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호, 통재라. 뜨거울 거면 늙지 말든가, 늙을 거면 뜨겁지 말든가.

배선애(연극평론가)

사진 제공: 극단 인어

극장을 나오면서 나도 모르게 한탄의 말이 튀어 나왔다. “저렇게 뜨거울 거면 늙지를 말든지, 늙을 거면 저렇게 뜨겁지를 말든지.” 노년의 사랑에는 완벽히 공감하지만, 지독하게 뜨거운데 그 뜨거움을 감당하기엔 너무 나이가 들어버린 것이, 그래서 너무나 당연하게도 불 보듯 뻔하게 파국으로 치닫는 것이 그지없이 안타까웠기 때문이다. 연극 <화로>(최원석 작·연출, 극단 인어,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 2022년 2월 19일~27일)이야기다. 올해의 창작산실 신작으로 선보인 이 작품은 제목은 물론이고 포스터와 그 속의 문구도 강렬하다. 새빨간 색에 해골이 되어 엉켜있는 두 사람, 그 옆에 “사랑아 입맞춰라 죽음아 타올라라”가 불꽃처럼 적혀 있다. 전작인 <빌미>가 마치 큰 소용돌이 속에 모든 인물을 몰아넣은 차가운 물빛 작품이었다면 <화로>는 새빨간 화로 속에 모든 인물을 넣고 태워버린 뜨거운 불빛 작품이었다. 대체 최원석 작가의 뇌 속에는 어떤 것이 자리 잡고 있기에 이렇게 극한의 상황으로 인물들을 밀어 넣는 것인지, 그리고 그 끝까지를 밀어붙이는 힘은 어디서 나오는지가 무척 궁금했다. 작품을 보고 사람이 궁금해지기는 오랜만이었다.

격정 멜로 신파의 관습들

최원석 연출가 스스로 ‘60대의 격정 멜로 신파’라고 이 작품을 정의 내리는데, 말 그대로 뜨겁고 요동치는 감정의 모든 것들이 조합된 느낌이다. 신파의 핵심은 ‘과잉’이다. 통제하거나 제어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선 감정의 과잉. 그것을 위한 다양한 수단과 장치가 신파를 구성하는 요소일 것이다. <화로>의 과잉을 구성한 것은 무엇일까? 일단은 사랑이다. 60대가 되어서 다시 만난 첫사랑. 사실 작품의 시작인 이 시점부터 개인적으로 공감되지 않아 난감하긴 했는데, 서로가 서로에게 첫사랑이었지만 이런저런 오해로 헤어져 거의 40년 만에 두 사람이 만났다. 첫사랑 시절이 대사로만 언급되어서 두 사람이 얼마나 절절하고 간절하고 진심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어쨌든 40년 만에 만났어도 서로를 알아본 둘은 20대와는 다른 질감의 사랑을 진행한다.

사진 제공: 극단 인어

거리낄 것이 없었던 20대에 비해 살아온 세월이 켜켜이 쌓인 60대가 되니 두 사람의 사랑에 이른바 ‘넘사벽’(넘을 수 없는 사랑의 장벽)이 너무 많았다. 첫 번째 넘사벽은 자식들. 헤어지라며 얼굴에 물 뿌리고 돈봉투 내밀던 부모들을 대신해 자신에게 돌아올 유산을 놓고 결사반대를 외치는 자식들은 더 현실적이고 더 강력해졌고 조금도 자신의 것을 포기할 생각이 없다. 그래서 부모 반대보다 자식들 반대가 더 힘들다. 두 번째 넘사벽은 헤어져 있던 40년 동안의 과거다. 건실한 사업가인 판교는 비교적 과거가 단순했지만 태림가든을 운영하는 태림은 과거가 그 자체로 질척거린다. 장애를 갖고 있어 항상 손길이 필요한 아들, 경제적 이유와 연민으로 행했지만 결국은 장애인 성매매 죄목으로 감옥에도 가고, 그 사이 태림과 사귄 황사철에 의해 딥페이크(deepfake)포르노 영상이 인터넷에 퍼져 극복하기 힘든 인격 테러까지 받는다. 판교를 다시 만나기 이전인 과거에 벌어진 일들이 판교를 만난 이후에 더욱 증폭되어 넘사벽이 되었다. 세 번째는 건강이다. 태림에게는 과거 사연이 발목을 잡았다면 판교에게 다가온 시련은 병이었다. 몸이 점점 굳어가는 루게릭병. 한때 우리나라 드라마의 성공 공식 중 하나인 ‘시한부 인생’이 여기서도 발현된 것이다. 판교의 루게릭병은 두 사람의 불꽃같은 마지막을 함께 한 결정적 계기가 되기도 했지만 인생의 절반 이상을 살아왔음에도 ‘시한부’라는 제한이 주는 애틋함은 공통이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판교와 태림의 넘사벽인 가족, 과거, 병은 신파의 고전적인 요소들로, <화로>에서는 이것을 현대적으로 변용하여 여전히 사랑을 가로막는 장벽 역할을 톡톡히 했다. 공연을 보는 내내 어디선가 본 듯한 것들이 흔하게 발견된 이유도 지금껏 봐왔던 신파의 여러 요소들을 구석구석에 배치했기 때문이다. 연극 <화로>는 사랑을 둘러싸고 100년의 세월 동안 연극 무대 위에서 반복해온 신파의 과잉 요소들을 더욱 극단으로 설정하였음에도 그 흐름을 따라가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이게 신파의 힘인지 두 사람의 사랑의 힘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사진 제공: 극단 인어

