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苦域>: 신 없이 신학하기의 무모함, 혹은 苦役

백승무(공이모 회원)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제공 ⓒ유경오

욥기의 세속 버전

제일 먼저 떠오른 서사는 구약의 ‘욥기’였다. 하느님과 사탄의 내기에 제물로 던져진 욥은 재산과 가족을 잃은 것도 모자라 건강까지 빼앗긴다. 하느님의 가장 충직한 종이라는 이유로 선발된 욥은 인간이 겪을 수 있는 온갖 불행을 감내하고 결국 노년에 구원을 받는다. 사탄의 도발에 경쟁심을 누르지 못한 하느님의 경박함, 자신의 종에게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처참한 불행을 안긴 잔인함에 대해선 눈감자. 혹은 뒤늦은 구원이 과연 고통에 대한 충분한 보상이 될 수 있는지의 문제도 논외로 하자. 우리의 관심은 강철 같은 욥의 믿음이 과연 어디서 왔으며, 만약 뒤늦은 구원이나마 오지 않는다면 인간은 어떻게 고통을 견디는가 하는 것이다. 신 없이, 구원 없이 도덕의지가 정당화될 수 있을까? 세속화된 욥(상요)은 삶(과 죽음)을 견뎌낼 수 있을까?

선함은 승리하는가?

욥기는 하느님이 내리는 고통의 최대치를 과시하는 서사가 아니라, 인간의 한계를 이겨내는 믿음의 극한값을 증명하는 서사이다. 그리고 그 지조의 끝에는 구원의 약속이 실현된다는 ‘믿음에 대한 믿음’, 즉 메타신앙의 공식을 서술한다. 삶이 힘겹더라도 선하게 살아라, 고진감래의 믿음을 잃지 마라는 것이 욥기의 명령이다. 하느님의 종으로 사는 삶에 동기와 결과의 균열은 없다. 모든 것은 신의 의지이기 때문이다. 그 의지를 읽지 못하는 나약한 인간의 근시안과 조급함이 문제일 뿐이다. 사사건건 일희일비하는 인간의 호흡으로는 신의 역사를 이해할 수 없다. 오직 믿음만이 관건이다.

<고역>은 믿으면 구원받는다는 믿음, 그 종교적 메타신앙 없이, 또한 절대자 하느님 없이 인간의 믿음이 성립할 수 있는지 묻는다. 하느님을 향한 믿음이 아니라, 인간 스스로를 향한 믿음이 과연 견고하게 유지될 수 있는가? 그 믿음이 구원이 아니라 오해, 불행, 배신, 저항을 불러오고마는 삶의 딜레마·모순을 감당할 수 있는가? 상요는 자신의 믿음과 신념이 종국엔 승리한다는 이데올로기적 메타신앙을 완성할 수 있을까? 흔히 나무의 상징은 불멸성·영원성인바, 상요의 죽음 후에도 ‘고역’을 지킬 오동나무처럼 선한 의지는 공동체 내에서 지속가능할 것인가? 상요 아버지의 선함이 유전되듯이, 개체의 몰락을 넘어서는 인류의 선한 진화는 가능한가?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제공 ⓒ유경오

주목받지 못한 선함

극작가의 흥미로운 문제설정에도 불구하고 <고역>은 유기성과 총체성 차원에서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다. 먼저 상요를 보자. 그는 명실공히 작품의 원톱 주인공이다. 종교에 귀의한 아버지를 닮은 지극히 선한 인물이고, 불행한 어린 시절에, 별거에, 아들 사망에, 폐암까지 짊어진 사나운 팔자의 사나이다. 선하면 선할수록 불행은 더 커진다는 괴팍한 공식을 선포라도 하듯 그의 삶은 불운과 박복으로 점철되어있다. 그의 이타적, 인간적 사상은 바로 이 불행 속에서 지켜낸 것이다. 그렇다면 관객은 상요의 주장에 공감하고 그의 고통에 연민을 가져야 마땅하다. 하지만 그의 고통과 번뇌는 관객의 시야에서 벗어난다. 그는 관객의 동정도, 위로도 얻지 못한다.

