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 없는 ‘판소리 낭독공연’이 보여주었던 것 그리고 이자람

4회 중국희곡 낭독공연 <진중자>

최승연 (뮤지컬평론가)

뮤지컬 <그날들>은 ‘한중수교’라는 시대적 배경을 작품 안으로 끌어와 ‘미스터리’의 개연성을 높인 작품이다. VIP 중국어 통역 담당자였던 여주인공이 ‘한-중’ 국가 간 비밀을 알게 되어 ‘죽을 운명’에 처했다는 설정이 없었다면 작품에는 아무런 사건이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며, 이 사건이 2대에 걸쳐 미해결된 채로 있다가 드디어 종국에 해결되는 정서적 충만감을 주지도 못했을 것이다. 작품 전체에 추진력을 제공하는 ‘미스터리 플롯’은 시작점이 ‘중국’에 놓여 있다. 가장 대중적인 선택을 하는 뮤지컬이 ‘중국’을 미스터리의 소재로 활용했다는 점에서 중국은 ‘잘 알려지지 않은 대상’이라는 인식이 묻어난다. 올해로 제 4회를 맞은 ‘중국희곡낭독공연’도 같은 맥락이다. 한국 연극계가 오랫동안 미국과 유럽을 선호해왔던 반면 동양 연극, 그 중에서도 중국 연극은 거의 알려진 바가 없었다. 그러나 2018년부터 시작된 이 프로그램은 한국 연극계에 중국 연극 레퍼토리를 확장해가며 공연의 새로운 소스를 개발하고 있다. 특히 올해는 판이 더 커져서 한중연극교류협회를 포함하여 국립극단, 주한중국문화원,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아시아문화원으로 주관 기관이 확대되었다.

사진제공 ⓒ이강물

올해 소개된 작품은 <진중자>, <장 공의 체면>, <만 마디를 대신하는 말 한 마디>였다. 그중 <진중자>(왕런제 작, 김우석 번역, 박지혜 연출, 2021. 5. 12~13, 명동예술극장)는 연극이 아니라 판소리로 각색되어 주목을 받았다. 이번에도 이자람이다. 브레히트, 마르케스, 헤밍웨이 등 그동안 작업했던 서양 고전에서 벗어나 이자람은 <진중자>를 통해 처음으로 동양의 전통극을 판소리로 바꾸는 작업을 시작했다. 심지어 작창이 되지 않은 ‘창 없는 판소리 낭독공연’이다. 공연을 하는 사람에게도, 보는 사람에게도 모두 낯선 새로운 시도다.

<진중자>는 민남(閩南)방언을 사용하는 복건성 천주 일대에서 전해지는 지방희인 이원희(梨園戱)를 계승한 작품이다. 왕런제가 쓴 <진중자>는 1990년에 초연되었으며 2018년에 이원희의 연극 스타일을 상당부분 복원하여 재연됨으로써 주목을 받았다. <진중자>에는 극단적으로 청렴한 삶을 추구하는 진중자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전국시대 제나라의 사상가인 진중자의 행적은 <맹자>의 <등문공(籐文公)> 하편에서 맹자의 관점으로 대부분 전해진다. 가문의 후광과 형이 받는 불의한 봉록을 거부하고 집을 떠나 오릉에서 수행하듯 살았던 진중자에 대해 맹자는 그가 추구했던 청렴이 완성되려면 지렁이가 되는 수밖에 없다며 비판했다.

