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홍평국전>
이주미(연극평론가)
원작 <홍계월전> (작자미상)
재창작/연출 설유진
제작 극단 907(구공칠)
장소 This Is Not a Church (구 명성교회)
일시 2021년 6월 16일 ~ 6월 20일
관람일 2021년 6월 20일 14시
홍계월, 홍평국, 홍원수
조선후기 여성 영웅을 주인공으로 한 한글소설 <홍계월전>은 유교 사회였던 당시 한자가 아닌 한글로, 남성이 아닌 여성을 주인공으로 한 영웅서사다. 그 사실만으로도 <홍계월전>은 주류보다는 비주류의 감수성이 내재해 있을 가능성이 크다. 당시에는 가부장제에서 여성 주인공이 영웅으로 그려졌기에 센세이션했을 것이며, 가부장제 구도에서 벗어나지 못한 오늘날에도 많은 시사점을 줄 수 있는 작품이다. 이러한 한글소설 <홍계월전>이 2021년 극단 907에 의해 연극 <홍평국전>으로 소환되었다.
주인공 홍계월은 이미 나라의 영웅이 될 운명을 타고난 인물이었다. 다만, 남아가 아니라 여아라는 점이 영웅의 운명을 타고난 그에게 가장 큰 걸림돌이었다. 홍계월이 태어나기 전, 명나라 황제 천자는 “5세에 부모를 이별하고 18세에 부모를 다시 만나 공후작록을 올릴 것”라는 곽도사의 예언을 듣고, 그때 태어난 여자아이들을 모두 죽이라고 명령한다. 고전소설에서 흔히 나오는 영웅들처럼, 홍계월은 다행히/당연히 죽지 않았다. 홍계월은 여공의 도움으로 목숨은 부지할 수 있었으나, 부모와 이별하게 되면서 아버지 홍시랑이 지어준 이름 홍계월이 아닌 홍평국으로, 여성이 아닌 남성으로 살아간다. 홍평국은 18세에 장원급제하고, 대원수 자리까지 오르지만 결국 여성임이 밝혀지면서 그간의 공적도, 홍원수이자 홍평국의 존재도 홍계월이란 이름 앞에 무용지물이 되고 만다. 홍계월임이 밝혀지면서 여느 여성들처럼 규방에 앉아 있어야 하는, 천자의 명에 따라 형제이자 자신의 부하였던 여공의 아들 보국과 혼인을 해야 하는 처지가 된다. 나라의 위대한 장군이자 영웅이었던 대원수가 남성이 아니라 여성이라는 사실로 홍평국/홍계월이 마주하는 세상은 한순간에 달라져 버린 것이다.
난세의 영웅이 홍평국/홍계월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 진실이지만, 세상은 홍평국/홍계월에게는 여성으로서의 성역할을 강요할 뿐이다. 홍평국의 삶은 인정받지 못하게 되며 그간 홍평국으로서, 홍원수로서 나라에 충성했던 난세의 영웅이라는 사실은 여성이라는 사실 앞에 힘을 잃을 뿐이다. 그저 여성이 남성으로 속였다는 사실만 가치 있는 진실로 받아들여진다. 그러면서도 황제인 천자는 마치 홍평국/홍계월의 그간 공적을 인정해주겠다는 넓은 아량을 베푸는 것처럼 행동하며 홍평국/홍계월에게 심리적 폭력을 행사한다. 홍평국/홍계월이 대원수로서 살아왔던 삶은 여성이라는 사실 앞에서 빛바랜 사진이 되어버리고, 여성이기에 혼례를 하고 규방에 있어야 한다는 불편한 현실만 있을 뿐이다.
왜 여성이 나라의 영웅이며 천자도 두려워할 만한 인물이어야 할까. 왜 남성의 질투와 시기를 받으면서도 극의 마지막에 홍평국/홍계월은 위기의 순간에 나라를 구하고 천자를 구했을까. 무엇보다도 왜 스스로 ‘평국’이라는 이름을 붙였을까. 홍평국/홍계월은 왜 자기 나라의 태평성대만이 아니라 만인의 태평성대를 책임질 수 있는 운명을 타고났을까.
