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볼프강 폰 괴테
‘파우스트 (Faust)’
– 임야비(tristan-1@daum.net)
자유기고가, 서울 신포니에타 기획 및 연출
극단 듀공아 / 극단 동맹 연출부 드라마트루기
매우 유명한 작곡가가 작곡한 비교적 덜 알려진 파우스트 가곡을 소개해 본다. 바로 리하르트 바그너(1813~1883)의 초기 작품 ‘괴테의 파우스트에 의한 7개의 노래’다.
바그너의 예술을 한마디로 정의하는 말 중에 ‘거대한 몰락’이라는 말이 있다. 그의 대표작은 오페라와 악극(Musikdrama)인데, 몇몇 작품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주인공이 죽는 비극이다. 심지어 16시간짜리 악극인 ‘니벨룽의 반지’의 결말인 ‘신들의 황혼’에서는 아예 세계가 멸망하여 주인공들은 물론 신까지 죽는다. 그야말로 거대한 몰락이다.
또, 바그너 하면 반사적으로 떠오르는 단어가 바로 ‘총체 예술(Gesamtkunstwerk)’이다. 바그너가 창시한 총체 예술은 그리스 비극을 모체로 한 일종의 종합 예술로, 문학, 철학, 신화, 연극, 음악, 미술, 무용 등 모든 예술이 무대 위에서 하나로 어우러지는 예술 작품을 일컫는다. ‘총체 예술론’은 바그너의 확고한 신념이자 중심 철학이었다.
널리 알려진 이야기로, 바그너는 ‘게르만적’인 것에 매우 집착했다. 그는 자기 민족에 대한 사랑이 너무 지나친 나머지 민족주의, 국수주의에 빠지게 되고, 결국 ‘반유대주의 작곡가’라는 씻을 수 없는 오명을 남기게 되었다.
‘거대한 몰락’과 ‘총체 예술’ 그리고 ‘게르만적’. 이 세 단어 옆에 파우스트를 대입해보자. 독일이 자랑하는 대문호이자 바이마르 공국의 재상 ‘괴테’가 쓴 문학, 과학, 철학, 신학과 예술을 ‘모두 어우르는’ ‘거대한 비극’. 야심가 바그너의 입맛에 ‘파우스트’만큼 딱 맞는 작품이 또 있었을까?
파우스트는 바그너가 언젠가는 ‘총체 예술화(化)’ 해야 할 일생의 과제였다. 그 단초를 엿볼 수 있는 작품이 청년 바그너가 18살(1831)때 작곡한 ‘파우스트에 의한 7개의 노래(7 Kompositionen zu Goethes Faust, WWV 15)다.
총 7곡으로 남성 합창, 혼성 합창, 남성 독창, 여성 독창 등으로 편성된 2~4분 정도의 짧은 노래들이다. 가사는 모두 파우스트 비극 1부의 다양한 장면에서 따왔다. 이 중 합창이 들어간 1~4곡(군인들의 노래, 보리수 아래 농부의 노래, 브란더의 노래, 메피스토펠레스의 노래 1 ‘벼룩의 노래’)는 이후 연재될 ‘수십 명이 연주하는 파우스트’에서 다루기로 하고, 이번에는 피아노와 독창자 – 두 명이 연주하는 제 5, 6, 7곡에 대해 분석해보겠다.
제 6곡 ‘물레 앞의 그레트헨’은 앞선 4월호 연재에서 슈베르트의 가곡(Gretchen am Spinnrade D. 118)으로 소개한 바 있다. 슈베르트는 이 곡을 17세(1814) 때 작곡했는데, 바그너는 18세(1832)에 같은 텍스트에 음악을 붙인 것이다. 대략 20년 격차를 두고 같은 가사 다른 곡이 탄생했는데, 이를 번갈아 들어보자. 뛰어난 피아노 반주와 아름다운 멜로디를 겸비한 슈베르트의 일방적인 판정승이 점쳐진다. 두 곡의 결정적인 차이점은 슈베르트의 곡이 피아노와 목소리가 잘 어우러진 ‘무대 미술’이라면 바그너의 곡은 가수를 전면에 내세워 목소리에 하이라이트를 주는 ‘무대 연출’에 가깝다는 점이다. 바그너는 위대한 작곡가이자 빼어난 연출가였다. 거장이 젊은 시절에 쓴 이 짧은 곡에서 ‘음악의 무대적 연출’을 고민했던 연출가 바그너의 흔적을 엿볼 수 있다.