왕런제는 이를 토대로 6막의 에피소드식 구성을 갖춘 희곡을 완성했다. 진중자가 아내와 함께 집을 떠나는 것에서부터 시작하여 오릉에서의 청빈한 삶을 소재 중심으로 묘사하다가 잠시 어머니를 뵈러 들른 고향집에서 ‘불의한’ 거위를 먹고 토한 후 지렁이와 청렴함을 겨루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모든 에피소드를 관통하는 것은 청렴함을 향한 진중자의 질문과 구도의 자세다. 무모할 정도로 집요하게 당연한 것을 의심하고 편안함을 거부하는 그는 너무도 진지하기 때문에 풍자의 대상, 희극적인 인물로 보인다. 가령 이런 식이다. 가뭄이 들어 물이 귀해진 오릉에서 진중자는 아침 일찍 단지에 우물물을 받는다. 한 방울씩 떨어지는 물을 오랫동안 단지에 채운 후 집으로 돌아가려 할 때, 그는 우물이 말라 물 긷는데 실패한 사람들을 보게 된다. 그리고 한없는 부끄러움을 느낀다. 천하의 이익을 남보다 먼저 탐하여 ‘발 빠른 게 장땡’인 불의한 행동을 취했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에 그는 우물물을 전부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단지를 깨 버린 후 삼 일간 음식을 끊어버리는 ‘징벌’을 스스로에게 가한다. <진중자>의 재미는 바로 이 지점에 놓여 있다. 부인을 포함하여 극중 인물들도 독자도 관객도 그를 어이없는 눈으로 바라보게 되지만 과연 그가 열등하고 우매한 존재인지 계속 질문하게 되는 ‘진지함’이 있는 까닭이다.

사진제공 ⓒ이강물

이자람이 주목했던 것은 <진중자>의 이러한 이중성이었다. 이자람은 진중자를 익살과 해학으로 다뤘지만 마지막 사설에 첨가했듯 ‘다만 눈앞에 중자가 서있다면 그냥 한번 꼭 안아주고 싶다’는 안타까움을 갖고 있었다. 이러한 시선은 진중자의 아내에게도 향해 있었는데 이자람은 왕런제의 희곡에서 이름이 없었던 아내에게 ‘이중선’이라는 이름을 주고 남편 진중자의 위선을 가장 결정적인 국면에서 자각하게 만드는 인물로 변화시켰다. 원전의 아내는 때때로 일어나는 자신의 욕망을 접어버리고 남편의 선택과 결정을 즉각 따르는 ‘부위부강(夫爲婦綱)’의 전형으로 묘사되었으나, 이자람은 남편의 허위를 지적할 만큼 지적인 파워를 갖고 있는 여인으로 부인을 변화시켰다. 하지만 중선은 오릉으로 떠나자는 남편의 제안에 먹는 것, 입는 것, 노는 것이 부실해질까 걱정하고, 남편의 옆에서 코를 골며 달게 자는 ‘생활인’이기도 하다.

내용상의 강조점보다 사실 더 흥미로웠던 것은 ‘판소리’ <진중자>의 공연성이었다. 다양한 방식의 낭독공연 프로젝트는 동시대 공연 현장에서 흔히 볼 수 있으나 판소리 낭독공연은 <진중자>가 처음이라 개념적으로 어려운 작업이었다. 그러나 이자람은 판소리의 장단과 용례들을 설명하며 사설만으로 창을 ‘상상해야 하는’ 관객의 관람을 돕는 것으로 차분하게 공연을 시작했다. 그리고 아니리 이후 창으로 전환될 때마다 장단의 종류를 미리 말하며 장면의 호흡이 장단으로 어떻게 흡수되는지 ‘창이 없는 사설’로 보여주었다. 고수 이준형의 존재는 공연의 흐름이 유려하게 이어지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는데, 제시된 장단에 맞춰 이자람의 사설을 북 장단과 결합하여 마치 작창이 된 소리를 듣는 것과 같은 착각을 불러 일으켰기 때문이다.

결국 <진중자> 공연은 무엇이 판소리 낭독공연 <진중자>를 이처럼 자연스럽게 만든 것인지 질문하게 만든다. 창조 부분을 제외하고 사설에 즉흥적으로 곡조를 붙이는 것을 매우 조심스러워했던 이자람의 공연에서 짧은 판소리 한 바탕이 연상되었던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이에 대하여 가사 중심의 중국 희곡과 창 중심의 판소리가 잘 융합된 결과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긴밀하고 간결한 극 구성을 갖춘 희극성이 강한 이원희의 특성이 판소리의 정서와 디테일을 만드는 데 적합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 판소리 낭독공연이, 한 편의 판소리가 만들어지는 과정 안에 관객을 위치시키고 판소리의 음악적 모멘트가 무엇인지 자연스럽게 관객을 이해시켰다는 점에 있다. 판소리의 동시대적 가치를 확인한 낭독공연 <진중자>가 한 편의 공연으로 완성되어야 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