사실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은 반복해서 주인공이 “홍계월, 홍평국, 홍원수”라고 스스로 자신을 규정하는 말에서 알 수 있다. 홍평국/홍계월은 자신이 여성이라는 한계에서 스스로 벗어난 인물이었다. 나약한 여성으로 보이는 홍계월은 스스로 여성의 굴레에서 벗어나 홍평국이 되었고, 나라에서 가장 강한 장군 홍원수가 된다. 홍계월이라는 정체성도 있지만, 홍평국도, 홍원수도 모두 그 자신이다. 어느 것 하나 홍평국/홍계월이 아니라고 할 수 없다. 그러나 홍평국 주변 인물들은 홍평국이 여성인 홍계월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이후부터 여성을 가장 강력한 프레임으로 규정하고 홍평국/홍계월을 본다. 그 때문에 더 이상 난세의 영웅이었던 홍평국은 홍계월 앞에 힘을 쓰지 못하게 된 것이다.
내‧외부적으로 인식되는 홍계월, 홍평국, 홍원수 세 존재의 관계는 ‘홍계월≦홍평국≦홍원수’다. 외부의 시선에서 바라봤을 때, 세 존재는 ‘홍계월<홍평국<홍원수’로 갈수록 더 강한 힘을 가진다. 하지만 변하지 않은 사실이자 진실은 ‘홍계월=홍평국=홍원수’, 즉 본질은 다르지 않은 한 인간의 존재 자체라는 점이다. 홍평국/홍계월 스스로는 그 어떤 틀에도 얽매이지 않고 있으나, 세인(世人)이 만들어 놓은 보이지 않는 선을 잣대로 한 인간을 바라보며, 같은 사람을 다른 사람인 듯 여긴다. 마치 자신들이 설정한 선 밖에 있는 여성이 장군이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보국과 여공의 태도, 그리고 여성임을 숨겼던 죄를 너그러이 용서해주겠다는 천자의 태도는 홍평국이자 홍원수가 아닌 홍계월에게는 부당함을 느끼게 한다. 이렇듯 남성들, 권력을 가진 자들, 사회의 테두리 속에 있는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으로 바라보는 시선과 태도의 차별이 가진 부당함을 <홍평국전>은 여성임이 밝혀지면서 홍원수임을 인정하지 않고 홍평국의 존재를 부정하며 홍계월로서만 살기를 원하는 인물들의 폭력적인 생각과 태도를 보여준다.
연극이 <홍계월전>이 아니라 <홍평국전>으로 관객들을 만난 것 또한 성별이 한 인물의 행위를 평가하는 잣대로 여겨지지 않게 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홍계월이 스스로 선택한 이름인 ‘평국’은 결코 여성/남성이라는 특수성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나아가고자 하는 길을 향한 의지이자 자신이 선택한 자기 정체성이다. 그렇기 때문에 <홍평국전>은 남성/여성의 성역할에 대한 이분법적 사고만이 아니라 영웅/도적과 같은 이분법적인 사고에서 탈피하고자 했다. 또한, 극의 말미에서 장맹길을 죽이는 과정에서 ‘천자-홍평국-장맹길’ 구도에서 보이는 수직성은 영웅이나 도적이나 권력자나 모두 사람들을 죽이는 것에는 별반 다르지 않다는 점을 말한다.
극의 말미에 홍평국/홍계월은 나라를 태평하게 만들려고 했지만, 자신도 결국 장맹길처럼 살상을 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천자가 제안한 좌승상의 지위를 거절한다. 홍평국/홍계월의 결정은 우리가 단편적으로만 어떤 상황과 인물을 규정하고 있는 관점을 비판하며 성찰하게 한다. 즉 영웅이라는 이름, 도적이라는 이름으로 인식된 고정관념이 가지는 양면성을 생각하게 한다. 그래서 홍계월/홍평국이 다른 여성들(약자들)과 연대하겠다는 마지막 장면의 선택은 보다 큰 울림을 준다.
지금 우리도 한 사람을 여성, 약자, 소수자 등 여러 프레임 속에 가둔 채 바라보는 것은 아닐까. 우리가 단편적으로만 사람들을 보고 상황을 인지하면서 홍평국을 놓치고 홍계월만을, 홍원수를 놓치고 홍계월만을, 홍계월을 놓치고 홍평국만을 보는 것은 아닐까.
홍계월, 홍평국, 홍원수. <홍계월전>이 아니라 <홍평국전>으로 관객들을 만난 연극은 홍계월/홍평국/홍원수로 잃어버린 혹은 잊어버린 우리의 시선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있다.
