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재의 공포와 연극의 구원

극단 신세계 <김수정입니다>

글_백승무(공이모 회원)

사진제공: ⓒ두산아트센터

매번 처음처럼 처음부터

자신만의 고유한 연출언어로 매 공연을 앙그러지게 발화하는 연출가가 있는가 하면, 두드러진 전용기법은 없지만 공연의 의도가 발현되도록 매번 표현적 방점을 꾹꾹 눌러 찍는 연출가가 있다. 독창성과 개성을 창작의 근간으로 삼는 현대미학의 관점에서 보면 작품을 채색하는 자신만의 색상도를 지닌 전자가 유리하지만, 내용의 참신함에 부합하는 형식적 담대함, 혹은 구상의 기발함에 답하는 인식적 충격을 담보하기에는 후자가 훨씬 더 야무지다. 김수정 연출은 후자에 속한다. 그녀가 지속적으로 구사하는 무대언어나 반복적 패턴은 없다. 매 공연 그녀는 처음부터, 바닥부터, 영점부터 새로 시작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든 작품은 새로울 수밖에 없다. 무대효과의 결과물로서 ‘김수정답다’는 총평은 가능하지만, 그녀의 연출술을 규정하는 세목을 나열할 수는 없다. 작품마다 주제적 연속성과 새로운 기법 추구의 일관성만이 그녀의 연출 스타일을 규정한다. 이전의 영감을 폐기한다는 점에서 김수정의 연출술은 소모적이다. 재활용이 없다. 경험의 누적과 자기복제를 기피한다. 김수정은 자신을 배반함으로써 자기 갱신을 추구하는 예술가이다. 그래서 본인도, 극단도 피곤하다.

새로운 인식을 여는 새로운 표현

김수정은 그간 차별과 편견에 맞서 싸우는 전사의 역할을 자처했다. 공공의 영역, 금기의 주제, 저항의 열의, 형식의 파격 등이 그 투쟁의 범주였다. 관념과 사상에 도취된 나머지 계몽의 열정으로 연극의 흥과 멋을 궂히는 이들과 달리, 김수정의 공연은 주제적 시의성 못지않게 표현형식에 대한 과단성이 있었고 그에 상응하는 진정성과 절박함이 무대에 포진했다. 내용미학에 매몰되지 않고 적합한 형식미학을 발굴해내는 드문 연출가였다. 대중의 반응은 열렬했고, 작년 초연된 <생활풍경>은 올해 이름난 상은 모조리 쓸어 담는 성과를 거두었다. 명실공히 2021년 극단 신세계는 최고였다.

희곡의 문학성과 변별되는 연극의 예술성, 즉 형식예술로서 연극의 특수성을 중시하는 김수정의 핵심전략은 기존의 미적 판단기준을 뒤집고 뒤엎는 착종술에 있다. 심미적 감식안의 척도를 어지럽히는 원심력을 가동하여, 공연에 개입하는 온갖 입장과 관점을 무력화하는 것이다. 우리의 관습적 감각에 편견이나 불감증은 없는지 추궁하는 한 방편이다. 인식 체계를 교란하고 새로운 관점을 유인한다는 점에서 김수정의 공연은 다분히 정치적이다. 하지만 그녀의 정치성은 이념을 선전하기 위해 연극을 동원하거나 수단화하는 게 아니라, 공연의 논리와 맥락, 구도를 논쟁화하여 그 내부를 횡단하는 역동적 힘들을 정치화하는 내재적 축조술을 통해 발현된다. 정치를 발화하는 대신 ‘정치적인 것’의 응축된 잠재력을 촉발하는 것이다.

