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십(幾十) 명이 연주하는 파우스트

요한 볼프강 폰 괴테

‘파우스트 (Faust)’

– 임야비(tristan-1@daum.net)

자유기고가, 서울 신포니에타 기획 및 연출

극단 듀공아 / 극단 동맹 연출부 드라마투르그

오케스트라

2월에 이어 3월에도 기십(幾十) 명이 연주하는 오케스트라 곡을 소개한다.

파우스트와 자신을 동일시한 작곡가 프란츠 리스트(F. Liszt: 1811~1886)와 파우스트는커녕 고뇌라고는 눈을 씻고도 찾아볼 수 없는 작곡가 요한 슈트라우스 2세(J. Strauss II: 1825~1899)의 곡을 비교해보자.

청년, 중년, 노년의 리스트
(젊은 파우스트, 메피스토펠레스, 노년의 파우스트가 떠오른다)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인 리스트에 대해서는 2020년 12월 호에 실린 ‘1인(人)이 연주하는 파우스트’에서 자세히 설명했다. (파우스트에 관련된 음악이 많을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이리도 길게 연재하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이 글을 읽다 말고 다시 이전 글을 찾기 귀찮아할 독자를 위해 리스트의 생을 서너 줄로 요약해보자.

일찍이 리스트는 악마에게 영혼을 판 바이올리니스트 ‘니콜로 파가니니’를 자신의 롤모델로 삼아 피아노의 파가니니가 되기로 다짐했다. 흥행에 귀재였던 리스트는 뛰어난 외모, 무대를 사로잡는 쇼맨십, 그리고 천재적인 피아노 테크닉으로 Lisztomania라는 광적인 팬덤을 만들어냈다. 평생 수많은 귀부인들과 염문을 뿌렸지만, 노년에 이르러 돌연 종교에 귀의하여 수도승과 같은 참회의 삶을 살다 폐렴으로 생을 마감했다.

리스트의 인생사를 보면 파우스트 박사와 악마 메피스토펠레스 같은 희곡의 인물이 등장할뿐더러, 파우스트 1, 2부의 스토리 전개와 겹치는 부분이 상당히 많다. 고뇌하는 몽상가 리스트는 75년이라는 자신의 생 대부분을 ‘파우스트’ 더 나아가 ‘괴테’에 빙의해 살다 간 낭만주의자였다.

리스트는 다작(多作)한 작곡가로도 유명한데 천 개에 가까운 작품 중에 괴테 그리고 파우스트에 대한 곡이 없을 리 만무하다. 가장 작은 편성의 곡은 지난 첫 연재에 소개했던 ‘메피스토 왈츠 1~4번’이며, 가장 큰 편성의 곡은 합창까지 포함된 ‘파우스트 교향곡’이다. (약 6개월 뒤쯤 ‘수백 명이 연주하는 파우스트’ 장(章)에서 다룰 예정이다) 이번에 소개할 곡은 ‘기십 명이 연주하는 오케스트라 곡’으로 제목은 ‘레나우(Lenau)의 파우스트에 붙인 2개의 에피소드(Zwei Episoden aus Lenau’s Faust)다.


리스트의 레나우(Lenau)의 파우스트에 붙인 2개의 에피소드 악보 표지

두 번째 곡 ‘Der Tanz in der Dorfschenke (Mephisto-Walzer) – 선술집에서의 춤(메피스토 왈츠)’을 먼저 살펴보자. 리스트는 1856~61년에 이 유명한 멜로디를 주제로 관현악곡을 먼저 작곡했다. 발표 직후, 흥행성을 직감한 리스트는 재빠르게 초절 기교를 요하는 피아노 독주곡으로 편곡한다. 그것이 바로 그 유명한 ‘메피스토 왈츠 1번(S. 514)’다. 그래서 피아노 독주 편곡은 리스트 자신이 무대에서 뽐낼 ‘멋’에 치중했다. 반대로 관현악곡은 오로지 ‘흥’에 집중했다. 메피스토펠레스의 흥겨운 장난에 선술집의 술꾼들도, 심지어 점잖은 파우스트까지도 악마의 리듬에 맞춰 온몸의 관절들이 요동친다.


(L) 제자 바그너, 개(메페스토펠레스)와 산책하는 파우스트
(R) 하르츠 산(발푸르기스의 밤)에 오르는 파우스트와 메피스토펠레스

첫 번째 곡 ‘Der Nächtliche Zug (야행)’은 야상곡(Nocturne)이라는 프랑스어 부제가 붙어있다. 관악기 2관에 호른 4대, 트럼본 3대 그리고 각종 타악기까지 동원되는 편성이 큰 규모의 곡이다. 그런데 리스트는 큰 오케스트라를 앞에 차려 놓고는 굉음 한번 내지 않는다. 총 연주 시간인 15분 내내 거대한 꿈틀거림만이 변주된다.

