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달되지 못한 죽음 충동의 신호

연극 <BEEP:비프>

박연숙 (숭실대 교수/평론가)

2020년 12월에 개막하여 2021년 3월 21일까지 80회 공연된 <BEEP:비프>는 신인작가 신승원이 쓰고 김지호가 연출하였다. <BEEP:비프>는 외국어 고등학교 학생 3인과 동성커플 교사가 겨울 방학 동안 연극 연습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이야기이다. <BEEP:비프>가 언론과 대중의 관심을 끌게 된 것은 이 연극 자체보다는 극 중 연습하는 작품이 2007년 4월 버지니아 폴리테크 주립대학교에서 총기 난사 사건으로 32명의 사망자를 낸 재미 한국인 조승희의 희곡 <리차드 맥비프>라는 점이다. 조승희는 사건이 있기 전 문예창작 시간에 10대 소년을 주인공으로 한 2편의 희곡을 과제로 제출했는데, <리차드 맥비프>는 의붓아버지를 대상으로 <미스터 브라운스톤>은 수학 선생님을 대상으로 적의와 욕설이 난무한 글을 썼다. 총기 난사 사건 이후 그의 희곡이 같이 수업을 들었던 학생에 의해 인터넷에 게시되었고 총기 난사 사건에 대한 뜨거운 관심으로 널리 유포되었다. 희곡의 작품성은 비평의 대상이 되기에 미흡하지만 악명 높은 사건의 범죄자가 쓴 희곡이라는 점에서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BEEP:비프>는 이러한 유명세를 적극적으로 이용하여 조승희의 희곡을 연습한다는 설정을 하고 있다. 작가는 극중극 외에도 조승희의 악명을 또 한 번 이용하는데, 그것은 등장인물 유진(김아석 분)이 연극 소품으로 쓰기 위해 범죄자들이 쓰던 물건을 경매로 판매하는 인터넷 사이트에서 조승희가 쓰던 전자계산기를 3700달러에 구입했다는 말을 하는 데에 있다. 실제의 계산기 값에 비하면 터무니없는 가격에 구입한 것이다. 이 터무니없는 가격이 가능한 유일한 이유는 악명 높은 조승희가 사용했던 계산기였다는 점뿐이다. 이것은 <BEEP:비프>에 대한 언론과 대중의 관심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그러면서도 <BEEP:비프>는 조승희 사건과 거리를 두려고 애를 쓴다. 연극을 지도하는 교사 동우(서승원 분)의 입을 빌어 작가와 작품은 별개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극중극 인물의 심리를 조승희의 실제 심리와 분리하려 하고, 연극 연습을 하는 학생들의 심리와도 분리하려 한다. 그런 점에서 <BEEP:비프>는 조승희의 유명세는 적극적으로 이용하되 왜 한국의 고등학교 학생들이 <리차드 맥비프>를 선택했는지, <리차드 맥비프>를 우리의 관점에서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관객의 몫으로 던져놓았다.

1. 조승희의 영웅 에릭과 딜런

연극<BEEP:비프>의 한 장면 (사진=주다컬쳐 제공)

<BEEP:비프>에는 드러나 있지 않지만 2007년 4월 총기 난사 후 자살한 조승희는 자신에게 영감을 준 인물로 에릭과 딜런을 언급하며 그들을 영웅시 했다. 그들은 1999년 4월 콜럼바인 고등학교 총기 난사 후 33여 명의 사상자를 내고 자살한 학생들이다. 그 중 딜런은 사건 두 달 전 문예창작 시간에 자신의 범죄를 예고하는 글을 과제로 제출하였다. 분노에 찬 남자들이 부유층의 아이들을 계획적으로 살인하는 내용이었다. 주목할 점은 살인의 방식이 에릭이 계획했던 것과 동일했다는 것이다. 딜런은 소설에서 살인을 목격한 한 남자의 입장이 되어 살인의 느낌을 궁금해 했고, 살인한 사람에게서 힘과 자기만족과 위압과 신성함을 느꼈다고 했고, 살인자의 행동을 이해하게 되었다고 서술했다. 소설 속 살인의 목격자가 바로 딜런 자신이었던 것이다. 창작수업을 담당한 선생님은 딜런을 불러 소설에 드러난 폭력성에 대해 우려 섞인 질문을 했고, 부모에게 이 상황을 전화로 알렸고, 학교 상담사에게는 딜런의 소설을 전달했다. 그러나 딜런의 부모나 상담사는 소설은 소설일 뿐이라며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딜런의 부모는 지식인이었고 화목한 가정을 꾸리고 있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러나 이들의 생각은 완전히 빗나갔다. 딜런은 이 소설을 사건 당일 자신의 차 안에 두었다. 계획대로라면 차에 설치된 시한폭탄이 터지면서 이 소설도 함께 사라질 운명이었다. 그 정도로 딜런은 자신의 소설을 특별하게 취급했던 것이다. 이처럼 딜런이 속마음을 드러냈는데도 주변에서는 알아채지 못했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연극 <BEEP:비프>가 의미 있는 지점은 바로 이것이다. 분노, 우울, 사이코패스적 성향 등 자신의 심리적 문제를 감지한 이들이 자신의 심리적 혼란을 어떤 방식으로든 표출하는데 그것을 하나의 신호로 알아채지 못하고 건성으로 넘겨 버리는 기성세대에 대한 비판이다. 세희가 연극 연습 중에 알 수 없는 분노로 힘들어하며 연극 지도 선생님인 동우에게 여러 차례 도움 요청을 했지만 동우는 도움을 요청할 때 보내기로 한 신호가 무엇인지조차 망각하고 끝까지 무관심했다.