사진제공: ⓒ두산아트센터

해석과 수용의 대상으로서 잉여

그 관점의 교란에 동원되는 최상의 병기가 바로 ‘잉여’이다. 김수정 공연에는 상례적 수용 감각을 넘어서는 과잉이 존재하고, 그 한도 초과가 남긴 잉여는 의미발생의 동력이 된다. 발성이나 동작의 과도함, 표현강도와 수법의 과도함, 주제전달의 적나라함과 직접성 등이 우리를 불편하게 만드는 잉여물의 본체이다. <김수정입니다>에서도 우리의 판단은 예술과 非예술 사이에서 파르르 진동한다. 여기서 관객이 지각하는 잉여는 삶의 저돌적인 육박에서 온다. 작품은 삶과 예술의 적절한 유비관계를 파괴하고 결국 선을 넘고야 만다. 예술을 위협하는 삶의 진군을 유희적으로 묘파한 작가는 여럿이다. 예브레이노프나 피란델로, 최치원 등이 대표적이다. 대개 예술을 침범한 삶은 본래 위치로 복귀하지 못하고 예술에 동화되거나 희석되기 마련이다. 하지만 <김수정입니다>의 삶은 여전히 그 지위를 유지한 채 득의양양하다. 무대의 기호로 호출된 삶이 예술의 소재로 흡수되기는커녕 무대의 주인을 참칭한다. 공연은 연극의 범주를 넘어 버바팀(verbatim) 퍼포먼스로 이월한다. 버바팀 공연은 다큐멘터리와 함께 현실의 직접성을 붙잡는 효율적 방법이다. 버바팀이 연극의 하위장르인지, 예술로서 연극의 제방을 범람한 다원장르인지에 대한 논의는 접어두자. 중요한 것은 <김수정입니다>가 예술화에 저항하는 삶을 질료로 삼아 예술(언어)의 진위를 감별하는 진실게임의 욕망을 노출했다는 점이다.

허구에 저항하며 육박하는 삶

삶은 결코 100% 재현(再現)되지 않는다. 질서도 없고 플롯도 없다. 삶이 서사화(예술화)되는 순간, 허구의 이름표가 부착된다. 예술은 허구의 규범이기 때문이다. 냉정하게 말하면, “이야기를 만든다는 것은 인간의 실존적 공허함에 억지로 질서를 부여하고 기만적으로 엮어내는 것이며, 허구의 연금술이 작동한 결과 생산된 이야기는 결코 진실이 아니다.”(로버트 스탬, <자기 반영의 영화와 문학>). ‘진실한 이야기’란 모순 형용이다. 극장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현실을 허구로 경험하든지, 허구를 현실로 착각하든지 둘 중 하나이다. 그런데 <김수정입니다>는 현실을 현실로 인식하고, 삶을 삶으로 재현하려 한다. 이 무모한 도전을 위해 연출가 자신의 삶을 배팅한다.

실제 삶이 무대에서 (재생이 아니라) ‘발생’했을 때, 관객의 윤리감각은 경보기를 켠다. 숨기고픈 사적 비밀이 ‘허구의 연금술’인 예술화를 거부한 채 진실의 마스크를 쓰고 무대에 등장한다. 타인으로부터 보호받아야 할 프라이버시가 거리낌 없이 노출된다. 지젝이 <진짜 눈물의 공포>에서 개진했듯이 개인의 내밀한 부분을 드러내는 다큐멘터리의 외설성을 극복하는 한 방법은 그 현실을 허구로 만드는 것이다. 위장된 허구 속에서 외설성의 윤리적 압박 없이 진실을 탐색할 수 있는 것이다. 버바팀이든 다큐멘터리든 삶의 사실적 질료도 서사의 프레임에 결박되면 허구화를 막을 수 없다. 하지만 <김수정입니다>는 예술-허구의 탈출구를 봉쇄한 채, 우리를 프라이버시의 윤리성과 관음증적 욕망 사이에 세워둔다. 수차의 자살시도, 하혈경험, 성폭력 피해, 가해자의 오명과 극단의 위기 등을 서슴없이 공개하고 누설하면서.

