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미래, 연극의 미래

연극 <A, 아이>

전지니(연극평론가, 한경대 교수)

홍사빈 작·연출의 <A, 아이>는 포스트 코로나와 AI 시대 연극의 방향성을 가늠해 볼 수 있는 작품이다. 연극은 재난 이후 부모를 잃고 혼자 남은 ‘아이’가 삶의 의지를 되찾아가는 여정을 담고 있으며, 이 과정에서 언리얼 엔진(unreal engine, 현실에 가까운 인물을 3D로 구현하는 리얼타임 3D 제작 플랫폼)으로 구현된 메타 휴먼이 등장한다. 연극배우였던 ‘아이(I)’는 아버지가 자살한 후 생활고에 시달리던 어머니마저 죽음을 맞자 부모의 유품을 트렁크에 집어넣고 정처 없이 길을 떠난다. 재난 후 현실의 누구와도 소통할 수 없는 상황에서, 아이의 말을 들어주는 것은 그의 데이터를 기반으로 만들어진 인공지능 프로그램 ‘A’이다. 이후 ‘아이’는 ‘A’와 교류하며 재난 이후 삶을 지속할 수 있는, 이미 종언을 고한 연극을 다시 시작할 힘을 얻는다.

고양문화재단 제공 ⓒ노승환

수년 전부터 대학로에서 SF를 표방한 연극들이 꾸준히 공연되고 있으며, 이 과정에서 재난 이후 인간의 방향성을 모색한 작품들도 무대에 올랐다. <A, 아이>의 경우 이 같은 흐름과 무관하지 않은데, 3D 플랫폼으로 구현된 메타 휴먼이 배우로 등장한다는 점에서 기술적 진보의 정점에 서있다. 최근 공연된 장우재 작·연출의 <싯팅 인 어 룸>의 경우, 가상공간 서비스인 딥스페이스 안에서 인물의 데이터와 만날 때 스크린에 배우의 얼굴이 투사되는 방식을 활용한 바 있다. <A, 아이>의 경우 한 발 더 나아가 실제 배우의 외형을 토대로 만들어진 메타 휴먼을 등장시킨다. 메타 휴먼 ‘A’의 경우 ‘아이’에게 조언을 제공하는 동시에 때로는 그의 행동을 관조하며 공감의 여지를 만들어낸다.

<A, 아이>는 메시지와 기술이 잘 어우러지는 연극이다. 부모의 죽음 이후 ‘아이’의 고립감을 강조하기 위해서, 그리고 재난 이후 새로운 관계 맺기의 방식을 보여주기 위해 메타 휴먼을 활용한 것은 좋은 선택이었다. 메타 휴먼 ‘A’의 이미지는 극이 시작된 지 한참이 지나 무대에 등장하는데, 이때까지 붉은 조명과 모래를 통해 사막처럼 형상화한 무대와 그를 거절하는 여러 목소리들을 통해 ‘아이’가 감수해야 하는 외로움과 황망함이 객석에 잘 전해졌다. 또한 <A, 아이>는 목소리 출연을 효과적으로 활용하는 연극이다. 실제 배우는 한 명만 등장하는 상황에서, 무대에 울리는 여러 목소리들은 ‘아이’의 부모를 비롯해 그의 친구와 지인 등 다양한 입장들을 전하며 ‘아이’라는 인물이 겪는 상황에 관객이 몰입할 수 있게 했다.

60분 분량의 짧은 연극 안에서 연극은 플롯보다는 인물의 감정에 집중한다. 왜 ‘아이’의 아버지가 가족을 해방시키기 위해 죽음을 선택했는지, 또한 왜 아이는 연극에 그토록 집착하는지 파악하기 어렵다. 곧 그의 부모가 남긴 유산이 무엇인지 명확히 감지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관객에게 제공되는 정보가 제한적인 상황에서 짧은 시간 안에 ‘아이’의 좌절과 재출발의 과정을 감정적으로 따라가기란 용이치 않다. 스크린 위의 문장들이 일그러지고 단어들이 깨지는 효과 등이 인상적이지만, 경우에 따라 최신 기술과 극적 효과들이 오히려 ‘아이’라는 인물의 정서에 집중할 수 없게 만들기도 한다.

