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인(人)이 연주하는 파우스트 (2)

요한 볼프강 폰 괴테
‘파우스트 (Faust)’

임야비(tristan-1@daum.net)
자유기고가, 서울 신포니에타 기획 및 연출
극단 듀공아 / 극단 동맹 연출부 드라마투기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 (1873-1943)
피아니스트로서는 리스트처럼 꽃길만 걸었지만, 작곡가로서는 파우스트처럼 가시밭길에서 고생했다.

Sergei Vasilyevich Rachmaninov

‘천재 피아니스트’, ‘거미 다리 같은 손가락을 지닌 괴물 연주자’, ‘러시안 리스트; Russian Liszt’라 불리며 세상에 이름을 알린 라흐마니노프는 자신의 이름이 연주사(史)의 ‘천재 피아니스트’보다는 음악사(史)의 ‘위대한 작곡가’로 남길 원했다.

하지만 그는 항상 첫 작품(‘1번’)에서 거대한 실패를 맛봐야만 했다. 그리고 반복된 실패는 예민한 피아니스트의 징크스가 되어버렸다.

‘피아노 협주곡 1번(op.1; 1891)’은 학생 시절의 습작이다. 아무도 이 곡에 주목하지 않았고, 이후 재작곡 수준으로 살벌한 개정 작업을 해야만 했다. 지금까지도 극히 드물게 연주되는 곡이다.

‘교향곡 1번(op.13; 1895)’도 대실패였다. 야심 차게 작곡한 곡이었지만, 음악계는 ‘재앙’, ‘지옥’이라는 말을 퍼부었다. 이 비난을 번역하면 ‘작곡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다. 너 같은 기술직 바보는 피아노나 계속 쳐라’였다. 이에 심각한 내상을 입은 ‘작곡가 라흐마니노프’는 재기 불능 상태로 추락했고, 악화된 우울증은 작곡가를 벼랑 끝까지 몰고 갔다.

정신과 의사 니콜라이 달(Nikolai Dahl; 1860~1939)

정신적 황폐화가 극에 이르자, 라흐마니노프의 부인은 정신과 의사 니콜라이 달 박사에게 남편의 치료를 맡긴다. 그리고 1901년, 박사의 헌신적인 치료로 자신감을 회복한 라흐마니노프는 음악사에 길이 남을 역작 ‘피아노 협주곡 2번’을 작곡하며 대성공을 거둔다. 작곡가는 감사의 표시로 이 불멸의 협주곡을 달 박사에게 헌정한다. 이후 ‘No.2’의 승리는 이어졌다. 1907년 작곡해서 1908년 발표한 ‘교향곡 2번’은 ‘교향곡 1번’의 참담한 실패를 모두 만회하고도 남는 성공으로 이어졌다. 이렇게 라흐마니노프가 정신병에서 회복한 직후에 작곡된 ‘피아노 협주곡 2번’과 ‘교향곡 2번’은 지금까지도 전 세계인이 사랑하는 걸작으로 그 예술성과 생명력을 이어가고 있다.

하지만 재기한 작곡가는 다시 한번 No.1과 직면하게 된다. 그가 아직 작곡한 적 없는 ‘피아노 소나타’다. ‘피아노 소나타’는 ‘연주자 겸 작곡가’라는 두 마리 토끼를 단번에 움켜잡을 수 있는 핵심 장르다. 연이은 ’2번’들의 성공에 고무된 라흐마니노프는 ‘피아노 소나타 1번’ 작업에 착수한다. 이 곡의 성공을 발판으로 베토벤(생전에 유명한 즉흥 피아니스트였다)과 리스트 같은 거장의 반열에 오를 셈이었다. 그래서 작곡 당시 부담감은 상당했다.

더 위대한 작품을 만들기 위해 라흐마니노프는 자신의 대작 ‘피아노 소나타 1번’에 더 큰 대작을 얹어 놓는다. 바로 괴테의 ‘파우스트’다.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소나타 1번 악보 표지

피아노 소나타 1번(op.28; 1908)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장대한 곡’이다. 이게 끝이다. 그냥 장대하다.