상요는 자신의 이념과 개성을 주도적으로 드러내지 못한다. 무대에서 인물의 개성은 주로 행위를 통해 드러난다. 하지만 상요는 누군가에게 따지고 대들고 윽박지를 동력이 없다. 그나마 자신의 삶과 성격에 대한 정보를 전달하는 방식은 인터뷰이다. 물으면 답하는 소극적 형식이고, 무대에선 재미없기 그지없는 말하기 방식이다. 이런 상요를 결투의 장으로 호출하는 것은 민기이다. 민기의 울부짖는 듯한 항변 속에서 상요의 아들이 죽고 아내와의 관계마저 훼손된 사실이 드러난다. 상요의 주요한 사상은 민기의 입을 통해 대리 표명되고, 무대에서 상요가 드러내는 것은 수세적 변명과 당혹감뿐이다. 이렇게 차분하고 방어적인 사람이 인간성은 좋을지 모르나 무대에선 결코 관객의 주목을 끌 수 없다.

사회학의 창은 윤리학의 방패를 뚫지 못한다

<고역>의 주제부를 떠받드는 두 차례 논쟁 장면은 민기에 의해 주도된다. 그렇다고 민기의 주장이 번듯하고 치밀한 것은 아니다. 민기는 칸트의 도덕철학과 윤리학, 특히 <실천이성비판>의 정언명령(“”네 의지의 격률이 언제나 동시에 보편적 입법의 원리가 될 수 있도록 행위하라”)을 사회의 운영원리를 설명하는 해석학으로 이해한다. 윤리학은 말 그대로 윤리라는 의무·책임·당위를 다루는 영역이다. 윤리학의 술어는 ‘해야 한다’이다. 이 사회가 결코 칸트의 철학처럼 돌아가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그래서 그렇게 돌아가게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 칸트의 윤리학이다. 결과가 아닌 동기를 중시한 것은 누구나 결과만 중시하는 세태 때문이고, 사람을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대하라고 외친 것도 사는 게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사회는 예나 지금이나 칸트의 철학처럼 돌아가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천이성의 선험적 명령에 복종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 인간의 윤리이다. 민기가 사회의 세태와 풍습을 직시하는 사회학적 냉정함에 경사되었다면, 상요는 순수실천이성의 명령을 숭배하는 윤리학에 서 있다. 민기가 현실론이라면 상요는 이상론이고, 민기가 진(眞)을 중시한다면 상요는 선(善)을 중시한다. 현실론은 결코 이상론을 끌어내릴 수 없고, 이상론 또한 결코 현실론을 설득할 수 없다. 이처럼 두 사람은 서로 다른 사고구조와 언어를 소유하고 있다. 갈등은 불가피하고 대결은 치열할 수밖에 없다. 삶에서 진과 선은 똬리를 튼 뱀처럼 선후 우열을 가를 수 없을 정도로 얽히고설켜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 지난한 삶의 딜레마·모순을 극화하는 미적 사유의 의연함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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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등의 외피를 쓴 유사갈등

차별 철폐와 인종주의 척결은 중요한 사회적 과제이다. 하지만 그 위중성 자체가 극적 긴장을 보장하진 않는다. 한 사람의 사활이 걸린 순간이든, 한 공동체의 명운이 좌우되는 위기든 극에서의 무게는 동일하다. 상요의 도덕군자형 절개가 무조건 극성(劇性)을 생산하는 것도 아니고, 개인적 비극에 경도되었다고 해서 민기의 울분이 폭발력이 없는 것도 아니다. 극성의 중추로서 극적 긴장은 인물 자체보다는 인물 간의 갈등과 충돌에서 온다. 극의 본질은 갈등에 있고, 갈등은 긴장감이라는 심리현상을 유발한다. 그 긴장감의 예술적 운용을 통해 관객의 정서적 변화, 나아가 사고의 변화까지 유도하는 것이 연극의 원리이다. 하지만 <고역>에서 갈등의 표출방식은 극적 긴장을 촉발하지 못하고, 문제의식의 고상한 에너지를 소진하고 만다. 왜 그런가?