고양문화재단 제공 ⓒ노승환

<A, 아이>의 경우 젠더 프리 캐스팅을 시도했다. ‘아이’는 배우 박창욱과 권슬아가 번갈아가며 연기한다. 으레 아버지의 유언을 이어가는 후세대는 아들일 것이라는 편견을 뒤집는 캐스팅이다. 그렇다면 언리얼 엔진과 프로젝션 매핑 기술을 통해 구현된 메타 휴먼의 형상은 어떠했는가. 최근 포스트휴먼의 젠더화에 대한 문제 제기가 수차례 이루어져 왔고 인공지능이 이 시대의 젠더 고정관념을 오히려 확산할 수 있을 것이라는 우려가 제기된 바 있다. 극 중 ‘A’는 ‘아이’의 데이터를 기반으로 설정된 존재이며, 외형만으로는 그 성별을 정확하게 파악하기 어렵다. 다만 이미지에 덧입힌 목소리는 여성의 것에 가깝고, ‘아이’와의 관계에서 수행하는 행동은 보살핌, 위로 등 기존에 여성의 역할로 인식되어 왔던 것들이다. 그리하여 남성배우 박창욱이 연기하는 ‘아이’와 ‘여성적’ 성향이 강해 보이는 메타 휴먼이 함께 무대에 등장했을 때 방황하는 인간과 위로하는 AI라는, 곧 인간과 포스트휴먼에 대한 기존의 성역할로부터 크게 벗어나고 있지 못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물론 여성배우 권슬아가 연기하는 ‘아이’를 본다면 이 같은 느낌은 달라질 수 있겠지만, 애초 젠더 프리 캐스팅을 추구하고 외형 면에서 의도적으로 메타 휴먼의 성별을 분명하게 드러내지 않았다면, 향후 무대 위의 젠더 역할 및 배치와 관련해 변화를 도모할 필요성이 있겠다.

<A, 아이>는 근미래 연극의 종말을 예견한다는 점에서 정진세 연출의 <액트리스 투>를 연상시키는 지점이 있다. <액트리스 투>에서 연극은 박물관의 유물로 남았고, 박물관을 찾은 고고학자는 로봇배우들을 기반으로 연극의 부활을 꿈꾼다. <A, 아이>의 경우 연극을 계속할 수 있는 힘은 연극에 대한 사랑과 의지로 드러난다. 그런데 이에 더해, 그 의지를 지속시켜 가는 과정에서 AI가 원동력을 제공한다. 그렇다면 코로나 이후 공연계, 특히 연극계의 미래가 불투명한 상황에서 새로운 기술의 도입은 대안이 될 수 있을 것인가. 작·연출을 맡은 홍사빈의 말처럼, “기술이 작품을 ‘잡아먹지’ 않고, 잘 융합할 수 있는 방법”은 과연 무엇일까.

알려진 것처럼 <A, 아이>는 고양문화재단의 ‘2021 디지털-씨어터 스테이지’에 선정된 작품이다. 연극 <A, 아이> 외에도 3D 뮤지컬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미디어 파사드와 홀로그램 기술 등을 활용한 <내 마음 속 어린왕자>가 선정됐다. 비단 이 사례 외에도, 연극무대에 기술의 도입은 더 가속화될 조짐이다. 그렇다면 메시지와 기술이 조화롭게 공명할 수 있는, 융합할 수 있는 지점은 어디일까. 연극 <A, 아이>는 그 가능성과 한계 사이의 아슬아슬한 경계에 있는 작품이다. 연극이 다루는 상황과 기술의 진보는 잘 맞아떨어졌지만, 스크린 위 메타 휴먼으로 시선이 쏠리기 시작하면서 정작 ‘아이’의 정서는 잘 전달되지 않았다. 앞으로 기술은 크고 작은 연극 무대에 어떤 상상력을 제공할 수 있을까. 자기 서사와 기술의 접목을 지속적으로 시도하고 있는 홍사빈의 다음 작품을 기대해 본다.

* 리뷰를 작성하는 과정에서 다음의 글을 참고하였음을 밝힌다.

노윤영, 「사람과 기술이 함께 만들어가는 예술-메타 휴먼 연극 <A, 아이>의 연출가 홍사빈, 배우 박창욱·권슬아」, <누리> 2021년 여름호, 16~20쪽.

류민영, 「예술의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도구로서의 기술」. <누리> 2021년 여름호, 12~15쪽.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