사진제공: ⓒ두산아트센터

자기노출과 프라이버시

간직해야 할, 숨겨야 할 사적 가치로서 ‘프라이버시’는 국가나 종교, 공동체의 간섭을 방어하기 위해 근대적 자아가 만들어낸 내면의 소도(蘇塗)이다. 개성과 자존을 지키기 위해 부여받은 불가침특권이자, 양심과 인품이 육성되는 비밀공장이다. 오늘날 관음증 프로그램과 몰카가 난무하더라도 프라이버시의 본질적 측면은 폭로되지 않는다(대저 카메라에 포착된 삶이란 연기된 삶으로 전화된다). 외설성에 대한 관객의 윤리적 거부반응이 작동하기 때문이다. 보여도 보지 않고, 보아도 느끼지 않는 것이 그 윤리의식이다. 그렇다면 <김수정입니다>은 관객의 윤리감각을 거스르면서 왜 이 프라이버시를 포기하는가? 심리학적으로는 인정욕구, 정신분석학적으로는 진실하라는 대타자의 명령 때문이다. 주인공 ‘김수정’에게 삶의 이상이자 욕망의 궁극으로서 대타자는 말할 것 없이 연극이다. 진실하라는 연극의 정언명령은 자기노출의 공포를 능가한다. 문제는 무대에서 과연 그러한 ‘진실함이 표현가능한가’이다. 주관성과 자기보호 본능을 뿌리치고 과연 자기 객관화에 도달할 수 있는가? <김수정입니다>는 자기노출이 봉착할 수 있는 온갖 위험, 즉 진실하다는 자기기만과 자기포장, 혹은 자기변명에 내파되지 않고 버틸 수 있는가?

성공서사와 속죄서사

<김수정입니다>는 김수정답다. 형식도 장르혼종도 우리를 헷갈리게 만들고, 심지어 이게 연극인지 디너쇼인지, 혹은 활동중단 선언 퍼포먼스인지 의아심을 품게 한다. 하지만 동시에, 김수정의 마모가 임계점에 도달했음을 스스로 고백하는 ‘김수정답지 않은’ 작품이기도 하다. 1년에 공연을 5-6개씩 뽑아올리는 무쇠 같은 괴력과 기개 대신 한숨과 눈물이 공연의 경혈을 누르고 있기 때문이다.

<김수정입니다>는 연말 디너쇼 풍의 액자극과 그 속에 삽입된 극중극으로 구성된다. 캐롤송과 런웨이 무대를 갖춘 디너쇼는 유산자들의 상류문화를 패러디한다. 풀메이크업과 드레스코드가 보여주는 부자연스러움과 과잉은 시작부터 불안하고 위태롭다. 텐션을 높인 저 아이러니와 과장은 “연극이 재미가 없어졌다. 인정받기 위한 삶이 토할 것 같다”라는 고백으로 급전직하 바닥을 찍는다. 고조된 분위기를 순식간에 경직시키는 이 아이러니한 헤살질은 <김수정입니다>의 주도선율(라이트모티프)이다. ‘아트 옥션’을 통해 관객과 형성한 자선적 유대감을 한순간에 무너뜨리는 낭만적 아이러니(romantic irony)를 보라. 슐레겔이 “자기창조와 자기파괴의 변화”라고 말한 그 널뛰기 변덕은 서사의 진위성을 의제화함으로써 삶과 예술의 모순을 극대화하는 전술이다. 파괴된 허구의 틈바구니로 맹렬하게 진입하는 것은 삶의 맨얼굴이고, 서사는 이 날 것의 삶을 다시 허구의 프레임에 가두려 동원된다. 이름을 연호하며 주인공을 치켜세우는 오글거림과 지독한 자기비하의 처연함이 위아래를 선회하며 순환하는 원리도, 후반부의 활동중단 선언과 엄숙한(하지만 난데없는) 유서 낭독 장면도 동일 선율 위에 있다.

편년 방식으로 이어지는 극중극은 다시 세 덩이로 분할되는데, ‘신세계’ 창단 이전의 성장기, 극단 ‘신세계’ 활동, 2021년 여름 생일파티 사건이 그것이다. 작품을 관통하는 단일 주제는 ‘억압과 폭력 없는 청정 극단’이고, 그 밑에 수로를 뚫은 두 가지 서사는 성공서사와 속죄서사이다. 성공서사는 신체적 난관과 만성적 성폭력을 이겨내고 극단 ‘신세계’를 정점에 올려놓았다는 이야기이고, 속죄서사는 뼈와 살을 갈아 넣는 맷돌 인생을 살았지만, 진실하지 않다는 죄책감의 토로이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논리구조를 설정한다: 그동안 보여준 것은 연극(=쇼)이었고, 지금 이 고백(=연극)조차 쇼일 지도 모르고, 그래서 이 연극은 ‘쇼가 중지되어야 한다’는 당위를 설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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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격공포와 인정투쟁