공간과 시선의 자유로 그려낸 함께 한다는 연대감
홍계월, 홍평국, 홍원수. 사실 세 사람인 듯한 이 이름이 모두 주인공 한 사람을 가리킨다. <홍평국전>은 고정된 규범과 관점으로 한 개인을 평가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하는데, 그런 점에서 공연장소였던 This Is Not a Church(이하 TINC)는 극의 메시지와 더불어 재미까지 더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 <홍계월전>이 조선후기 한글로 쓰여진 소설이며, 여성 영웅이 주인공이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홍평국전>이 전문 극장이 아니라 대안 극장인 TINC에서 공연한 것은 원작의 의미와 연극 자체의 의미가 더 잘 표현될 수 있게 한다.
<홍평국전>은 다양한 장르적 특성이 혼용된 재미가 공간의 특성과 만나 극적 재미를 강화시킨다. 입체낭독극 형식처럼 진행된 극은 소설의 서술을 그대로 전달하면서도 배우들의 움직임과 음악 등을 활용하여 관객들이 홍평국/홍계월의 서사를 이해하는 것을 넘어, 주인공의 상황에 집중하게 만든다.
형식의 변주, 고전소설에 현대적 음악 사용, 급박하게 흘러가는 서사 속 인물들의 말은 마치 외치는 것처럼 크게 들리지만 슬로 모션(slow motion)으로 구현하는 움직임(액션), 공간의 센터에 자리한 관객들과 그 주변을 활발히 움직이는 배우들의 동선. 이 모든 것이 어울리지 않은 듯하면서도 적정선의 조화를 보여주며 고전과 현대의 대화가 이루어진다. 그러면서 관객들 역시 홍평국의 마지막 선택에, 홍평국이 약자였던 이들과 연대하는 순간에 함께 할 수 있다는 느낌을 가지게 만든다.
이런 연대감을 느낄 수 있게 만든 것은 무엇보다도 객석에서 관객들이 배우들의 움직임에 따라 360도 회전을 하면서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객석과 무대의 구분이 있긴 하지만, 관객들이 앉아 있는 공간을 중심으로 배우들은 4면의 사이드 공간에서 연기한다. 관객들은 바닥에 놓인 방석에 앉아 (다소 불편할 수 있기는 하지만) 장면과 배우의 이동에 따라 자유롭게 360도 회전을 하면서 관극한다. 2층 공간까지 배우들이 자유롭게 질주하면서 장면에 맞게 이동하면, 관객들은 거기에 맞게 앉은 자리에서 적정한 각도로 회전하면서 공간 전체에 시선을 두면서 관극하게 된다.
TINC에는 고정된 시선도, 고정된 공간도 없다. 이 공간 어디에도, 이 연극 어디에도 정해진 것은 없다. 공간의 재미는 한편으로는 <홍평국전>에서 홍계월이자 홍평국이자 홍원수가 겪어야만 했던 정해진 관념과 바꿀 수 없었던 시선에 대한 반기인 셈이다. 달리 말하면, TINC에서 <홍평국전>은 우리가 일반적이라고 생각하면서 정해놓은 규범, 관점, 법칙들을 전복시키고 다양한 시선으로 서로 다를 수 있다는 점, 한 면만으로 모든 것을 보고 알게 되었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는 점을 관객들의 시각과 청각으로 전달한다. 관객들은 자기 자리에서 자유롭게 회전하면서 움직이며, “홍계월, 홍평국, 홍원수”라는 주인공의 발화를 듣게 된다. 여기서 눈앞에 놓인 것만이 아니라 다양한 관점을 가져야 한다는 것, 고정된 틀에만 국한되어 한 가지로만 생각하는 것을 지양해야 한다는 것을 관객들은 느끼게 된다.
어떤 것도 정답은 없다. 그저 <홍평국전>은 지금 우리에게 “그저 두려운 마음을 조심하라!”라고 말하며, 세상이 보편이라는 이름으로 정해놓은 보이지 않는 선을 넘어서서 함께 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내용과 형식과 공간으로 말한다. 360도 회전이 가능했던 시선, 다각도로 볼 수 있는 시선을 따라 주인공이 그리고자 했던 세상. 앞만 보는 것이 최선이 아니라는 것을, 그것만이 방법이 아니라는 것을 고스란히 체험하게 하는 TINC에서 구현한 이 모든 것이 <홍평국전>이 그리고자 했던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자, 혼란한 이때 도래하길 바라는 세상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