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쟁적이기에 가치 있는 작품”

김소연(연극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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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 「페르소나」는 화제의 연극, 화제의 캐릭터를 놓고 배우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새로운 코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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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여름 아르코예술극장 소극장에 오른 프로젝트그룹 빠-다밥의 <추락Ⅱ>는 남아프리카 작가 존 쿳시의 동명 소설을 김한내 연출이 직접 각색한 공연이다. 동명 소설이라고 했는데, 원작소설의 제목은 <추락 disgrace>이다. 숫자가 붙은 건 이 팀의 전작인 <추락Ⅰ>과 이어지기 때문인데, 두 공연은 시공간도 사건도 다르다. <추락Ⅰ>은 1인칭 작품으로 군헬기 사고로 숨진 사촌오빠의 죽음과 그의 장례를 치루고 있는 가족들의 이야기를 그려간다. <추락Ⅱ>는 학생에 대한 성폭행 사건으로 모든 직위를 잃은 루리가 딸 루시가 살고 있는 농장을 방문했다가 루시의 성폭행 사건을 목격하게 되는 연극이다. 두 작품이 다르다고 했지만, 두 작품 모두 돌이킬 수 없는 치명적 사건이 벌어지고 피해자의 가장 가까운 자리에서 사건 이후를 그려가는 작품이다.

프로젝트그룹 빠-다밥의 소개에 따르면 이 연작은 “개인의 생각과 행동을 유형화된 관계에 따라 규정하거나, 정치적 시각에서 판단하는 사회의 시선을 전복함으로써, 세상의 타인들에게 목소리를 돌려주고자 하는 연극적 시도”라고 한다. <추락Ⅰ>에서는 사고를 처리하는 군당국은 물론 사고에 연루된 또 다른 피해자 가족들의 이야기도 전개된다. 사고 헬기를 운전했던 피해자의 가족은 사고의 원인이 운전 잘못으로 지목될까 좌불안석이다. 주인공은 장례에 참여하고 있는 사촌언니의 아이들에게 삼촌을 잊지 말라고 이야기해주는데 현충원 추모식에서 다른 피해자의 영정에 꽃을 놓는 것을 본 조카가 왜 삼촌에게는 꽃을 놓지 않냐고 악을 쓰면서 운다. 사고의 책임, 피해, 슬픔, 잊지 않는다는 것 등등 압도적인 사고를 이해한다는 것은 무수히 많은 시점과 목소리들, 그 거대한, 그러나 분명하지 않은, 소리조차 없는, 아우성을 마주하는 것이다.

그런데 <추락Ⅱ>는 ‘유형화된 관계’라든가 ‘정치적 시각’이나 ‘사회의 시선’을 전복함으로써 되돌려주는 목소리란 무엇인지, 혼란스럽다. 이 작품에는 두 개의 성폭력 사건이 등장한다. 하나는 주인공 루리가 성폭력 가해자로 고발당하는 사건이다. 다른 하나는 루리의 딸 루시의 농장에서 루시의 일을 도와주던, 그러나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아파르트헤이트가 폐기되고 흑인도 농장을 소유하게 됨에 따라 자신의 농장을 갖게 되는, 그의 농장이 점점 루시의 농장으로 뻗어오고 있는, 페트루스 일가의 청소년이 포함된 것으로 (사후에) 밝혀지는 한 무리의 남자들의 루시에 대한 성폭행 사건이다. 무리들은 위급한 산모를 위해 병원에 연락할 수 있도록 전화를 쓰게 해달라며 집안에 들어와 루리를 린치하고 루시에게 성폭행을 가하고 그들의 집을 망가뜨리고 트럭을 훔쳐간다. 루리는 격분하고 범인을 잡아 단죄해야 한다고, 루시가 너무나 위험한 이곳을 떠나야 한다고 한다. 하지만 루시는 이곳에 계속 살 것이고, 이곳에 살기 위해 자신과 결혼하여 자신의 보호를 받으라는 페트루스의 제안을 받아들인다.

