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기력함의 지배, NO노력의 시대

연극 <X의 비극>

이주미(연극평론가)

이유진

연출 윤혜진

제작 국립극단

장소 소극장 판

일시 2021년 3월 12일 ~ 4월 4일

관람일 2021년 3월 28일 15시

사진 출처 : 국립극단

X세대 미지수 X의 세대

작년부터 우리 삶을 지배하고 있는 보이지 않는 실체, 바로 코로나19 바이러스. 코로나19는 눈에 보이지 않아서 더욱 우리의 시간을 지배하고 있다. 한마디로 말해, 모든 삶의 방향성과 인지가 코로나19에 맞춰진 것은 어쩔 수 없는 사실이다. ‘코로나 세대’가 등장할 것이라는 말도 들리는 걸 보면, 2020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어쩌면 지금이 가장 비극적이자 극적인 순간을 맞이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코로나19는 ‘코로나 블루’라는 증상까지 나올 만큼 인간의 생의 의지마저 잠식하고 있는 것 같다. 마치 코로나19가 발생하기 직전 ‘번아웃 증후군’을 걱정하던 사람들이 이제는 ‘코로나 블루’까지 더해져 진퇴양난의 상황을 맞닥뜨려야 하는 일상 자체가 비극인 시대를 버티면서 지내고 있는 것 같다.

<X의 비극>은 X세대인 주인공 현서가 진화된 ‘번아웃 증후군’을 앓는 인물로 설정되었다. 과거의 향수를 자극하던 드라마 <응답하라 1994>가 보여준 X세대에 대한 느낌은 연극의 현서가 보여준 상태와는 달랐다. 이 드라마에서 X세대는 낭만이 있었던 세대였으며, 현재의 시간에서 자신들을 생각해봤을 때도 축복받은 세대라고 말한다. 즉 “지금은 비록 세상의 눈치를 보는 가련한 월급쟁이지만, 이래봬도 우린 대한민국 최초의 신인류 X세대였고, 폭풍 잔소리를 쏟아내는 아줌마가 되었지만, 한때 오빠들에 목숨 걸었던 피 끓는 청춘이었으며 인류 역사상 유일하게 아날로그와 디지털 그 모두를 경험한 축복받은 세대”(<응답하라 1994>의 21회 대사 중)가 바로 X세대라는 것이다.

물론 90년대의 청춘들은 ‘나는 문제없어’를 부르며 넘어져도 쓰러지진 않을 것이라는 강한 의지와 패기가 있었지만, 이미 한 가정을 책임지고 사회 구성원의 중심축이 되어버린 그들에게 과거의 패기와 의지, 도전 정신이 있을까. 그리고 아날로그와 디지털을 모두 경험했던 세대라는 축복이 현실에서는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오히려 과거의 화려했던 시절을 뒤로 하고 현실에, 돈에 치이며 살아가는 중년이 되어버린 X세대에게 그 시절의 기억이 더는 삶을 지탱하게 하는 동력이 되지 못할 것이다.

<X의 비극>에서 ‘번아웃 진화 버전’으로 종국에는 누워서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는 현서의 상태를 보면, 지금 가장 비극적인 세대가 오히려 X세대일 수 있다는 점을 보여주고, 나아가 현재를 살아가는 모든 세대가 비극을 경험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X의 비극>은 연극 속 인물들만이 아니라 그들의 상황을 통해서 우리의 삶을 반추해볼 때, 코로나19의 상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우리 역시 연극 속 인물들과 비슷한 감정을 경험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며, 각 세대의 비극적 상황이 우리의 상황임을, 그리고 지금 우리가 사는 사회 자체가 비극임을 말한다. 여기에 코로나19까지 교차해 현실과의 소통을 다양한 국면에서 한다.

사진 출처 : 국립극단

지금을 살아가는 세대 간 교착점

연극은 모든 인물이 동일한 행위를 반복해서 하는 것이 가장 큰 형식상의 특징이자 주인공 강현서가 쓰러진 상황, 아니 스스로 쓰러지기를 선택한 상황을 가시적으로 이해시킨다. 한 마디로 내용에 부합하는 형식적 특징이 연극 전체를 지배하는 것이다. 극이 시작하면 각 인물들은 바쁘게 움직인다. 마치 보이지 않는 X축과 Y축 사이의 (x₁, y₁), (x₂, y₂) 등과 같은 좌표들의 움직임처럼 보였다. 그만큼 격자무늬 위를 규칙에 맞게 움직이는 것 같았다. 중년의 직장인, 가정주부, 대학생, 입시를 앞둔 고등학생, 노인까지 모두 바쁘게 움직인다.