<BEEP:비프>의 유진과 세희는 조승희 보다는 에릭과 딜런의 관계를 닮았다. 에릭은 자신의 지능과 능력을 과신하며 세상 사람들이 열등하다는 망상에 사로잡혀 있던 아이로 소심하고 우울한 딜런을 조정하였다. 유진은 막대한 재산가의 상속자로 에릭과 같이 세상을 깔보는 아이다. 그런 유진이 총기를 구입해 세희에게 선물로 주며 분노를 폭발하도록 조종한다. 세희는 딜런이 세상과 단절된 느낌으로 우울해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편이 하나도 없다는 생각에 우울했던 아이다. 에릭과 딜런의 조합은 열기와 냉기의 조합으로 생성된 거대한 토네이도와 같이 엄청난 폭발력으로 이어졌다. 냉소적인 유진과 감정의 기복이 큰 유진의 조합 역시 불안한 결말을 예고한다.

2. 잠재된 죽음 충동

연극<BEEP:비프>의 한 장면 (사진=주다컬쳐 제공)

그렇다면 과연 스스로 이해할 수 없는 이들의 분노는 무엇에 기인한 것인가? 의식의 차원에서 이해할 수 없다면 무의식의 차원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폭력, 살인에 대한 충동은 프로이트에 의하면 죽음 충동으로 설명된다. 인간의 근본 충동으로 성적 충동만을 일관되게 주장해 오던 프로이트가 64세에 이르러 성적 충동 이외에 죽음 충동에 대해 주목하게 되었다. 본격적인 죽음 충동에 대한 이론을 펼치기 전에 프로이트는 1910년 비엔나 정신분석학회에서 “자살, 특히 어린 학생들을 중심으로”라는 제목으로 청소년의 자살과 관련한 학교교육의 문제점과 그에 대한 짧은 토론 글을 발표했다. 그는 학생들의 갈등이나 문제점을 학교의 담당자들이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여 학생들을 충분히 잘 돌보지 못하는 점을 비판했다. 프로이트는 학생들이 미성숙한 상태라 심리적 갈등을 많이 겪고 우울증의 영향으로 자살을 쉽게 감행한다는 점을 경고했다. 우울증은 자기 자신의 자아에 대한 죄책감의 상태로부터 벗어나지 못해서 고통을 당하는 상태이다. 우울증에 걸린 사람은 자아를 끊임없이 비판적으로 몰고 가는 성향이 있다. 그런 사람이 자신의 존재 자체를 만족스럽게 인식하지 못하고 무가치한 것, 보잘 것 없는 것으로 인식하다가 자아를 파괴시키는 죄책감을 극복하지 못하게 되면 극단적인 경우에 죄책감의 보상으로 자살을 시도하게 된다는 것이다. 조승희, 에릭, 딜런, 그 밖의 많은 학생들의 자살에 우울증의 문제가 더해 있으리라 짐작되는 주장이다.

프로이트는 『쾌락의 원리를 넘어서』(1920)에 이르러 성적충동 만큼이나 인간의 근본적인 충동으로 죽음충동을 말하였다. 프로이트에게 죽음 충동은 모든 유기체가 가진 긴장이나 갈등이 부재한 최초 상태를 회복하려는 것으로, 무기체 상태로 복귀하면서 매듭을 지어가는 과정이다. 모든 삶의 존재 이유는 갈등이나 긴장이 부재한 무기체 상태로 되돌아가는 죽음충동의 실현에 있다는 것이다.