연극은 소설을 각색하면서 원작의 거의 절반 가까이에 이르는, 루리와 멜라니의 사건에 대한 전개를 들어냈다. “교수님한테서, 원치 않는 일을 당했어요. 옳지 않은 일을요.”라는 멜라니의 고발에서 연극은 시작되고 첫 장면은 루리에 대한 진상조사위원회다. 루리는 멜라니의 고발을 모두 인정한다. 멜라니의 고발에 대해 진위를 다투는 것을 포기한다. 그는 고발장을 확인하는 것마저 거부한다. 그에 따른 징계와 처벌도 받아들인다. 그러나 멜라니에 대한 자신의 행동이 폭력이라는 것, 그 가해는 오랫동안 남아프리카공화국을 지배하던 흑백분리주의정책의 폭력이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것이라는 추궁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루리는 폭력에 대한 반성과 사과는 거부한다. 마치 그의 태도는 제도의 판단은 받아들이지만 진실은 그러한 판단 밖에 있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듯하다. 그는 사과하지 않았고, 대학은 그를 해직한다. 케이프타운에서 교수로 일하고 있던 루리가 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남아프리카공화국 주변부에 있는 루시의 농장에 오게 되는 것은 가해자로서 루리가 받게 된 처벌 때문이다.

소설에서 연극으로 각색하는 과정에서 루리의 사건을 들어내는 것만이 아니라, 루리의 시선으로 전개되는 나레이션도 (당연히) 모두 제거되었다. 대신 루리를 보고 있는 또 하나의 시선을 추가한다. 바로 영상이다. 이 연극에서 멜라니는 연극의 시작, 루리의 고발에서 희미한 윤곽과 목소리로 등장한다. 이후 멜라니는 직접 등장하지 않는다. (소설에서 루리는 다시 케이프타운에 돌아와 멜라니의 소식을 듣고 그녀가 연극을 연습하고 있는 모습을 객석의 어둠 속에서 지켜보기도 한다.) 대신 연극에는 멜라니 역, 혹은 멜라니의 고발의 목소리를 담당했던 배우가 내내 카메라를 들고 루리를 찍고 있다. 같은 배우가 루시의 집에 살고 있는 유기된 개 케이티의 역도 맡는다. 그녀가 멜라니인지, 혹은 다른 역할인지, 혹은 그저 영상찍기라는 기능을 수행하고 있는 것인지 모호하다. 그녀는 뚜렷이 존재를 주장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지우지도 않는다.

나레이션은 제거했지만 연극 역시 루리를 통해 루시의 사건과 루시의 선택을 쫓게 된다. 연극이 시작되면 육중한 큰 테이블이 무대 한 가운데에 놓여 있고 루리는 이 테이블을 앞에 두고 앉아 있다. 반면 조사위원들은 무대 가장자리 작은 의자에 앉아 있다. 조사위원회라는 공식 기구의 권위에 비추어 루리의 가해 사실을 추궁하고 있는 위원들과 자신의 진실을 설득해야 할 루리의 역할은 공간적으로는 전도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이 연극의 거의 모든 장면은 루리의 동선을 따라 전개된다. 하지만 진상조사위원회 장면을 제외하면 연극은 루시의 농장과 그녀의 친구들의 이야기로 전개된다. 성폭행과 린치의 피해자는 루시이며 루리는 루시가 겪고 있는 사건의 주변인일 뿐이다. 루리는 격분하지만 루시에게 폭력을 가한 이들을 밝히지도 처벌하지도 못한다. 페트루스의 보호 속에서 계속 이곳에서 살겠다는 루시의 선택을 되돌리지도 못한다. 그런 점에서 이 연극은 루리가 끝내 루시의 사건과 선택을 이해하는 데에 실패하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연극을 보고 있는 객석은 혼란스럽다. 진상조사위원회에서 루리의 주장에도 일말의 진실이 있는 것은 아닐까. 혹은 이러한 혼란이 폭력에 대한 가해자의 목소리에 경도되어 있기 때문인 것은 아닐까. 루시에 대한 범죄를 처벌해야 한다는 루리의 주장에 쉽게 동의할 수 있지만 페트루스의 보호를 받아들이면서까지 이곳에 살겠다는 루시의 선택은 받아들이기 어렵다. 루시의 선택은 폭력의 혼돈을 견디는 것일까. 그런데 페트루스와 그의 일가와 친구들의 폭력은 그저 혼란의 과정이라고 부르기에는 너무 가혹한 것이 아닐까.

