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인(人)이 연주하는 파우스트 (3)

요한 볼프강 폰 괴테

‘파우스트 (Faust)’

– 임야비(tristan-1@daum,net)

자유기고가, 서울 신포니에타 기획 및 연출

 극단 듀공아 / 극단 동맹 연출부 드라마트루기

작곡가 프란츠 리스트는 죽기 3년 전인 1883년에 ‘Mephisto-Polka; 메피스토-폴카 S127i/R39’를 완성한다.그는 이 음악으로 괴테가 창조해낸 불세출의 악마 메피스토펠레스를 죽여버린다.

괴테의 파우스트에서 메피스토펠레스는 내기에서 졌을 뿐이지, 그 존재가 소멸하지는 않는다. 게르만 전설에서도 악마 메피스토펠레스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악마의 생사는 창조주이자 저작권자인 작가 괴테의 펜 끝에서 결판나는 게 순리지만, 거만한 작곡가 리스트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피아노 ‘파’ 건반 한 개로 메피스토펠레스를 끝장내 버린다. 리스트가 악마를 죽이는 과정을 살펴보자.

<메피스토-폴카 악보 표지>

1. 음악의 초반. 리스트가 악마의 다리를 부러뜨린다.

‘메피스토 폴카’는 리스트가 작곡한 일련의 ‘메피스토 시리즈; Mephisto Cyclus’ 중에서 미완성인 ‘메피스토 왈츠 제4번(1885)’을 제외하고 작곡가의 최만년에 작곡된 음악이다. 2020년 12월 호에 연재했던 ‘메피스토 왈츠 1~4번’에서 메피스토펠레스는 인간 위에 군림하는 위풍당당하고 화려한 악마였다. 하지만 ‘메피스토 폴카’의 초반부에서 메피스토펠레스는 비루하게 절뚝거리며 어딘지 초조해 보인다. 왜일까?

<폴카의 특징적인 리듬과 단전타음(acciaccatura)>

리스트가 귀족의 춤인 왈츠를 버리고, 하층민의 춤인 폴카를 선택한 이유는 기괴한 효과를 위한 포석이었다. 4분의 2박자의 춤곡인 폴카는 위의 악보처럼 8분음표 4개가 한 마디를 이루는데 그중 붉은색으로 표시한 세 번째 8분음표에 강세가 들어간다. 그런데 리스트는 이 세 번째 박자에 단전타음(acciaccatura)이라는 기교적인 꾸밈음(파란색 동그라미 부분)을 삽입했다. 이 꾸밈음으로 인해 중심이 되는 세 번째 박자는 미묘하게 어긋난다. 그래서 춤은 고꾸라질 것 같은 불안한 효과를 내게 된다.

서양의 전설에서 악마의 원형은 굉장히 다채롭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몇몇 공통된 특징을 발견할 수 있다. 그 범위를 메피스토펠레스로 좁혀도 마찬가지다. 메피스토펠레스는 유독 다양한 모습으로 묘사되는데, 이는 그가 변신술에 능한 악마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변신하지 않은 메피스토펠레스 본형의 특징은 뿔과 날개 그리고 발굽으로 특정된다.

<메피스토펠레스의 원형>

리스트는 폴카의 가장 중심이 되는 세 번째 박자를 단전타음으로 골절시켜 메피스토펠레스의 발굽을 절뚝이게 하는 놀라운 효과를 만들어냈다. 리스트는 초장에 승기를 잡았고, 악마는 골절된 발굽을 끌며 위태롭게 도망친다.

2. 음악의 중반. 리스트가 악마를 분해한다.