제 7곡 ‘성벽 안의 그레트헨’도 위와 마찬가지로 같은 가사 다른 음악이다. 5월호 연재에 소개했던 슈베르트의 곡(Gretchen im Zwinger D.564)이 ‘호소’라면, 바그너의 곡은 제목 그대로 ‘멜로드라마’다. 이는 기악을 반주로 격정적인 대사를 읊는 듯 노래하는 기법으로, 이탈리아 오페라의 ‘레시타티보(recitativo; 말하듯이 노래하는 창법)’의 독일어판이라고 생각하면 쉽다. 젊은 바그너는 이 곡에서 멜로드라마의 형식을 빌려 ‘대사의 음악적 전달’을 실험했던 듯하다.
마지막으로 살펴볼 제 5곡 ‘메피스토펠레스의 노래 2번’은 그레트헨의 환심을 사려는 파우스트를 두고 메피스토펠레스가 부르는 노래다. 이 노래를 듣고 그레트헨의 오빠인 발렌틴이 칼을 뽑아 악마의 기타를 박살 낸다. 그러자 메피스토펠레스는 파우스트의 먼지떨이에 마법을 걸고, 파우스트를 획책해 발렌틴을 죽이게 된다. 졸지에 살인을 저지르게 된 파우스트는 별다른 죄책감을 느끼지 않고 하르츠의 산속 마녀들의 축제인 ‘발푸르기스’로 향한다.
음악은 음흉한 경고다. 살금살금 다가가는 발걸음을 묘사한 피아노 리듬은 야음을 틈타 연인의 침실로 향하는 아가씨의 종종걸음이자, 악마 메피스토펠레스의 신랄한 말굽 소리다. 이 곡은 성벽 안의 그레트헨 장(章)과 발렌틴이 죽고 그레트헨이 성당에서 악령의 소리를 듣는 장의 사이에 위치한 간주곡 역할을 한다.
자국 문화에 강한 집착이 있던 바그너에게 있어서 독일 문학의 정점에 있는 파우스트는 언젠가는 요리해야 할 귀한 재료였다. 이번에 살펴본 노래들은 초기의 작은 시도였지만, 이후 1840년 ‘파우스트 서곡(Eine Faust-Overtüre) d단조’를 통해 음악의 규모를 대폭 키워나간다. 그러나 바그너의 장기인 대규모 악극(또는 오페라)까지 닿지는 못했다. 바그너의 관심이 ‘게르만 문학’에서 ‘게르만 신화’로 넘어갔기 때문이다. 그 결과물이 바로 ‘몰락의 총체 예술’인 ‘니벨룽의 반지’다.
극 파우스트에서 ‘바그너’는 주인공 파우스트 박사의 조수다. 그는 연구를 계속하여 대학에서 한자리를 차지하고 결국 새로운 괴물 호문쿨루스를 만들어 내는 인물이다. 재미있는 사실은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1844~1900)가 한때 작곡가 바그너의 비서였다는 점이다. 만약 희대의 두 천재가 합심했다면 메피스토펠레스와 호문쿨루스를 합친 것보다 더 신선하고, 더 파괴적인 – 새로운 시대에 걸 맞는 새로운 악마를 만들어냈을지도 모른다. 다행히 둘의 사이가 틀어지는 바람에 위의 상상은 가정으로 끝나버렸지만, 이후 더한 인물이 나타나 바그너와 니체를 앞세워 인류 역사상 전무후무한 비극을 만들었다. 바로 아돌프 히틀러(1889~1945)다.
히틀러는 바그너와 니체를 맹신했다. 히틀러는 니체의 ‘초인 사상’, ‘권력에의 의지’를 교묘하게 인종 차별주의와 제국주의로 왜곡했고, 나치의 대규모 전당 대회에서는 늘 바그너의 음악이 울려 퍼졌다.
거대한 몰락의 전제 조건은 ‘거대함의 축적’이다. 그 축적의 규모가 커질수록 몰락의 미학은 더 강력해진다. 만약 바그너가 파우스트를 자신의 총체 예술로 요리해 냈다면, 괴테 또한 히틀러가 저지른 인류적 몰락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을 것이다. 어쩌면 괴테는 바그너가 ‘7개의 노래’와 ‘서곡’ 한 곡만을 작곡하고 더는 파우스트에 손대지 않았음을 감사해야 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