무대 한 가운데에 놓여있던 육중한 테이블은 루리의 것이었다가 페트루스의 것이 되고 루리가 찾아가는 멜라니네 가족들의 식탁이 되어 무대 한 편으로 물러나 있다. 그리고 텅 빈 무대에는 작은 의자가 놓여있고 루시가 앉아 있다. 그녀는 페트루스의 보호를 받아들이고 그가 지참금으로 자신의 땅을 달라고 하면 줄 수 있지만 집만은 아무도 들어올 수 없는 자신의 공간이라고 한다. 연극의 마지막은 비록 텅빈 공허일지도 모르지만, 온전히 루시의 무대다. 루시는 이 혼돈의 시간을 온몸으로 살아내고 있는 것일까. 그 살아냄만이 ‘옛것’이 물러나고 ‘새것’의 도래를 맞이할 수 있는 것일까. 그런데 왜 그 혼돈의 살아냄은 루시의 몫인 것일까.

변화하고 있지만, 여전히 남겨져 있는 폭력

김소연: 논쟁적인 작품이다. 공연을 보는 내내 무대 위의 사건과 인물들을 내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또 루시의 사건은 매우 가혹하다. 흑인 남성의 백인 여성에 대한, 게다가 그녀는 레즈비언이다, 폭력이다. 아파르트헤이트 폐지 이후 남아프리카공화국이라는 상황까지 덧붙여져 있다. 최근 우리 사회나 연극계는 ‘폭력’의 문제에 대해 매우 단호한데, 이 연극은 단호함보다는 지금 우리 사회의 단호함으로는 판단할 수 없는 입장, 태도, 선택을 다루고 있다. 그래서 ‘폭력’의 문제에 대한 혼란만을 남긴다는 비판도 있을 것 같다. 이 작품을 선택하는 데에 어려움은 없었나.

이윤재: 우선 김한내 연출 등 함께 하는 이들에 대한 믿음이 있다. 그리고 다른 작품에서도 그런데, 나는 직관으로 선택하는 것 같다. 논쟁적인 작품이지만 가치 있는 작품이라고 생각했다. 우려는 작품을 만들면서 공연팀에서도 함께 이야기한 것들이다. 아파르트헤이트 폐지 이후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사회정치적 상황은 이 작품의 중요한 배경인데 우리 관객들에게 잘 전달될 수 있을지 등등 고민이 많았다. 하지만 그런 사회정치적 배경에 앞서 이건 고통에 대한, 혹독한 고통에 대한 이야기이다. 우리가 잘 만들면 된다고 생각했다.

김소연: 사실 가장 문제적 인물은 루리다. 루리는 위계 성폭력 사건의 가해자이다. 연극의 첫 장면은 루리에 대한 진상조사위원회다. 조사위원들은 각자의 입장에서 이 사건을 이미 판단하고 있다. 이 사건은 백인 교수의 흑인 학생에 대한 성폭행 사건이고 남아프리카공화국의 폭력의 역사가 드리워져 있다는 자신의 판단을 받아들일 것을 요구한다. 강압적이다. 반면 루리는 멜라니의 고발을 다 인정하고 위원회의 판단을 다 받아들이지만, 진실은 이러한 제도 밖에 있다는 태도다. 무대의 구도도 전도되어 있는데, 루리는 무대 중앙에 놓여있는 육중한 테이블을 앞두고 있는 반면 진상조사위원들은 무대 가장자리에 있다. 도리어 가해자인 루리가 무대 전체를 장악하고 있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연극이 피해 가해 구도를 깨면서 루리의 입장에 기울어져 있는 것은 아닌가 싶지만 그렇다고 루리가 자신의 진실을 강하게 주장하는 것도 아니다. 이러한 전개가 관객을 혼란에 빠지게 한다.

