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볼프강 폰 괴테
‘파우스트 (Faust)’
– 임야비(tristan-1@daum.net)
자유기고가, 서울 신포니에타 기획 및 연출
극단 듀공아 / 극단 동맹 연출부 드라마트루그
드디어 혼자 연주하는, 둘이 연주하는 파우스트가 일단락되었다.
작년 이맘때부터 4개월에 걸쳐 연재한 1인(人)이 연주하는 파우스트가 피아노 독주곡들이었고, 5개월에 걸쳐 연재한 2인(人)이 연주하는 파우스트는 가곡이었다. 3인(피아노 트리오, 현악 삼중주 등), 4인(피아노 사중주, 현악 사중주 등), 5인(피아노 오중주, 현악 오중주 등), 6인(현악 육중주), 7인(소편성 실내악) 중에서 파우스트를 찾아보려 각종 자료를 뒤져봤지만, 딱히 찾을 수 없었다. 그래서 10명 이하로 연주하는 파우스트 중에 가장 큰 편성인 펠릭스 멘델스존의 ‘현악 8중주 (string octet op. 20 in Eb)’와 곡의 3악장에서 묘사하는 파우스트 1부 중 ‘발푸르기스의 밤(Walpurgisnacht)’을 소개한다.
보통 ‘멘델스존’, ‘펠릭스 멘델스존’이라고 불리지만, 본명은 ‘야콥 루드비히 펠릭스 멘델스존 바르톨디(Jakob Ludwig Felix Mendelssohn Bartholdy)로 무척 긴 이름이다. 보통 장수를 기원하며 긴 이름을 짓는 속설이 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멘델스존은 38년(1809~1847)이라는 짧은 생을 살다 갔다.
부유한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난 펠릭스 멘델스존은 용모가 수려하고 매너까지 좋았다. 여기에 타고난 천재성까지 있었으니 그야말로 ‘엄친아’의 전형이었다. 아들이 음악에 천부적인 재능을 보이자, 아버지는 아낌없는 지원 사격을 했다. 그래서 멘델스존은 어린 시절부터 자유롭게 음악 여행을 다닐 수 있었고, 자신의 오케스트라를 꾸릴 수 있었다. 19세기 초반, ‘음악 신동’이라는 천재성에 부친의 막대한 재력까지 더해져 멘델스존의 명성은 전 유럽에 퍼졌다. 그의 음악은 서양 음악사(史)상 초기 낭만주의에 속하는데, 바이올린 협주곡 e minor(op.64), 교향곡 3번 ‘스코틀랜드’(op.56), 교향곡 4번 ‘이탈리아’(op.90), 서곡 ‘핑갈의 동굴’(op.26), 결혼 행진곡으로 유명한 극 부수음악 ‘한여름 밤의 꿈’(op.21, op.61), 하이네의 시에 노래를 붙인 가곡 ‘노래의 날개 위에’(op.34-2) 등의 수많은 명곡을 내놓으며 널리 사랑받는 작곡가가 되었다.
누이인 파니 멘델스존(그녀 또한 천재 작곡가였다)과의 우애가 남달랐는데, 1847년 출가한 누이가 뇌졸중으로 급사하자 멘델스존은 극심한 우울증에 빠졌다. 결국, 그 역시 집안의 지병인 뇌졸중으로 같은 해에 사망했다.