다시 진실의 성립가능성 질문으로 돌아가자. 이 질문에 진입하기 위한 선행과제로 주인공이 실격의 공포 속에서 인정투쟁의 검투사로 전장에 내몰려야 하는 이유부터 석명해야 한다. 일단 주인공을 허구적 인물로 소환하여 정신분석적 상규에 대입해보자. <김수정입니다>의 주인공 ‘김수정’은 자신에 대한 과도한 공격으로 내면이 퉁퉁 부어있는 우울증적 주체이다. 인정욕구로 인한 번아웃 상황을 자기처벌로 되돌린 결과이다. 그 기제를 살펴보자. 인정욕구과 과도하면 부당한 대우나 불법적 요구를 척결해야 할 악폐로 간주하는 게 아니라, 극복해야 할 장애물로 여긴다. 그 장애물을 넘기 위해 ‘센 척, 희생자 아닌 척 연기’해야 하고, 그것을 감내하지 못하는 무력한 자신을 비하하고 학대한다. 그 저항과 불복의 누적된 에너지가 복수심이다. 복수심은 무력한 자아가 판타지 속에서 적을 응징하고 정의를 복원하는 보상기전이다. 복수 실현의 현실적 대안은 자신이 울타리가 되는 정의롭고 청정한 극단의 운영이다. 성폭력 선배들이 죽어버렸으면 하는 바람은 이상적인 극단 창단과 짝패이다.

실격불안과 인정욕구는 극단장으로서 책임감이 강해질수록 더 맹렬해진다. 결국 예술적 승인과 사회적 평판을 획득한다. 인정을 받은 것이다. 하지만 인정욕구는 (완전히) 충족되는 욕망이 아니다. 인정욕구를 병리적으로 악화시키는 요인은 인정 자체이다. 인정과 보상은 무력한 자아를 되레 불안하게 만든다. 인정 수위가 높을수록 성과를 위한 자기착취의 강도 또한 증폭되기 때문이다. 그 불안증으로 인해 성취를 부정하고 회피하게 된다. 그런 점에서 주인공이 겪은 생일파티 쪽지 사건은 자기애적 손상(narcissistic injury)과도 같다. 자신의 통제권에 있(다고 믿었)던 극단이 의지대로 조정되지 않을 때 생기는 상실감과 모멸감이 그것이다.

인정욕구는 자아실현과 다르다. 좋아서 몰입한 것은 같지만, 자아실현은 사후 평가나 대중적 인지도를 중시하지 않는다. 작업을 완료했다는 성취욕과 그 결과를 대견해하는 만족감이 중요하다. 하지만 인정욕구는 타인의 시선에 의존한다. 평가에 따라 행·불행이 결정된다. 그리고 더 나은 평가를 위해 자신(혹은 주변인)을 착취한다. 자기실현으로 변전·승화되지 않는 인정욕구는 피곤하다.

어떤 이는 실격을 두려워 말라고 한다. 내려놓고 풀어주라고 한다. 심리학 자기계발서에 적힌 그대로이다. 하지만 예술은 바로 그 강박과 집요함과 결벽을 먹고 자라는 놈이다. 인정욕구로 인한 집념과 완벽주의는 예술적 성취의 밑천이다. 그 치열함과 곤두섬이 없을 때, 예술은 물 만 밥처럼 추지고 흐늘대는 비실(非實)일 뿐이다. 실격연습은 건강의 비법이긴 하지만, 올바른 예술적 정법은 아니다. 김수정은 길들거나 익숙해지거나 순화되어선 안 되는 ‘정신’이다. 그 정신을 봉합하거나 탕진하지 않고 적정 소비에 도달하는 계책의 궁리가 이 공연이 우리에게 부여하는 수행적 과제이다.

사진제공: ⓒ두산아트센터

저기, 실재(의 공포)가 있다

주인공은 ‘좋은 연기’라는 대타자(연극)의 요구를 자신의 욕망과 동일시함으로써 자기노출의 공포를 이겨내고 자아를 방어한다. 무대에서 유려한 연기를 펼치는 이상적 자기 이미지를 모방하면서 성공과 좌절의 사연을 서술한다. 진실과 허구, 삶과 연극 사이의 이 본원적 대립·경쟁 속에서 찰나적으로 실재계 이미지가 침범한다. 바로 “예술이 뭘까요?”라고 묻는 장면과 ‘수입 570만원’이 비춰질 때이다. 전자를 보자. 허구 뒤에 숨어서 거짓된 태도로 연극을 기망했다는 죄책감은 무력한 자아에게 처벌을 기약한다. 경매품 ‘몬스터’를 마시는 것은 ‘괴물’처럼 추악한 자아를 (갈아)마셔버리는 상징처벌이고, 동시에 대타자를 자신의 내부로 흡수하여 상상적 동일시를 향유하려는 도발이다. “예술이 뭘까요?”란 질문은 절대 던져선 안 되는 불경이고, 그래서 결코 답을 할/알 수 없는 ‘반복회로’이다.

