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윤희
작 : 도덕의 계보학
공연단체 : 상상만발극장
작·연출 : 박해성
공연 일시 : 2021.6.4.~6.13
공연 장소 : 대학로예술극장 소극장
관극 일시 : 2021.6.11. 20:00
출연 : 성여진, 선명균, 김훈만, 신사랑, 김슬기
연극의 본질을 질문하다
십 년 전 대가 피터 브룩이 한국을 찾아와 텅 빈 무대 위에서 붉은 천을 펼쳤을 때의 느낌이 다시 한 번 되살아났다. 무대에는 몇 개의 의자가 전부였고 배우들은 상황에 따라 자리를 옮기며 대사를 했다. 등장인물들이 머무는 곳이 어디인지 또 어떤 상황에 놓여 있는지를 알기 위해 관객들은 그들의 표정과 대화에 집중하며 최대한 상상력을 발휘해야 한다. 세트는 고사하고 소품 하나 찾아볼 수 없는 무대는 그렇게 연극 고유의 언어로 관객들의 상상 속에서 몇 차원의 세계를 그려내고 있었다.
도덕과 정의에 대하여 질문하다
‘도덕의 계보학’이라 이름 지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을 통해 도덕과 정의의 기원에 대해 답을 얻을 수 있을 거란 기대를 해서는 안 된다. 연극은 관객들에게 질문을 던질 뿐이라는 기본에 충실했던 작품이었기 때문이다.
의사에게 메일로 존엄사를 요구하는 교사, 교사에게 자신을 폭행한 친구들을 밝히지 않는 학생, 이름 없는 고양이들에겐 단지 이름이 필요하지 않을 뿐이라고 말하는 플랫폼 노동자, 총기난사의 현장에서 상대를 가리지 않고 치료하는 의사, 자신이 몸담고 있던 캠프가 총기 난사 당하자 인권 시위에 가담하게 된 봉사자. 이들은 각자의 상황 속에서 도덕적 선택 앞에 놓여 있다. 그리고 이들은 서로 관계 맺는다. 연극은 반드시 해야만 하는 그러한 질문을 집요하게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품에서 보여준 주제와 설정이 다소 진부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미니멀한 무대 위 펼쳐지는 찬란한 시각 효과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오로지 배우만이 존재하는 그 무대 위에서 찬란한 시각적 효과가 존재했을 때였다. “그 파란 호수에서 수많은 홍학들이 서 있었어요.” 홍학들이 이루는 붉은 장관은 등장인물의 내면을 바꾸어 놓는다. “난 이제 집에 돌아갈 수 없어요, 그 새들을 봐버렸어요.” 배우의 동그란 눈동자가 선명한 색채를 그리며 무리에서 자유롭게 노니는 홍학들의 모습이 매우 아름다웠다고 말하고 있었다.
“보세요, 거리가 진짜로 텅 비었어요.” 의사와 기사 간의 쓸쓸한 대화 속에서도 텅 빈 거리의 이미지가 선하게 들어왔다. 등장인물들은 거리가 왜 그렇게 텅 비었는지 자세히 설명해 주고 있지 않지만 코로나19를 견디고 있는 관객들로서는 충분히 공감이 가는 장면이기도 했다. 또한 다급하게 봉사 캠프를 찾아온 의사의 거친 대사를 통해서도 폭력이 난무하는 테러의 현장을 눈으로 보듯 생생하게 전해들을 수 있었다.
굽히지 않는 사람들과 이끌리는 사람들
<11 그리고 12>를 다시 소환해 보고자 한다. 당시 피터 브룩은 힘을 온전히 뺀 연기를 보여줌으로써 지혜를 보여주었다. <도덕의 계보학> 등장인물들은 극 중에서 날을 세우고 있어 어떠한 ‘힘’ 그 자체를 연기하고 있었다. 유일하게 플랫폼 노동자만이 화가 날 만큼 불합리한 상황 속에서도 관망의 태도를 고집한다. 교사, 학생도 마지막까지 자신의 가치기준을 고집하며 한 발짝의 물러섬 없이 숨 막히는 소통을 이어간다.
반면 두 명의 등장인물은 분명한 감정의 변화를 보여준다. 적어도 필자에는 무언가를 보고 감동하고 반응하는 태도가 가장 인간다운 태도라고 작품이 말하는 것 같았다. 인권운동가는 붉은 홍학의 눈망울을 보고는 인생을 걸고 새로운 기준 위에 서기로 결심한다. 테러의 현장에서 그녀를 만났었던 의사는 먼 거리를 비행해 그녀의 과거를 좇기 시작했고 점차 긴장을 풀며 소탈한 모습을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