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9회 젊은 연극제 공식참가작– <바냐 삼촌>
작: 안톤 체홉
지도교수: 류지미
연출: 서진한
주최/주관: 한국영상대학교 연기과
공연일시: 2021/06/22~23
공연장소: 대학로 민송아트홀 1관
관극일시: 2021/06/22
극단 그룹動·시대 연출 오유경
요즘 하릴없이 분주하다. 틈을 내어 부랴부랴 도착한 민송아트홀. 학생참가자들도 첫 공연을 코앞에 두고, 못지않게 분주했다. 흥분과 긴장, 설렘이 섞인 높은 목소리로 인사하며 화장실과 분장실을 오간다. 본인도 덩달아 높은 목소리로 화답한다. 좀처럼 마음이 가라앉지 않는다. 공연 하루 전 세종에서 겨우 올라와 리허설(rehearsal)도 못하고 첫 공연을 하게 되었다고, 지도교수님의 목소리에 웃음기가 있으나 씁쓸하다. 모든 상황이 여의치 않았던 고충(苦衷)이, 함께 있지 않았어도 충분히 다가왔다. 그래도 막은 오른다! 꺅~! 그래서 이번에도 어김없이 막이 올랐다! 아~!
무대에는 10개 정도의 나무로 만든 초록색 의자가 일자(一字)로 연결되어 놓여있다. 이 의자들은 작품 속 공간을 실내와 실외로 나누고, 연결된 의자들은 마치 벤치처럼 인물들의 다양하고 자연스러운 앉음새를 미학적으로 연출하는데 도움을 준다. 민송아트홀의 협소한 무대를 다양하게 활용하는데 적절한 선택으로 보인다. 무대 양 옆으로 3개와 2개의 이동식 낮은 높이의 간이벽이 놓여서 다양한 출입과 등장을 돕는다. 무대 뒤는 엷은 막들이 커튼처럼 겹쳐 걸려있는데 장면마다 달라지는 조명의 효과를 충분히 받쳐준다. 또한 벤치형 초록의자와 같은 디자인 형식의 탁자와 의자는 무대의 주된 대도구로 사용된다.
오프닝 음악은 프랑스 샹송(chanson)이다. 의례적으로 체홉의 작품은 러시아 민요나 러시아 작곡가의 클래식 곡으로 분위기를 잡는데 관습적 예상을 깨주어 재미있었다. 더구나 비틀즈, 미국의 50년대 재즈 등 다양한 장르와 다양한 국적의 음악이 막간 브릿지 음악(bridge music)으로 사용되었다. 의도 속에서는 러시아만의 이야기로 해석되는 것을 원치 않은 듯했다. 그러한 의도는 음악에서만이 아니다. 인물들의 의상과 머리 모양 등에서도 드러난다. 바냐와 아스뜨로프는 장발로 첫 장면에서 요즘 흔히 볼 수 있는 슬리퍼를 질질 끌며 흐느적거리며 등장하는데, 배우의 신장 차이만 있을 뿐 자세히 살펴보지 않으면 쌍둥이로 착각할 정도로 스타일이 닮았다. 본인에겐 이들의 모습이 현재 무기력증에 빠진 젊은이들의 대표 표상을 연상시킨다고 여겨졌다. ‘난 아무것도 원치 않고 아무것도 사랑하지 않는다.’ 아스뜨로프의 말이 툭 던져져 내내 사라지지 않는 것은 이 때문이 아닐까. 작품 속 바냐는 고전 그대로 여전히 미친 듯 옐레나를 향해 혼자 정욕에 불탄다. 그리고 여전히 후회하며 말한다. 왜 10년 전에 그녀에게 사랑한다고 고백하지 않았는지. 흥! 설마~! 10년 전에는 그녀의 진가를 아예 발견 못했겠지! 왜 이런 삐딱한 마음이 드는 건지! 공연을 보는 내내 바냐를 향해 어떤 동정도 연민도 일어나지 않는 건 왜일까. 엘례나를 향한 바냐의 열정과 아스뜨로프의 정념은 안쓰러운 사랑으로 보이지 않고, 아름다운 미모의 여인을 소유하고픈 수컷들의 일방적인 욕정으로 보였다. 옐레나의 의사 따위는 알려고도 안 하고, 반복적으로 ‘NO!’라고 말하는 그녀의 거부의사는 묵살하고 달려든다. 지독히 위험한 성추행으로 보인다. 옐레나도 더 적극적이지 않게 행동하는 것이 수동적으로 매우 부적절한 방어행위로 보인다. 이제 체홉 작품 속의 사랑도 성(性)에 관한 인권문제에 한계를 드러내는 것일까. 아무래도 이 문제는 현재의 성(性)인식을 좀 더 반영했어야 한다고 생각된다. 바냐는 정녕 무능하고, 무기력하고, 여성에 대한 인식도 세련되지 못한 열등의식에 찬 꼰대, 중늙은이인가. 사실주의의 인물의 해석들은 서로 거미줄처럼 얽혀있다. 바냐가 그렇게 보이 것이 의도가 아니라면, 작품 속 각 인물들의 관계 속에서 표현에 놓친 것은 무엇일지 더 따져봐야 할 것이다. 자존감 낮은 인간의 우울. 권태와 게으름. 작품 속 인물들은 서로 섬처럼 떠돈다. 바다에 각자 튜브를 달고 둥둥 떠서는 흘러가는 대로 몸을 맡기고, 잠시 서로 만나 부딪치지만 잠시일 뿐 이내 다시 흘러가, 상대에게 멀어지는 스스로를 어쩌지를 못한다. 아무도 서로에게 진정 귀 기울이지 않는다. 아무도 듣지 않는다. 아… 어렵다. 이런 인간 군상들의 실존적 고독을 어찌 드러낼까. 생동감 있는 무기력증은 어떻게 표현할까. 공부가 많이 필요한 포인트다.