반면 ‘수입 570만원’은 스크린 한쪽 구석에 문자로만 배치된 채 언명조차 되지 않는다. 그만큼 노골적이고 외설적인 실재이다. 주인공은 수시로 메스꺼움을 토로한다. 토할 것 같은 역겨움은 끔찍한 실재를 대면했을 때 느끼는 ‘증상’이다. 실재는 기만적인 현실의 외피를 벗겨내는 폭력으로 현상하기에 구토를 유발한다. 한해 ‘수입 570만원’이라는 수치는 돈의 교환가치를 지시하는 기호가 아니라, 한 사람의 능력과 신분을 자본주의적으로 환산한 지표이다. 국가가 보장한 최저연봉 21,869,760원(2021년 최저시급 8,720원 기준)의 ‘반에 반’에 불과한 저 수치는 제정신으로는 대면할 수 없는 (광기를 유발하는) 실재의 이미지이자, 연극계의 참담한 현실을 외상적으로, 외설적으로 폭로하는 기표이다.

극장을 짓자, 임금을 주자

대타자(연극) 앞에 청렴하고 지고지순한 한 인간이 되어야 하기에 주인공은 극단수입의 ‘n분의 일’을 실천한다. 등골 뽑히고 영혼 털리고 기가 빨리는 연습 스케쥴을 1년에 5-6개씩 소화하는 대한민국 간판급 연출가의 1년 수입이 570만원이다. 이 지표는 대한민국에서 연극(만)으로는 살 수 없음을 입증한다. 이 돈으로 자존과 품격을 겸비한 삶은 언감생심이다. 이것이 얼굴이 화끈거리고 심장이 벌렁대는 대한민국 연극계의 실재이다. 열정을 증명해야 하는 과로경쟁, 즐거운 창작을 압살하는 핏발선 긴장, 결속을 방해하는 이합집산, 성취욕을 꺾는 턱없는 보상 등 ‘수입 570만원’이 내포하는 불필요한 고난과 마찰과 감정소모와 에너지낭비가 없었다면 활동중단도 없었을 것이다.

<김수정입니다>는 애초에 극형식에 담을 수 없거나 허구화가 용납되지 않는 것을 보여준다. 무대에서 현실이 허구로 인지되는 (자연적) 현상, 혹은 현실이 현실로 지각되지 못하는 현상을 (무)의식적으로 거부한다. 현실을 감각하지 못하는, 즉 ‘실감’ 능력이 상실된 무디어짐을 타격하고, 현실을 허구로 오인하지 말라고 성토한다. 그 처절한 성토는 저임금 착취노동과 고강도 혹사노동이 판을 치는 이 21세기 무간지옥의 현실을 냉엄하게 지시하고 있다.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이를 고백할 줄 아는 이이는 용감하다. 치부와 결점을 드러내는 데 서슴없는 그 결단과 기백은 놀랍다. 김수정은 한국연극의 ‘다행’이다. 그녀의 능력과 노력이 증명되었다면, 이제 우리는 그녀에게 극장을 주고 임금을 줘야 한다. 그녀가 상처 없이 아파하도록, 쓰러지지 않고 고뇌하도록, 탈골 없이 전진하도록 최소한의 배려를 해야 한다. 그것이 한 연출가를 구원하는 길이고, 그 구원이 한국연극의 구원으로 이어지는 길이다. 김수정이 나아간 곳이 경계 너머 고립무원의 잉여가 아니라, 영토확장을 위한 표지석이 되고 이정표가 되도록 우리는 판을 깔고 길을 터줘야 한다. 우리에게 (아직, 그리고 여전히) 그녀가 필요하다.

사진제공: ⓒ두산아트센터

* 이 평문은 <한국연극>(2022.01)에 게재된 원고의 재수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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