12살의 신동 멘델스존은 대문호 괴테의 바이마르 집에 방문한다. 당시 괴테는 72살로 멘델스존과 정확하게 60살 차이였다. 베토벤, 슈베르트, 모차르트 등 기라성 같은 작곡가들과의 교류로 음악적 조예가 깊었던 괴테는 바흐의 푸가와 즉흥 연주를 자유자재로 연주하는 멘델스존을 보고 놀란 입을 다물지 못했다. 괴테가 친구이자 멘델스존의 음악 스승인 첼터에게 보낸 편지에서 당시 괴테가 받은 충격이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너의 제자(멘델스존)는 어린 시절의 모차르트보다 뛰어나네. 이 아이가 처음 보는 악보를 앉은 자리에서 연주하고 작곡하는 것은 거의 기적이라 할 정도군. 직접 보지 않았더라면, 저렇게 어린 나이에 이런 일을 해낼 수 있다는 걸 난 믿지 못했을 걸세. 너의 제자가 이미 이룬 성취에 비하면 어린 모차르트의 음악은 아이들 옹알거리는 소리에 불과하네”
대문호의 칭찬에 멘델스존은 괴테의 연작 시 ‘고요한 바다’와 ‘즐거운 항해’를 관현악으로 표현한 서곡 ’고요한 바다와 즐거운 항해(Meeresstille und Glückliche Fahrt)’(op. 27)로 화답했다.
이제 파우스트 1부의 가장 기괴한 장면인 ‘발푸르기스의 밤’을 살펴보자. 먼저 ‘발푸르기스의 밤’은 괴테의 순수 창작물이 아니다. 4월 30일 밤, 즉 봄이 오기 직전에 온갖 마녀들과 망령들이 산속에 총출동해 한바탕 축제를 벌인다는 북유럽과 독일어권 지역의 오랜 민담이 그 기원이다. 괴테는 일종의 카니발(carnival) 행사로 볼 수 있는 이 전설을 파우스트의 비극이라는 거대한 연극 속에 삽입한다.
‘발푸르기스의 밤’ 장(章)은 파우스트가 그레트헨의 오빠인 발렌틴을 죽인 직후에 느닷없이 펼쳐진다. 여기서 파우스트와 메피스토펠레스는 도깨비불과 함께 노래를 부르며 마녀들의 축제가 열리는 브로켄 산에 신나게 오른다. 연인의 친오빠를 살해한 죄책감 따위는 없다. 파우스트는 젊고 매혹적인 마녀에게 빠져 환락의 춤을 추고, 메피스토펠레스는 늙고 추악한 마녀와 춤을 추며 음탕한 농담을 주고받는다. 이 모든 것이 속세의 죄책감 따위는 잊게 하려는 메피스토펠레스의 수작이자, 극작가 괴테의 절묘한 연출이다.
한바탕 축제를 즐기던 파우스트가 ‘예쁜 사과’에서 연상된 그레트헨을 찾으려 하자 메피스토펠레스는 그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려 산속에서 열리는 연극을 보자고 한다. 이 부분에서 극중극인 ‘오베론과 티타니아의 금혼식 (발푸르기스 밤의 꿈)’의 막이 열린다. 이 장(章)에서 괴테는 셰익스피어의 ‘한여름 밤의 꿈’을 기본 틀로 어설픈 예술가와 작가, 한물간 정치인은 물론 고매한 철학자(칸트, 흄, 피히테)까지 18~19세기의 모든 것을 맹렬하게 조롱한다. 예상했듯이, 이 극중극은 연출가 괴테가 엉망진창인 세상에 날리는 날카로운 풍자다.
파우스트 비극 1부의 발푸르기스 밤에 깊은 인상을 받은 16살의 소년 멘델스존은 4년 전에 만났던 대문호의 칭찬을 떠올리며 현악 8중주를 작곡한다. 현악 8중주는 현악 사중주 편성(두 대의 바이올린, 비올라, 첼로)을 2배로 확대한 편성으로, 실내악으로 관현악 효과를 낼 수 있는 매우 기발한 편성이다. 총 8 성부가 되기 때문에 다양한 사운드 변용이 가능하다. 제1 바이올린이 협주곡처럼 화려한 기교를 뽐내고 다른 일곱 악기가 웅장한 반주를 넣는 것도 가능하며, 같은 악기끼리 짝을 지어 풍성한 화음을 넣을 수도 있다. 16살의 신동은 제2 바이올린-제3 바이올린, 제3 바이올린-제4 바이올린, 제4 바이올린-제1 비올라, 제1 비올라-제2 비올라, 제2 비올라-제1 첼로 식으로 한 칸씩 엇갈리게 짝을 지어, 높은 음에서 낮은 음으로 하행 진행 또는 낮은 음에서 높은 음으로 상행 진행을 참신하게 표현했다.