이번 한국영상대 연기과의 젊은 연극제 참가작, <바냐 삼촌>은 분명 준비가 허술하고 아직 농익지 않았다. 연기에 있어 해결해야 할 숙제도 잔뜩 남았다. 인물의 모든 행동, 세세한 동작 하나하나에는 확실한 동기와 목적이 있다. 인물들의 숨어있는 행동들을 찾아 그 빈 곳들을 세세히 채워야 한다. 그래야 그 연기, 표현 속에서 인물들이 비로소 살아 숨 쉰다. 혼자만 살아 숨 쉬어도 안 된다. 상대 인물들 모두가 함께 살아 숨 쉬어야 하고, 서로 끈을 놓지 않고 교류해야 한다. 그래야 작품 전체가 생기를 얻는다. 작품 전체는 인물들이 서로에게 던져 건네는 공놀이와 같다. 어떤 경우에도 이유 없이 공이 땅에 떨어져 그 움직임을 멈추게 해서는 안 된다. 공이 멈추면 공연이 멈춘다. 공연이 멈추면 관객도 멈춘다. 무대 전환에 드는 시간이 너무 길다. 아무래도 연습했던 공간과 달리, 달라진 새 무대 공간에 충분히 적응할 시간이 부족한 탓이다. 조명도 서두른다. 조급한 마음이 느껴진다. 그 모든 원인의 배경으로 현저히 부족한 리허설 시간이 있다. 그래서 안쓰러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무대에서 허세 부리지 않고 인물을 표현하는데 솔직하고 정직하게 임했다. 여전히 무대에 존재해 있음에 설렘과 즐거움으로 기뻐했다. 그 마음이 인물과 함께 진정성 있게 전달된다.
2년 가까이 코로나로 인해 공연계는 큰 타격을 입었다. 현장감 있는 매력의 특성을 살리지 못하고 궁여지책으로 영상을 통해 작품을 선보이려 애쓰기도 했다. 많은 허무와 좌절이 불안을 가져왔다. 공연계, 특히 연극은 더 많이, 그 활동이 축소되었다. 더구나 현재는 학생 인구수의 절대적인 감소로 인해, 지방대학의 연기과 입학 인원들이 현저히 감소하고, 몇몇은 폐과(廢科)의 운명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게 되었다. 연기과 학생들의 진로가 연극무대보다는 영상과 방송 영역으로 훨씬 더 많이 쏠리고, 불투명한 미래에 할 수 없이 전향하는 현상도 막을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코로나 때문이기는 해도, 불과 2년 전만 해도 관객석이 꽉 차게 학교 선배와 후배, 동기들에 둘러싸여 흥겨운 박수로 한껏 응원과 격려를 받았을 텐데, 관객석에는 공연관계자들까지 합해 겨우 스물 남짓이 앉아있었다. 그들의 선생으로, 그들의 현장 선배로, 그들의 고군분투하는 무대를 보는 본인의 마음은 매우 애틋했다. 이들 중 몇 명이 끝까지 이 공연계에 남아줄까. 남아 준 이들의 미래에 과연 연극은 얼마나 많은 기회로 버티어줄까. 29년이나 지속되어 온 젊은 연극제가 또 이대로 계속 지속될 수 있을까. 앞날에 어떤 변화가 기다리고 있을까. 미래에 놓인 것이 불안과 공포만은 아니길 기도한다. 준비가 절실히 필요하다. 공연계 선배들의 어떤 책임과 의무가 현명한 선택이 될까.
“2019년도 처음 학교에 입학하여 어느덧 2년이란 시간이 흐른 2021년. 그 시간 동안 저희는 매 학기마다 다양한 작품을 만나고 떠나보내며 배우의 삶을 꿈꾸는 학도로서 매일 매일을 헛되이 보내지 않도록 노력하며 성장해 왔습니다. 어쩌면 학교에서의 마지막 공연을 장식하고자 하는 지금, 이 글을 쓰는 순간에도 저희는 저마다 품에 안고 있는 꿈들을 이루기 위해 앞을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비록, 좌절하거나 포기하고 싶은 순간들도 존재했지만,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여태까지 달려왔을 나의 동기들, 선배들, 그리고 지체 없이 나아갈 수 있도록 힘이 되어주신 교수님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연출을 맡은 서진한 학생의 프로그램 글이다. 그 울림이 작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