먼저, 상요와 민기와 유사-갈등은 철학논쟁의 토핑처럼 주변화되고 있다. 칸트에서 (무려) 지젝까지 위압적 이름이 나열된다. 고담준론의 무거운 표현은 일상적 대화를 압도한다. 그것은 하나의 프레임이 되어 일상을 재구성하게 만든다. 일종의 연역법적 사유로 이끄는 것이다. 칸트주의와 공리주의의 대결이 일반명제로 제시되고, 상요와 민기의 논쟁은 특수명제처럼 배치된다. 이런 연역화는 극적 긴장의 축적에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인물 간의 갈등이 하나의 특수 사례로 추락하기 때문이다. 갈등은 어떤 전제 없이, 어떤 프레임 없이 관객 앞에 전개되어야 한다. 물론 철학담론 자체가 주제 요소라면 말은 달라진다. 하지만 <고역>이 타자의 윤리학이나 주체의 해체 같은 철학논쟁을 전경화 하는 건 아니지 않는가. 일상적 삶의 문제라는 보편성과 일반성이 <고역>의 힘이다. 학창시절에는 철학자를 꿈꿨고 고등학교에서 윤리를 가르치는 사람이라는 민기의 인물설정은 거추장스럽기만 하다.

동기부여와 행위목표의 미약

질문을 원점으로 돌려 민기가 찾아온 이유를 따져보자. 분명한 방문 이유가 제시되어야 하고, 거기에서 시발한 민기의 욕망은 상요에게 타격을 주어야 하며, 상요는 그에 대응하여 리액션을 취해야 한다. 작용-반작용은 너무나 단순한 극작 원리이다. 민기의 최종 요구는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거 말하러 몇 년을 기다려 여기까지 왔는가? 그렇다면 칼을 들이대서라도 위선자임을 밝히든가, 손가락 하나라도 부러뜨려 복수를 하든가, 무릎 꿇리고 용서라도 받아내든가 해야 하지 않을까? 아무것도 하지 말라니, 게스트하우스도 문 닫고 죽을 날을 기다리는 폐암 환자가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다고 그만두라 소리치는가. 그러곤 그냥 간다. 상요는 타인의 고통을 느낄 줄 모르는 사람이라고 악담을 늘어놓고 떠난다. 상요의 사상이 범죄(심리)학이나 형법, 외국인법 같은 사회학적 영역보다 형이상학적 윤리학에 치중되어 있다는 사실도, 그 윤리학적 신념이 종교에 가까운 절대적이라는 사실도 민기는 알지 못한다. 그래서 고통불감증이라는 민기의 진단도, 상요가 자신의 사상을 후회하는 날이 올 것이라는 민기의 예상도, 틀렸다.

궁금한 것은 민기의 사상적 결함이 작가의 의도였냐는 점이다. 민기는 상요에 비해 행위동기와 성격이 꽤나 구체성 있고 타당성 있게 구축된 인물이긴 하다. 단순히 자식 잃은 슬픔과 격정에 머물지 않고 학습과 사유로 고통을 극복하려는 적극성도 지녔다. 하지만, 갈등의 양상과 충돌의 강도는 세력의 규모에서 비롯되는바, 민기의 기세는 부실하다. 상요를 찾아온 동기도 충분히 무르익지 않았고, 상요의 사상에 대한 (사전)분석도 허술하다. 민기가 결정적인 순간에 던지는 질문은 ‘만약 과거로 돌아가도 똑같이 행동할 것인가’이다. 민기의 서사는 가정법을 벗어나질 못한다. 이런 허술한 질문이 충돌의 강도를 약화시키고 극적 긴장감에 구멍을 뚫는다. 어느 순간부터 민기가 투정을 부리고 떼를 쓰는 듯한 느낌이 드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런 부실함이 상요의 수세적 태도와 세력균형을 맞추기 위해 고안된 의도적 설정인지는 알 수 없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제공 ⓒ유경오