이윤재: 그런 고민이 있었다. 루리가 너무 확연하게 나쁜 가해자로 보이지는 않아야 한다는 것, 그렇다고 루리가 말하는 것처럼 루리만이 진실을 가지고 있다고 설득하는 것도 아니어야 한다는 것이다. 희곡은 소설과 달리 멜라니와의 사건을 모두 걷어내고 진상조사위원회에서 시작한다. 관객들은 그 장면에서 루리를 처음 만나게 되는데, 가해를 인정한다. 반면 자신에게는 자신의 진실이 있다는 태도다. 그걸 또 아주 젠틀하게 말한다. 반면 위원회의 여러 인물들은 정의를 말하지만 모순도 드러난다. 그런 점들이 대비되면서 루리에 대해 당당하고 소신 있는 사람, 이중적일지는 모르겠지만 어떤 면에서는 솔직하게 할 말을 하는 사람이라고 느낄 수 있다. 그리고 무대에서 루리는 자신이 믿는 바를 선택하고 행동한다. 그렇다고 해서 이 연극이 루리가 옳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김소연: 루리는 자신에 대해서 자신의 진실로 대응하고 있는 것이고, 루리의 입장과 태도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는 관객의 몫이라는 것인가.

이윤재: 그런데 아무리 솔직하게 이야기하고 사람들을 대할 때 위계를 과시하지 않더라도 그의 말이 옳은 것은 아니다. 관객들도 그렇게 읽더라. 다행이다 생각했다. 사람인 척 연기해도, 그러니까 무대 위에서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이다 설명하지 않아도, 관객들은 그의 선택과 태도에 대해 판단한다.

김소연: 각색 과정에서의 변화에 대해 이야기했는데, 멜라니와의 사건을 걷어내면서 연극에서는 멜라니가 직접 등장하지 않는다. 소설과 달리 연극에서는 루리를 고발하는 첫 대사 이후 멜라니는 등장하지 않는다. 연극의 후반부에 멜라니의 가족을 찾아가 사과하는 장면이 가장 직접적으로 환기되는 장면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루리를 고발하는 멜라니 역을 맡은 배우가 계속 카메라를 들고 루리를 찍고 있다. 같은 배우가 루시 농장의 버림 받은 경비견 케이티 역도 한다. 그래서 직접 등장하지 않지만 멜라니가 계속 환기되고 멜라니의 사건에서 루리의 진실은 무엇일까를 떠올리게 된다. 무대를 계속 맴돌고 있는 이 존재에 대해 루리는 어떤 영향을 받는지 궁금하다.

이윤재: 단순하게 이야기하면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왜냐하면 루리는 그 영상을 볼 수 없다. 영상은 무대 후면에 투사되고 있고 루리는 무대 앞에 있다. 마주치고 찍은 적이 거의 없다. 뒤에서 찍거나 멀리서 찍는다. 관객들에게는 카메라의 시선이 멜라니의 시선으로 보였을 것이다. 멜라니라는 역할로 영상을 찍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루리를 따라다니면서 객석에서 보는 것과 다른 구도로 루리를 찍고 있다. 마치 루리의 속마음을 찍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런 점은 연출의 몫인 것 같다. 멜라니의 사건을 직접 언급하지 않지만 멜라니의 시선을 환기하고자 하는. 루리를 연기하면서 루리가 어떤 인물인가, 멜라니에 대한 루리의 진실은 무엇인가 고민하게 된다. 사실 잘 모르겠다. 루리의 행동을 지지하지는 않지만, 루리가 사랑이라고 주장하는데 그런 사람도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세상 모든 사람이 다 사랑이 아니라고 해도 자신은 그럴 수 있다. 그런데 루리는 린치를 당하고 또 딸이 폭행 당하는 순간에 지켜주지 못했고, 격분하고 해결하려고 하지만, 해결하지 못한다. 그러니까 실패하는 거다. 그 과정을 거치면서 멜리니의 가족들을 찾아가 사과 비슷한 걸 한다. 사과인지도 잘 모르겠다.