의욕 과다의 라흐마니노프는 자신의 첫 피아노 소나타에 모든 걸 욱여넣었다. 자신의 고뇌와 실력을 뽐내는 고난도 테크닉, 베토벤을 의식했는지 좀 과한 서정성, 리스트의 손가락을 능가하려는 악마적인 속주까지. 이것만으로 연주 시간이 50분에 달한다. 이 긴 음악에 거대한 괴테의 파우스트 주제를 얹었다. 1악장 Allegro moderato는 자신의 고뇌를 파우스트 박사와 엮었고, 2악장 Lento의 과도한 서정성은 그레트헨으로, 3악장 Allegro molto의 악마적인 속주는 메피스토펠레스로 연결했다. 그야말로 張大하다.

완성 후 지인들에게만 먼저 들려준 소나타의 반응은 냉담했다. 자신도 좀 과하다고 생각했는지 ‘파우스트’에 대한 주제는 음악과 악보에서 빼버렸다. 그리고 주변의 충고를 받아들여 약 35분으로 연주 시간을 줄였다.

1908년 10월 17일, 대망의 초연.

라흐마니노프의 ‘No.1’ 징크스는 깨지지 않았다. 리스트와 베토벤을 발판 삼아 괴테의 높이까지 오르려 했던 라흐마니노프는 다시 한번 붕괴했다. 그리고 그의 ‘피아노 소나타 1번’은 1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라흐마니노프 곡 중 ‘가장 연주되지 않는 곡’ 1위에 당당히 랭크되어 있다. 징크스라는 것이 두 번 반복되면 께름칙하지만 세 번 반복되면 무서워진다. 이런 가혹한 운명의 결정타일까? ‘피아노 협주곡 2번’과 ‘교향곡 2번’처럼, 그가 5년 뒤에 작곡한 ‘피아노 소나타 2번(op.36; 1913)’은 ‘피아노 소나타 1번’을 완전히 묻어버리는 명곡이 되었다.

Russian Faust 음반 표지

이번 호 연재를 위해서 부담스러운 ‘피아노 소나타 1번’을 각각 다른 연주자로 여섯 번이나 들었다. 하지만 알렉산더 로마노프스키(Alexander Romanovsky)의 연주는 연거푸 세 번이나 들었다. 그리고 이 음반을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소나타 1번’의 추천 연주로 선정했다. 이유는 간단하다. 가장 장대하지 않기 때문이다.

음반 표지가 인상적이다. 러시안 파우스트(Russian Faust)라는 타이틀이 중앙에 크게 걸려 있고, 왠지 베르테르를 연상시키는 복장의 잘생긴 피아니스트가 포즈를 취하고 있다. 대중에게 생소한 이 소나타를 어필하기 위해 음반 기획자는 작곡자가 포기한 괴테를 전면에 내세웠다. 음반 내지에 있는 피아니스트의 인터뷰 또한 흥미롭다. 왠지 로마노프 왕족 같은 피아니스트 알렉산더 로마노프스키는 이 음반을 녹음할 때 친한 친구이자 라흐마니노프의 조카인 알렉산더 라흐마니노프의 조언을 많이 들었다고 한다.

음반 표지의 시각적 이미지도 음반 내지의 스토리도 전부 음악 외적인 부분이다. 하지만 이런 사소한 요소가 ‘피아노 소나타 1번’의 더부룩함을 시원하게 날려주는 소화제 역할을 한다.

앞으로도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소나타 1번은 인기가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들어보겠다는 독자가 있다면, 주저 없이 이 음반을 추천한다. 조금 더 나아가 함께 수록된 ‘피아노 소나타 2번’도 추천한다. 두 곡을 다 듣고 나면 왜 라흐마니노프의 ‘1번’들이 이런 대접을 받아야 했고, 왜 ‘2번’들은 칭송을 받는지 단번에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덧붙이는 소화제)

Igudesman & Joo의 ‘Rachmaninov had big hands’ 퍼포먼스

앞선 연재에서 ‘피아노가 어려워진 원흉’으로 프란츠 리스트를 소개했는데, 부동의 2위는 다름 아닌 라흐마니노프다. 그의 곡이 얼마나 연주하기 어려운지를 엉터리 퍼포먼스로 만든 유튜브 영상이 있다. 클래식 음악과 코믹극의 경계를 넘나드는 ‘Igudesman & Joo’ 콤비의 속시원한 영상으로 장대한 글을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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