과잉보다는 과장이 앞섰던 무대

격정멜로는 인물들의 관계와 성격에 좌우되는 바, 기실 무대는 그냥 거들기만 할 뿐이다. <화로>의 무대는 거드는 것에 머물지 않았는데,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그 양상은 과장으로 나타났고, 그 효과는 회의적이었다. 우선, 태림가든이 서울 근교에 자리 잡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 많은 고양이들을 굳이 코러스로 활용할 필요가 있었는지는 의문이다. 중간중간 강조할 대사를 위해 인물에게 마이크를 대주고, 사랑의 행위를 실체화하기도 하며, 트렘폴린 위에서 거대하게 세운 벽면을 오가는 기예를 보여주기도 했으나, 코러스들은 판교와 태림의 갈등과 관계 진전에 크게 기여한 것이 없었고 오히려 시선을 산만하게 흩어놓았다. 코러스를 사용할 것이면 더 효과적으로, 더 기능적으로 활용하는 방법을 조금 더 고민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사진 제공: 극단 인어

두 번째는 대극장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려다보니 채우는 것이 더 많았다는 점이다. 커다란 식당 테이블의 활용은 아이디어가 돋보였고, 태림가든과 아파트 등 공간 이동을 위해 영상 등을 활용한 것도 괜찮았다. 그러나 마지막에 판교와 태림이 차를 타고 달리는 장면은 너무 많은 것들이 무대에 들어와서 두 사람의 불꽃같은 마지막에 집중하기 어려웠다. 무대 뒤 큰 화면의 영상을 봐야할지, 큰 철제 무대 아래에 설정된 자동차 안의 두 배우를 봐야할지,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코러스들을 봐야할지 결정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또한 판교가 10층에서 떨어지는 장면 연출은 큰 웃음을 유발했는데, 떨어지고 있는 판교 옆을 날아가는 새가 그러했다. 추락에 대해 그런 아이디어를 내는 것은 기발하다고 생각했으나 이 작품의 지향이 B급 감성은 아니었기 때문에 이 역시 과장된 무대연출에 해당한다.

60대로 보이지 않았던 이유정 배우도 과장 중 하나에 포함될 수 있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이 작품을 보면서 이유정 배우와 그 연기를 무척 그리워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고 그래서 무척 흡족했지만, 그것과는 별도로, 두 사람의 뜨거움을 보고 있으면서도 60대의 느낌은 크지 않았던 것이다. 배우와 연출도 그 점은 잘 알고 있었을 터, 분장을 과하게 하지 않은 것에서 그 의도를 읽을 수 있는데, 어차피 분장으로 가려질 것이 아니라면 이건 약속이 전제된 연극이니 그냥 밀어붙이자는 선택을 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 용기 있는 선택은 항상 응원하지만 건강하다못해 너무 젊은 60대의 뜨거움은 모호함을 안겨준 것이 사실이다.

무대가 최원석 작가·연출가의 전작인 <변태>처럼 보다 더 건조하고 간단했다면 뜨겁게 휩쓸리는 인물에 더 집중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만약 이 작품을 소극장에서 공연했다면 판교와 태림의 사랑, 그 절절함과 뜨거움에 완벽히 집중하고 몰입하지 않았을까? 그래서 그들의 마지막, 불구덩이 속에서 하나가 되어 생을 마감하는 그 완벽한 결말에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치지 않았을까? 과장보다는 신파에 맞는 과잉의 무대를 지향하는 것이 어떨지 제안해본다.

사진 제공: 극단 인어

60대라고 뜨겁지 않으란 법 없다. 나이는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숫자를 늘려 가는데, 그럼에도 마음은 항상 20대라는 것이 신기하고 놀랍기 때문에, 그 마음이라면 뜨거운 사랑쯤 아무 것도 아닐 것이다.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걸 정도로 뜨거운 사랑, 인간은 젊으나 늙으나 그런 열정이 있는 존재라는 작가의 믿음이 뜨거운 불을 품고 있는 단단한 화로만큼 굳건한 작품이었다. 관절염 때문에 빨리 달리지도 못하고, 노안이라 더 자세히 들여다봐야 하고, 기억력은 자꾸 감퇴해 사람 이름 떠올리기가 너무 어렵고, 그래서 잃어가는 것들이 너무 많아 억울하다고 생각되는 노년이지만, 마음은, 열정은, 그 뜨거움은 잠깐 잊었을지언정 결코 잃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연극 <화로>는 말해주고 있었다.

그런데 문득, 그렇게 뜨거운 걸 스스로 견딜 수 있을지 궁금해졌다. 20대의 열정은 그걸 견딜 수 있는 튼튼한 몸이 있었는데, 이렇게 낡고 고장나고 있는 몸은 그 뜨거움을 견딜 수 있을까? 오히려 몸과 괴리된 뜨거움은 더 괴로운 것이 아닐까? 그래서 탄식이 절로 나온 것 같다. “뜨거울 거면 늙지 말든가, 늙을 거면 뜨겁지 말든가.” 늙는 것도 안타깝고, 그럼에도 뜨거운 것도 안타깝다. 이래저래 인생은, 사랑은 그 자체가 참 안타까운 것인가 보다. 개인적으로, 만약 첫사랑을 다시 만난다면, 필자는 분명히 알아보지 못할 것이고, 알아보고 싶지도 않을 것 같다. 젊고 아름다운 얼굴로만 기억하고 싶어서 세월의 흔적 따위 인정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더 크기 때문이다. 우연이라도 마주치지 않기를, 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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