신이 없으면 선의지도 없다

다시, 양측의 세력 규모라는 측면에서 상요를 한 번 더 호출해보자. 그의 수세적 태도는 관객의 시선을 이끌지 못하는 데에 그치지 않는다. 그는 민기가 제기하는 논쟁을 구체화, 첨예화하지 않는다. 전직 사회학 교수란 지위가 무색하다. 민기의 논리적 결함을 공략하는 전투적 면모까지는 아니더라도, 민기의 도발에 상응하는 리액션을 보여야 한다. 둘의 갈등이 철학논쟁의 대리전에도 미치지 못하게 된 데에는 상요가 민기의 언어로 대꾸하지 않고 자신의 윤리학적 언어만 되풀이한 탓이 크다. 윤리적 우위에 서 있을 뿐만 아니라, 사회적 지위도 민기를 능가하는 상요가 이처럼 회피성 언어만 고집하는 것은 극성 창출에 이롭지 않다. 차별 철폐라는 고상한 사상(작가의 표현으로는 칸트주의)을 내세우고 큰 딜레마를 제시하긴 했지만, 격렬한 충돌 없는 두 사람의 대결은 본질적으로 사상검증을 넘어서지 못한다.

무엇보다 우리는 상요가 누구인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다. 인터뷰 내용에서도, 민기와의 논쟁에서도, 아내와의 대화에서도 상요란 인물의 질감을 느낄 수가 없다. 그의 감정과 아픔, 고통에 대해서도, 폐암 환자로서 그의 삶도, 별거 중인 아내를 둔 남편으로서의 심정도 알 수가 없다. 그러다 보니 상요가 작가의 사상을 전달하는 채널에 불과하다는 편견을 버릴 수가 없다. 관객과 진지한 소통과 감정적 교감을 나눠야 할 온전한 한 인간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인간적 터치가 부족하다보니 신이라는 강력한 논거 없이 윤리학에 투신하는 상요의 면모는 수긍하기 힘들 정도로 억지스럽다. 이를 만회하기 위해서 멕시코에서 죽은 (아마도 목사였던) 아버지를 언급하지만, 이는 되레 패착이 되고 만다. 이런 구슬픈 가족드라마 하나쯤 있어야 인권운동 할 수 있다는 과잉설정으로 오도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상요의 선함을 예외적 사례로 특수화시키는 꼴이다. 眞의 논리로 善의 실천을 이끌어내지도 않고, 眞과 善을 초월하는 신학적 전능함도 도입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상요라는 밑도 끝도 없이 선한 인물을 무대에 세울 수 있는가? 칸트가 해내지 않았냐고? 칸트의 순수실천이성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올바르게 실천하라는 선험적 명령이 아니었냐고? 상요야말로 순수실천이성의 ‘순수한’ 화신 아니냐고? 아니다! 칸트의 실천이성은 신의 존재증명을 위한 가장 확률 높은 논거였다. 신이란 매개 없이 실천이성은 성립할 수 없다! 신 없이 종교적 형이상학에 도전하는 상요의 시도가 무모하게 느껴지는 것도 이 대목이다.

여백 아닌 공백

정체성이 모호하고 극적 기능이 막연한 인물도 <고역>의 결함을 도드라지게 한다. 공연은 기자와의 인터뷰에 민기가 끼어드는 방식을 동일하게 반복한다. 인물의 등장과 갈등의 구도는 밀접한 관계를 갖게 마련이다. 민기의 반복된 등장이 가진 의미는 무엇인가? 아무리 궁구해도 이 반복의 이유를 알 수가 없다. 게다가 기자의 존재는 계륵이다. 질문을 던지는 자로서 상요의 정보를 끄집어내는 요긴한 기능이 있긴 하다. 하지만 그건 기능이지 인물 자체는 아니다. 기자는 누구이며, 그가 상요를 찾아온 이유는 무엇이고, 민기에 대해 어떤 입장인가? 그는 상요 편인가, 민기 편인가? 상요를 존경한 그에게 민기는 취재 가치가 없는가? 의문투성이지만 도통 모르겠다.

아내도 마찬가지다. 3년 별거 후 다시 동거하게 된 사연은 무엇인가? 또다시 떠나는 이유는 뭐고, 사건 직후엔 합의했던 것을 지금에 와서 부정하는 것은 또 뭔가? 민기의 가정법 질문에 대한 상요의 대답이 아내를 화나게 만든 것 같은데, 그 이유는 왜일까? 또한 동규라 추측되는 노숙자는 누구이고, 용복의 질병과 달래의 죽음은 어떤 의미인가? 왕따 당하는 여아 장면은 어떤 의도를 담고 있나? 상징성이 큰 아이들 장면은 무엇을 은유하나?