시작과 동시에 짧았던 움직임이 멈추게 되면, 현서는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 아무것도. 사회는 제로섬 게임”이라고 말하며 결국 매트를 깔고 한쪽에 누워버린다. 산송장처럼 누워버린 현서에게는 생의 의지가 없다. 멈춰버린 현서는 그 자체로는 변화가 없다. 그러나 현서 주변의 사람들은 급격한 변화를 맞이한다. 부인인 도희가 전적으로 가정의 가장이 되어 식당에서 일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친구인 우섭과 불륜 관계에 빠진다. 그 사실을 도희를 통해서 알게 되었을 때도 현서는 여전히 일어나지 못한다. 아들 명수가 양육의 책임을 말하지만, 그를 일으키진 못한다. 현서의 어머니가 부적의 힘을 빌려서라도 일으켜 세우려 하지만 그 역시 현서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누워있는 현서는 과연 번아웃 상태에서 쓰러진 것인지, 아니면 그런 상태에서 스스로 선택한 것인지를 고민하게 만들다 주변의 비난과 변화, 즉 혼자 고립된 상태라는 걸 알면서도 그저 누워있기만 한 그의 모습에서 선택으로 무게추가 기운다. 한때 낭만을 노래했던 X세대였던 현서는 분명 ‘넘어지지 않을 거야, 나는 문제없어’라는 노래를 부르면서 그 시절을 보냈을 것이다. 그런 그가 누워서 산송장의 삶을 선택한 것은 청춘을 지나 중년의 삶을 사는 세대의 비극적인 상황을 더욱 강하게 드러낸다. 그래서 현서의 존재가 연극에서는 그의 주위를 여전히 하나의 좌표처럼, 또는 특정한 움직임을 반복하는 인물들과 대조시켜, 의미를 부여하면서 사는 삶 보다는 맹목적으로 사는 무의지의 상태를 인지시키게 만든다.

가장 눈에 띄는 관계는 바로 현서와 애리다. 명수의 과외 선생인 20대 초반의 대학생 애리는 다른 인물들과 달리 현서의 상태에 관심을 보인다. 무작정 누워있는 현서의 상태를 바꾸려고 하는 인물들과는 달리 그의 지금 상태에 관심을 보이며 다가온다. 애리의 존재가 연극이 X세대의 비극적 상황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지금’을 살아가는 모든 세대의 아픔과 비극으로 확장되고 있다는 지점을 보여준다. 현서를 삶과 죽음의 중간, 죽음에 더 가까운 상태에 있다고 보는 애리는 자살할 것임을 현서에게 말한다. 현서가 먼저 죽는 것을 보고, 자신도 자살하겠다고 말하는 애리에게는 그 어떤 노력과 의지도 사회 앞에서는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는 지금 우리 사회의 젊은 세대의 아픔을 보여주는 것 같다.

사진 출처 : 국립극단

X세대가 ‘나는 문제없어’를 불렀다면, 지금 애리의 세대는 ‘뱁새’를 부르는 세대다. 즉 노력만이 답이 아니다. 공평과 정의를 논할 수 없는 애리의 세대는 “내 탓이라니 너 농담이지 공평하다니 oh are you crazy 이게 정의라니 you mu be kiddin’ me!”를 부르는 세대다. 노력만으로 무언가를 할 수 있다는 희망을 품기에는 지금 우리 사회가 녹록하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중년의 현서가 느끼는 생에 대한 무의지가 청년인 애리를 지배하는 감각이기도 한 것이다. 그렇지만 두 사람은 죽음의 문턱에서 결국 다른 선택을 한다. 낭만과 희망을 품어본 적이 있었던 현서는 선택의 순간을 지연시키며 결국 생의 의지를 느끼게 된다. 반면에 낭만과 희망이 어떤 것인지 실제 감각으로 경험하지 못했던 애리는 자살을 선택한다. 이 순간 현서의 선택과 애리의 선택은 극명하게 달랐다. 특히 애리가 바퀴에 불이 들어오는 롤러스케이트를 타는 모습으로 애리의 죽음을 보여준다. 죽음이 감정이 아니라 실체적인 감각으로 인지되며, 애리의 죽음이 더욱 비극적으로 느낄 수 있게 하는 동시에 현서가 드러낸 생의 의지도 대조적으로 인지하게 했다. 여기서 현서가 보였던 생의 의지는 극의 마지막에 가서 전염병이 걸린 친구와 가족들의 상황을 알면서 선택하지 않더라도 죽음은 언제든지 통과할 수 있는 것임을 느끼며 마지막에 일어서는 순간 강하게 보인다.

<X의 비극>은 현서와 주변 인물들을 통해 시대적인 비극을 강하게 보여준다. 이는 무대에서도 드러났다. 유일하게 천장에 매달려 있는 듯한 두꺼운 오브제는 현서가 누워있는 자리 근처의 위쪽에 있었다. 그리고 센터에 원형의 구멍이 뚫려 있어서 조명이 아래로 뚫려 있는 원형 사이로 비친다. 그리고 구멍 중간에 줄이 내려와 있고, 줄 끝에는 큰 돌이 묶여 있다. 현서 주변에 이 구조물이 매달려 있었기 때문에 극이 진행되면서 현서를 누르고 있는 듯한 느낌을 주기도 했다. 하지만 돌은 언제든지 줄을 당기면 구멍 밖으로 나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는 현서의 상태와도 비슷해 보였다. 그렇기 때문에 현서 역시 생의 의지가 있다면, 자신이 쓰러지는 것을 선택하지 않고 일어서는 것을 선택한다면 언제든지 힘든 상황을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을 암묵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는 애리의 죽음과도 대조적으로 보였다. 애리는 비록 자신의 생을 마감하는 것을 선택했지만, 누군가 비극적인 상황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는다면 작은 가능성이긴 해도 빛을 볼 수‘도’ 있을 것이라고 말이다.