김소연: 아이삭스의 집을 찾아가는 장면을 이야기했는데, 그 장면에서 루리가 절을 할 때 루리의 사과라고 생각했다. 물론 처음부터 사과하려고 찾아간 것은 아니지만. 루리는 멜라니의 엄마와 동생이 있는 방을 찾아가 객석을 향해 등을 지고 매우 큰 동작으로 절을 한다. 인물이 등지고 있지만 미장센으로 보면 매우 강렬하다. 그런데 공연 사진을 보니 멜라니의 엄마와 동생이 중심에 놓여 있는 구도였는데, 당황스러운 표정이었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루리의 갑작스러운 행동이 사과로 받아들여지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윤재: 루리는 사과를 해야겠다고 결단을 내리고 간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루시의 농장을 떠나 그냥 길 닿는대로 간 것도 아니다. 루시의 사건이 루리에게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하지만 그 장면이 상황을 모면하기 위한 거짓말은 아니지만,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사과인지, 스스로는 진실인지 아닌지 알 수 없다. 배우가 가끔 그럴 때가 있다. 나의 의도는 이러니 관객들이 나의 의도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연기라인을 만든다거나 무언가 행동을 찾는다거나 그렇게 만들어가지만, 또 어떨 때는 인물에 대한 해석이랄까 의도를 확정하지 않고 움직일 때도 있다. 행동을 크게 하고 미장센도 강렬하다고 했는데, 루리가 진심으로 사과하고 있고 그 마음을 드러내기 위한 것은 아니다. 루리의 진심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고 했는데, 하지만 어떤 깨달음이 왔다고 할 수는 없지만, 자기를 되돌아보게 되는 것 같다. 딱 거기까지만 생각했다.

김소연: 연극으로 각색되면서 루시의 사건이 더 중요해지는 것 같다. 원작과 달리 멜라니와의 사건을 들어냈고 또 루리의 나레이션도 제거되었다. 그럼에도 연극 역시 루리의 동선으로 전개된다. 앞서 루리에 대해 젠틀하다고 했는데, 루시에 대한 태도도 그렇다. 루리는 루시가 이런 시골에서 혼자 살고 있는 것을 그닥 탐탁잖게 생각하는 것 같지만 루시의 선택을 존중한다. 두 사람이 부녀 관계인데, 마치 친구 같기도 하다. 가부장적인 위계가 크게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다가 성폭력 사건 이후 루리의 태도가 변화한다. 루시의 선택을 반대하고 설득하려고 한다.

이윤재: 어떻게 보면 루리는 끝까지 변화하지 못하는 인물일 수도 있다. 변하는 걸 스스로 인정하지 못하는 사람 같다. 세상은 변하고 있고 변했는데, 혼자 그걸 인정하지 않는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루시의 사건에 대해서도 루시의 선택에 반대하고 그녀의 선택을 바꾸게 하려고 설득한다. 하지만 실패한다. 그래서 루리는 루시의 선택을 받아들이는 것인가라고 묻는다면, 변화하지 못하는 인물일 수도 있다고 했는데,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는 걸 받아들인 것 같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이 아파르트헤이트 이후 평화를 향해 변화하려고 여러 노력을 하고 있지만, 그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남겨지는 폭력이 있다. 루시의 사건에서 보는 것처럼 개인에게는 너무나 가혹한 폭력이 있다. 루리는 이제 이러한 현실을 겨우 볼 수 있게 된 것이 아닌가 한다.

김소연: 루시의 선택은 지금도 사실 잘 이해되지 않는다. 또 루시의 사건을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사회정치적 상황으로 이해하는 것에 대해서도 저항감이 든다. 왜 폭력적 현실을 드러내기 위해 여성이 가혹한 폭력의 피해자가 되는 사건이 들어와야 되는가에 대한 우려다.

이윤재: 이걸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라는 물음표를 안고 작업을 시작했던 것 같다. 두달, 두달 반 함께 만들어가면서 어떤 해답을 얻거나 그래서 그 답을 관객에게 전해야지 그랬던 것은 아닌 것 같다. 그런 점에서 루시를 연기한 이세영 배우가 많이 힘들었을 것이다. 우리가 한 건 질문을 좀 더 다듬어내는 것까지가 아닌가 한다.

김소연: 관객들도 루시의 선택을 받아들인다기보다는 그녀의 선택이 무슨 의미일까 계속 생각하게 되는 것 같다. 그래서 두 사람의 갈등, 폭력에 대한 두 사람의 입장과 선택이 대립하지만, 또 다른 한편 그 대립이 부녀지간이라는, 가부장적 위계가 아니라 친밀한 관계로서 고통에 공감하는 과정에서 비롯된다는 점도 이 연극의 흡입력인 것 같다. 그래서 루리와 루시가 도난당한 자동차를 찾으러 갔다가 결국 못찾고 돌아오는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좁은 차안인데, 무대 위에서는 두 사람이 무대 양 끝으로 벌려 앉아 있다. 아마도 두 사람이 정면으로 대면하는 유일한 장면이 아닐까 한다. 서로 멀리 떨어져 있는데, 그 거리가 두 사람의 관계의 두께로 다가왔다.