자석 주위의 쇳가루는 자기장에 따라 일제히 도열한다. 공연의 요소들도 그와 같다. 무규칙적으로 산재한 듯 보이나 철저한 계산과 의도에 따라 질서 있게 늘어서 있다. 스타니슬랍스키는 그것을 희곡의 ‘선’(line)이라 불렀다. 희곡의 요소들은 끊이지 않는 중심선을 따라 통일성을 유지한 채 분포해야 한다. 무대에 나열된 모티프는 어떤 식으로든 핵갈등과 관계를 맺어야 하고, 정서적으로든 논리적으로든 유기적 의미생산에 기여해야 한다. 그 의미적 선이 단절되고 파편화될 때, 작품의 감흥은 반감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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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전이냐 뒷북이냐

피날레 직전 아내가 던지는 질문, “친아버지라면 용서할 수 있을까?” 아마 상요는 계부였던 것 같다. 좋은 반전은 서사 자체를 재해석하게 만든다. 꿰어놓은 매듭을 다시 풀고 엮는 과정은 번거로움이 아니라 소름 돋는 희열이다. 하지만 나쁜 반전은 관객에 대한 배신이고 반칙이다. 이 정보가 왜 결말부에 나와야 하는가? 상요를 흔들 강력한 무기와도 같은 이 질문이 왜 이제야 나오는가? 이건 반전도 아니고, 피날레의 페이소스도 아니다. 반전으로는 함량 미달이고, 페이소스로는 부적절하다. 터뜨릴 때를 놓친 패가 막판에 끌려 나온 느낌이다. 계속 겉돌던 아내를 조금이나마 붙박아주는 효과가 실익이라면 실익이다.

역시 상요는 흔들림 없다. 어떤 외풍에도 흔들리지 않는 주인공은 매력 없다. 근대 비극은 계속해서 흔들리고 고뇌하는 주인공을 무대에 세웠다. 하지만 상요는 흔들리지 않는다. 구원 같은 건 없다고 말하면서도 굳건하다. 관객에게 연민의 곁을 주지 않는다. 어느 순간 부담스러워지기 시작한다. 이질적이고 비인간적이기 때문이다. 흔들릴 때, 흔들리면서 이겨낼 때, 이겨내면서 크게 아파할 때 드라마가 적중한다.

연출 실책

연출은 희곡의 결함을 메우지 못했다. 희곡의 결함은 고스란히 공연에 전이되었다. 철저한 리얼리즘적 연기 방식은 관객 상상력의 숨통을 죄었다. 희곡에 공백이 많을 때 연출은 언어 텍스트를 능가하는 다양한 무대 행위를 통해 다의적이고 다층적인 의미망을 구축해야 한다. 관객의 상상력이 능동적으로 공백을 채우도록 볼거리를 삽입해야 한다.

연출이 놓친 것을 배우가 수습하는 경우도 있지만, <고역>은 개방형 무대구조로 인해 그 가능성마저 차단되었다. 프로시니엄 무대의 경우, 배우의 연기는 관객에게 비교적 균등하게 노출되지만, <고역>이 선택한 블랙박스형 무대는 배우가 희곡의 서브텍스트를 연기로 채우려고 해도 양쪽 관객 모두를 만족시킬 수는 없다. 블랙박스형 무대는 좌우로 큰 동선이 요구되는 공연이나 배우가 양측 관객을 향해 수시로 몸을 돌릴 수 있는 역동적인 공연, 설명과 설득을 위해 관객과의 근접 대면이 필요한 공연에 적합하다. 하지만 <고역>이 그러한가? 희곡 자체도 블랙박스형 무대에 맞지 않고, 연출도 정당성을 확보해내지 못했다. 차분하고 냉정한 분석이 필요하다.

※ 이 평문은 <공연과 이론>(2021, 봄호)에 게재된 바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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