사진 출처 : 국립극단

내용형식연기관객, 어색한 4각 관계

<X의 비극>은 내용과 형식이 관객들에게 전할 수 있는 연극적 재미를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각 인물이 움직이거나 멈춰 있는 순간 모두 이차방정식 좌표들의 움직임처럼 인지되면서 무대 자체가 거대한 좌표로 다가온다. 여기에 대사를 하는 인물들은 몇 가지의 행동을 반복하기 때문에 시각적인 재미가 충분한 연극이다. 이러한 형식은 관객들에게 비현실적인 현서의 행동을 드러내지 않더라도 강조시키고 누군가와 진정한 대화가 사라지고 일에 치이고, 생활에 치이는 동시대의 비극을 잘 보여준다. 하지만 반복이 계속되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3차원적인 공간에 있는 관객들에게는 다소 평면적으로 연극이 다가오기도 한다. 즉, 3차원과 2차원이 교차하는 지점이 이 연극에는 분명하게 있다.

도식적인 움직임과 비현실적으로 다가오는 현서의 모습이 평면적으로 다가오는 것은 다소 아쉬운 지점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연극이 형식적인 미학이 강하기 때문에, 배우들의 톤에서도 다소 아쉬운 점이 있었다. 때로는 형식적인 느낌으로 대사를 전달하지만, 사실주의적 연극의 발화가 나오는 지점도 있었기 때문이다. 즉, 형식적 재미를 느끼려는 순간 사실주의적인 연극적 요소가 등장하는 듯하여, 극의 형식과 내용의 재미를 일정한 속도로 느끼다 중간에 과속방지턱을 만나는 순간이 있었다. 그래서 우리가 사는 ‘지금’, 동시대의 비극을 각 인물들을 통해서 보여주고는 있지만, 그들은 평면적인 공간에 있는 인물들처럼 느껴져 관객들이 있는 3차원의 공간까지 극적인 재미와 메시지가 강하게 다가오지 못한 것 같기도 하다. 또한, 인물들의 상황이 입체적이기보다는 표면적인 느낌으로 다가오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그들의 선택과 상황도 평면적으로 보여지기도 했다. 특히 현서가 애리와 달리 죽음을 선택하지 않을 때, 죽음에 대해 생각했던 다소 미온적으로 인식하고 있는 현서에게 강하게 죽음을 선택할 것을 강요하는 듯한 애리의 모습은 관객들에게 충분한 이해와 설득을 주기에는 한계지점이 있어 보인다. 즉 현서의 상황을 이해하는 것처럼 보였던 애리가 종국에는 그를 이해한 것이 아니라 자기중심적으로 이해를 하고 있었다는 것이 드러나기 때문에, 그녀의 죽음이 비극적으로 느껴지기는 것에도 현서가 마지막 생의 의지를 보이며 일어서는 모습이 강하게 다가오는 것에도 약간의 방지턱이 있는 것 같다.

그래서였을까. 극의 내용이 형식에 잘 맞는 옷이 아닌 듯 보였고, 극의 형식이 내용을 잘 포장하고 있지 못하는 느낌이었다. 그렇다 보니, 배우의 연기가 하나의 지점으로 들어왔을 때, 서로서로 잘 끌어당기는 삼각 구도를 형성하지 못하는 느낌이 들었다. 이 결과, 객석의 관객들도 잘 배치된 4각 구도를 만들어내지는 위치에 서지 못하는 느낌이 들어 극적인 긴장감과 재미를 더 느낄 수 있을 것 같았지만 중간 중간 방지턱을 만나 속도를 내지 못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X의 비극>은 특정 세대에만 국한하지 않고 동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세대의 아픔과 비극을 보여주려고 했던 점은 의미가 있다. <X세대의 비극>이 아니라 <X의 비극>인 이유가 극의 내용에서 보이기에, 세대의 문제가 아니라 지금 우리 사회의 문제를 다시금 생각하게 만드는 지점에서 극의 내용이 가진 무게를 알 수 있다. 또한 내용을 극 중 인물들로만 인지하지 않고 형식적으로도 느낄 수 있게 했던 지점에서 연출의 미학적 시도가 돋보였던 작품이었다. 비록 연극이 평면적으로 인지될 수 있는 여지가 있기는 했지만, 오히려 지금 우리 사회가 입체적이지 못한, 평면적인 사회를 살고 있다는 방증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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