<Dies Irae; ‘진노의 날’ 선율>

음악의 중반부를 듣다 보면 뚜렷한 조성이 없다는 것을 쉽게 눈치챌 수 있다. 음악의 살점인 화음은 안개처럼 흐릿해지고 기괴한 박자만 앙상한 뼈대처럼 위태롭다. 이렇게 메피스토펠레스는 살과 뼈가 분리된다. 여기에 뒤틀린 채로 삽입된 Dies Irae(진노의 날) 멜로디는 악마가 인간에게 귀엣말로 들려주는 잔혹한 사형 선고가 아니라, 곧 파멸할 메피스토펠레스의 뾰족한 귀에 리스트가 꽂아 넣는 장송곡이다. 반쯤은 괴테, 반쯤은 메피스토펠레스가 되어버린 72살의 늙은 작곡가는 평생을 가지고 놀던 악마를 가장 잔인한 방법으로 뒤틀어 분해한다.

3. 음악의 끝. 리스트가 악마를 삭제한다.

<메피스토 폴카의 종지 부분>

악마의 죽음은 손이 많이 가는 일이다. 그래서 ‘물리적 파괴’보다는 ‘마법적 삭제’가 제일 깔끔한 마무리다. 리스트에게 메피스토펠레스를 없애는 일 따위는 손가락 하나로 충분했다. 그는 곡이 종결부를 힘 있고 화려한 화음이 아닌 단 하나의 초라한 음(F)으로 끝내어, 악의 여지를 남겨놓지 않는다. 이렇게 악마는 끝장난다.

<화려한 종지와 초라한 종지>

이 ‘메피스토-폴카’의 종결 부분은 그의 ‘메피스토-왈츠’와 극명한 차이가 있다. 쉽게 설명하자면 메피스토-왈츠들이 ‘콰콰쾅’하고 기세등등하게 끝나지만, 메피스토-폴카는 ‘띵’하고 허망하게 끝난다.

<리스트의 임종>

이렇게 곡의 시작과 동시에 쩔뚝거리던 악마 메피스토펠레스는 장송곡을 들으며 서서히 분해되다가 이내 하나의 음으로 찌부러져 완전히 삭제된다. 기존의 메피스토펠레스 관련 음악은 이야기의 주도권이 악마에게 있었고, 게임을 바라보는 관점이 악마의 내부에 있었다. 하지만 ‘메피스토-폴카’에서는 게임의 관점과 주도권은 더 상위 개념인 게임 메이커에게 있다. 그 사람은 바로 창조자 괴테이자 리스트 자신이다.

화려했던 시절, 파우스트 박사로도 메피스토펠레스로도 빙의해 보았던 젊은 작곡가는 인생 말년에 이 모든 것의 창조자인 ‘괴테’에 빙의했다. 1883년, 어느새 죽음을 앞둔 노인이 된 리스트에게도 영혼을 걸고 내기를 하자는 악마가 찾아왔을 것이다. 하지만 독실한 신자로 회심한 리스트는 누군가의 피조물 메피스토펠레스를 음악으로 제거해버렸다.

서구 기독교적 사상에서 악마는 타락한 천사다. 즉 악마도 그 기원은 천사이기 때문에 인간처럼 생명과 죽음이 있는 존재가 아니다. 인간은 다가오는 악마를 피하거나 물리칠 수 있을 뿐이다. 하지만 리스트는 조물주의 재가도, 원작자인 괴테의 동의도 받지 않은 채, 어이없는 음악으로 메피스토펠레스를 죽여버렸다. ‘메피스토 폴카’의 테제는 문학사, 음악사, 종교사상 유례없는 일일 것이다.

광기와 낭만으로 일관된 메피스토 왈츠 네 곡은 매력적이지만 쉽게 질린다. 하지만 작곡가의 깊은 미학이 가미된 메피스토 폴카는 겉멋만 잔뜩 든 피아니스트 리스트의 이미지를 철학자로 격상시키는 곡이다.

<좌: 스비아토슬라브 리히터의 음반, 우: 시프리앙 카차리스의 음반>

음반 두 장을 추천한다. 말이 필요 없는 피아니스트 리히터의 연주는 가히 악마적이다. 그의 연주는 메피스토펠레스의 관점이다. 반면 카차리스의 연주는 리스트의 관점이다. 해석이 돋보이는 이 음반의 부가적인 장점은 메피스토 왈츠 네 곡도 전부 수록되어 있어 왈츠와 폴카의 비교 감상에 매우 유익하다는 점이다.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