프로이트는 인간이 이성으로 마음 깊은 곳에 있는 감정을 주체적으로 조절할 수 있다는 생각을 의심하였다. 인간이 일상생활에서 논리적으로 주장하고 이성적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다하더라도 특정 계기가 이루어지면 마음 속 깊이 숨어 있는 감정의 소용돌이에 의해 전혀 다른 모습을 드러낼 수 있고, 극단적으로는 증오심을 불러내서 폭력성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이러한 폭력성은 비단 신경증 환자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건강한 사람들에게도 있다고 한다. 이러한 프로이트의 분석에 의하면 우리 모두 살인과 자살, 폭력에 대한 죽음 충동을 가지고 있고, 현실에 적응하며 살 때는 의식 너머의 무의식에 꽁꽁 숨겨두고 살지만 어떤 계기가 생기면 그러한 충동에 의해 어리석게 행동할 수 있고, 영리하게 잘 넘길 수도 있다는 것이다. 세희가 동우를 향해 도움 요청을 했던 것도 바로 그런 충동에 스스로 겁이 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우는 세희의 도움요청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동우는 학생들에게 언제나 관대하고 친절한 척 했지만 실제로는 귀 기울이지 않았고 마음을 열지 않았다. 동우보다는 그의 동성애 상대자인 국어 교사 영준(윤정혁 분)이 학생들에 더 많은 관심이 있었다. 그러나 영준의 노력은 제한적이었다.

3. 그러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연극<BEEP:비프>의 한 장면 (사진=주다컬쳐 제공)

사건의 발단은 세희가 극중 인물을 연기하며 지수(병헌 분)를 폭력적으로 대하는 것이다. 지수와 세희는 사귀는 사이였지만 지수 엄마가 세희에게 행한 언어폭력으로 그 관계가 단절된 상태이다. 세희는 극중 폭력의 장면을 실제 폭력으로 행사하는 동안 스스로도 이해하지 못하는 분노의 감정을 희곡을 쓴 조승희의 감정에 투영하며, 어쩌면 조승희처럼 무서운 방식으로 폭발시킬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세희에게 유진이 총을 선물한 것이다. 파국적 결말을 예감하며 긴장감을 키워가기에 충분한 장치이다. 그런데 결말은 긴장감을 해소하기에 충분하지 않았고 인물의 행동을 이해하기에도 미흡했다. 사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연극이 무대에 오를 시간이 다가오는데 세희가 연습실로 오지 않아 모두를 초조하게 하는 가운데 연습실 문마저 잠겨있다는 사실이 발견되어 긴장감이 더 고조된 상황에서 전등 하나가 ‘퍽’하고 터지는 소리가 나며 끝나버린다. 전등 터지는 소리가 총 소리를 연상시키므로 관객이 무엇을 기대하는지에 따라 다양한 결말을 상상할 수 있다. 그러한 열린 결말이 문제되는 것이 아니다. 문제는 세희가 왜 연습실에 나타나지 않았는지, 왜 연습실 문이 잠겼는지, 유진이가 건네 준 총에 대해 세희는 왜 지수와 동우에게 서로 다른 거짓말을 했는지, 전등 터지는 소리로 의도한 것이 무엇인지가 모두 납득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채 이해불가해한 채로 성급히 마무리 된 것이 이 작품의 가장 아쉬운 점이다. 무대는 오직 전등의 변화로만 공간을 분할하였다. 작은 무드등, 형광등, 십자등, 가로등의 변화로 교실, 복도, 산책로, 기숙사 등을 설정하였는데 무대의 변화가 거의 없어 공간 파악이 어렵고 단조로웠다. 배우들의 의상이나 배경 음악 또한 큰 변화가 없었고 오로지 배우들의 연기에만 의지해야 하는 공연이었다.

그러나 관객의 반응은 꽤나 진지했다. 조승희라는 이해불가해한 인물의 유명세 덕분인지 범행 전 작성한 그의 글이 주는 신비로움 때문인지 관객은 스스로의 주제를 떠 올리며 만족할 수 있었다. 만약 딜런의 글이 부모나 상담사에게 심각하게 여겨졌더라면, 조승희의 희곡이 전문가에게 전달되었더라면, 세희의 도움 요청이 동우에게 알아차려졌더라면, 결말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타자로서만 존재하던 인물이 모든 인간의 무의식에 자리 잡은 충동의 산물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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