파우스트 1부를 읽다 보면 유난히 이동 장면이 많다. 대부분 안내자 메피스토펠레스가 요술을 부려 파우스트와 순간 이동을 하게 되는데, 신기하게도 이 ‘순간 이동’은 연극의 암전처럼 모두 밤에 이뤄진다. 리스트는 막과 막 사이, 즉 새로운 장소로 이동할 때 파우스트가 느꼈을 내면을 음표에 녹였다. 마녀들의 축제가 열리는 하르츠 산으로 가기 전, 자신이 건설한 도시에서 눈이 멀기 직전, 젊은 육체로 그레트헨을 유혹하러 가기 전, 사형 선고를 받은 그레트헨에게 가기 전. 파우스트가 막간에 느꼈을 희로애락이다. 희곡에는 쓰여있지 않은 파우스트의 행간 감정을 리스트는 음악으로 표현한 것이다.

리스트는 진정한 Goethemania였다. 리스트에게 파우스트는 ‘남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리스트의 공연 장면


‘야행’은 리스트의 음악 철학이 녹아든 멋진 곡임에도 불구하고 자주 연주되지 않는다. 리스트조차 대중들이 열광하는 ‘메피스토 왈츠’만 여러 버전으로 편곡해 자주 연주했고, ‘야행’은 푸대접했다. 음악이 너무 길고 음침하며 자극적인 요소가 없기 때문이다. 흥행사는 대중을 지루하게 만드는 방해물에 자비가 없는 법이다.

요한 슈트라우스 2세와 당시 파티 문화를 풍자한 캐리커쳐


흥행하면 빠질 수 없는 작곡가가 있다. 바로 ‘왈츠의 왕’ 요한 슈트라우스 2세다. ‘왈츠의 아버지’인 요한 슈트라우스 1세로부터 음악적 자산을 그대로 물려받은 이 흥겨운 천재는 일찌감치 아버지를 뛰어넘어 유럽 최고의 인기를 구가했다. 자신의 악단을 만들어 오스트리아는 물론 전 유럽 순회공연을 다녔고, 멀리 미국까지 건너가 연주를 했다.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강’, ‘빈 숲속의 이야기’, ‘떠버리 폴카’, ‘남국의 장미’, ‘술과 여자와 노래의 왈츠’, ‘봄의 소리 왈츠’, 오페레타 ‘박쥐’ 등 수많은 히트곡을 양산한 요한 슈트라우스 2세는 서양 음악사상 살아생전에 부와 명성을 동시에 움켜쥔 몇 안 되는 작곡가다.

그의 인생은 탄탄대로였다. 춤곡인 왈츠 딱 하나만을 파고든 슈트라우스 2세의 흥행 전략은 대성공을 거뒀다. 그의 재산은 넘쳐났고, 인기는 시들지 몰랐다. 인생의 하루하루가 파티였기 때문에 주변에는 늘 술과 음악 그리고 여자가 흥청거렸다.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황금 동상

걱정이라고는 하나도 없을 것 같은 그도 메피스토펠레스 관련 음악을 작곡했다. 1851년 빈(Wien) 폭스가르텐에서 초연한 ‘Mephistos Höllenrufe (지옥에서 울리는 메피스토펠레스의 외침) op. 101’이다. 자세한 작곡 경위는 알려진 것이 없으나, 허구한 날 가벼운 왈츠만을 썼던 것에 싫증을 느낀 슈트라우스 2세가 조금은 무게 있는 곡으로 폼을 잡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파우스트는커녕 괴테의 다른 작품조차 읽어 본 적 없을 것 같은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메피스토 왈츠’는 어떨까?

요한 슈트라우스 2세 Mephistos Höllenrufe Waltz 음반


서주(시작부터 약 20초 가량)와 두 번째 왈츠 주제(약 2분~3분 사이)에서 불길한 기운이 살짝 감지될 뿐, 8분 내내 경쾌한 왈츠가 반복된다. 음악을 듣다 보면 모두가 너무나 행복하다. 귀부인들의 아름다운 드레스와 최고급 샹들리에가 반짝이는 화려한 홀에는 메피스토펠레스도 없고, 지옥도 없고, 외침도 없다. 늙은 파우스트의 비극과 구원이 끼어들 자리가 아니다. 단지 젊은 파우스트와 그레트헨이 손을 맞잡고 달콤한 사랑의 왈츠 스텝을 밟을 뿐이다. 초연 당시에는 큰 박수를 받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다른 곡들 보다 덜 신나며, 심각하고 거북한 부분이 있다는 이유로 빠르게 인기가 줄어들었다. 시들한 반응을 포착한 흥행사 요한 슈트라우스 2세는 점차 자신의 연주 목록에서 이 곡을 제거해 나갔다. 요한 슈트라우스 2세에게 파우스트는 그저 ‘남의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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