전체 4악장 중 제 3악장 Scherzo: Allegro leggierissimo (스케르초: 빠르게, 매우 가볍게)가 따로 떼어서 연주될 정도로 가장 유명한데, 바로 이 악장이 발푸르기스의 밤을 묘사한 곡이다.
멘델스존은 그의 누이 파니에게 “이 악장 전체는 스타카토(딱딱 끊어서 연주), 피아니시모(매우 여리게)로 연주해야 하며, 작은 떨림은 용솟음 쳤다가는 다시 수그러들 듯이, 트릴(떨듯이 연주하는 꾸밈음)은 가볍고 재빠르게 사라지도록 연주해야 해. 모든 것이 새롭고 이상하지만, 그와 동시에 은밀하면서 기쁨에 차 있어. 사람들은 이 악장에서 공기 중을 떠도는 영혼의 세계를 느낄 것이며, 어떤 이들은 빗자루를 타고 공기 중으로 날아오를지도 몰라. 악장의 마지막에 제1 바이올린이 깃털처럼 가볍게 날아오르면서 모든 것이 사라져버려”라고 설명했다. 실제로 음악을 들어보면, 악(惡)들이 들끓는 ‘욕망’과 ‘광기’보다는 금지된 축제를 엿보는 ‘설렘’과 경험해 보지 못한 세계로 떠나는 ‘모험’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아무리 천재라지만, 세상 물정 모르는 부잣집 도련님에게 어른의 세계인 ‘발푸르기스의 밤’은 이해의 영역 밖이었던 것 같다. 이 현악 8중주의 3악장이 음악사적으로 매우 훌륭한 곡인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하지만 연극 연출적인 면으로 봤을 때, 이 곡은 브로켄 산으로 향하는 ‘설레는 모험’의 intro에 머물 뿐이다. 이 장의 본체인 ‘욕망이 들끓는 광란’과 ‘세상을 향한 신랄한 풍자’를 묘사하기에는 16살의 ‘엄친아’ 멘델스존은 너무 밝고, 어리고 또 허약했다. 천재 소년 멘델스존에게는 여든에 가까운 노인이 60년간 집필한 거대한 ‘비극’보다는 공기처럼 가벼운 ‘희극’이 더 어울렸는지도 모른다. 그래서인지 역작 현악 8중주를 완성한 직후인 1826년에 작곡한 셰익스피어 원작의 ‘한여름 밤의 꿈’ 서곡은 현재까지도 멘델스존의 음악적 성향을 규정하는 그의 간판 곡이 되었다.
추천 음반으로 오래된 녹음과 최신 녹음 그리고 편곡판 중에서 한 장씩 선정해봤다. 먼저 빈 8중주단(Wiener Oktett)의 연주는 전통을 중시하는 빈 필하모닉 단원으로 이루어진 실내악 앙상블 단체다. 70년 된 Mono 음향을 듣다 보면, 뿌옇고 고색창연한 중세의 발푸르기스를 절로 경험할 수 있다. 반대로 젊은 연주자로 이루어진 유럽 체임버 오케스트라(COE)와 늘 이슈를 몰고 다니는 남아프리카 공화국 출신 바이올리니스트 다니엘 호프(Daniel Hope)가 연주하는 발푸르기스는 또렷하고 세련된 연주를 들려준다. 마지막으로 멘델스존 자신이 3악장만 떼어서 관현악으로 편곡한 판본은 아바도(C. Abbado)가 지휘하는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LSO)의 연주가 단연 으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