관계던가. 겉으로는 괜찮다고 잘 될 것이라고 고맙다고 하면서 샤샤는 절대 맡기지 않겠다고 단호히 거절하는 위선에 불과하다. 부정적으로 보는 것이 못 보는 것보다는 낫다는 얄미운 입찬소리에서 진짜 답을 얻을 수는 없다.

그러므로 알아야 한다고 하지 마라. 아는 것이 필수라고 누가 그랬던가. 앎은 삶의 충분조건에 가까울 뿐, 결코 필요조건은 아니다. 그러므로 제발 “왜!”라고 묻지 마라. 설명하라고 닦달하지 마라. 알아야만 한다고, 알게 될 것이라고 단언하지 마라. 다 지나갈 것이라고 확언하지 마라.

니콜라에게 필요한 답을 줄 수 있는 사람, 세상에서, 니콜라에게서 솟구쳐 니콜라를 옥죄는 질문들을 조리할 방법을 알려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 같은 답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차라리 이 무한히 지연되는 진실의 세계가 실상 우리가 살아야 할 세상, 우리 아들들의 세상, 우리 앞에 놓인 미래임을 고백하라. 하여 몰라도 된다고, 모르는 게 당연하다고 하라. 몰라도 살 수 있는 방법을, 이 휘몰아치는 답이 없는 모든 질문의 세계를 다루는 방법을 …… 창안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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