이윤재: 나도 제일 인상적인 장면을 꼽으라면 그 장면을 꼽는다. 만들 때도 힘들었다. 그 장면은 상당히 즉흥적으로 만들어졌다. 나란히 앉아서 해보기도 하고 여러 시도를 하고 있었다. 거의 연습 후반부에 어느 날 조명디자이너가 이미지적으로 둘이 떨어져 있으면 어떨까라는 제안을 하고 그러면서 장면이 풀렸다. 블로킹 등등 그날 거의 다 만들어졌다. 거리에 대해 이야기했는데, 실제로는 좁은 자동차 안에 나란히 앉아 있는 것인데, 두 사람의 거리를 드러내는 것이면서 일직선에서 서로를 바라본다. 그리고 계속 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 만나고 헤어지는 동선이 있다. 루시와 루리가 계속 대립하는데, 루시는 회피하듯이 이야기했다면 이 장면에서는 가장 분명하고 정확하게 자신의 선택을 이야기한다. 왜 자기가 이곳을 떠날 수 없는지, 왜 아빠와 다른 선택을 하는지. 자신의 속마음을 다 털어놓는 장면이다. 그러다보니 한 장면이지만 루시와 루리의 관계가 변화하는 여러 과정이 있고 그걸 촘촘하게 만들었다. 공연 들어가기 전에 꼭 한 번 더 리마인드하고 들어갔던 장면 중에 하나다.

김소연: 루리에 대해 이야기 하면서 테이블을 빼놓을 수 없을 것 같다. 크고 무거운 테이블이 무대 정중앙에 있고, 테이블은 루리의 공간이다. 그러던 것이 린치 사건으로 뒤집히고 한편으로 물러나고 페트루스의 공간이 된다. 루리를 연기하면서 테이블은 어떤 의미였나.

이윤재: 지금 이야기를 연출이 들으면 무척 좋아할 것 같다. (웃음) 테이블을 통해 공간을 정돈하는 것은 연출의 계획이었고, 공간이 명료하면 배우로서는 무척 편안해진다. 공간의 명료함은 어떤 장소를 설명해주고 있다거나 그런 것이라기보다는 이미지랄까, 테이블이 주는 상징성 그런 것들인 것 같다. 그런데 또 막상 육중한 테이블을 가운데 두고 연기하려니 행동을 찾는 데서 어려움도 있다. 테이블 뒤에서 연기할 때 혹시 관객의 시선을 차단하지 않을까 하는.

김소연: 이야기를 하다보니 객석에서 바라보는 것과 무대 위에서 움직이는 것이 무척 다르다는 생각이 든다. 이제 마지막으로 묻지 않았지만 꼭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으면 해달라.

이윤재: 재공연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잘 안 되었다. 다음에 또 다른 기회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많이 아쉽다. 사실 배우들은 새로운 작품을 하는 것이 더 재밌다. 그래서 재공연 하는 걸 그닥 좋아하지 않는데, 이 작품은 다시 공연하고 싶다. 논쟁적인 작품인 만큼 더 많은 분들이 이 공연을 보았으면 좋겠다.

김소연: 나 역시 작품의 논쟁적 지점이 좀 더 화제가 되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다시 무대에 오를 수 있기를 기대한다.

캘리그라피: 유진규
장소제공: 코스타 http://co-star.kr
사진: 이노아
<추락Ⅱ> 공연사진: 보통현상_김솔

이윤재. 서울예술대학교를 졸업하고 마임이스트로 몸짓콘서트(아르코예술극장), 춘천마임축제 등에서 공연했다. 이후 <엘렉트라>(스즈키 타다시 연출) 등의 작업에 참여했으며, <로미오와 줄리엣> <재생>(타다준노스케), <소설가 구보 씨의 1일> <다정도 병인 양하여> <과학하는 마음> <20세기 건담기>(성기웅), <배수의 고도>(김재엽), <기억의 자리>(권지현) 등을 공연했다. 제12언어스튜디오와 보편적극단에서 함께 활동하고 있다. 국립극단 <그을린 사랑>(김동현)에서는 니하드로 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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