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와 윤리의 대위법적 몽타주

서울시극단 <불가불가>

백승무(연극평론가)

각색을 옹호한다

웨인 부스가 창안하고 시모어 채트먼이 전파한 ‘내포작가’ 개념은 ‘실제작가’의 불완전성 때문에 성립한다. 작품의 총체성과 완결성을 기획·통제하는 원리의 화신으로서 내포작가는 편견과 편향, 혹은 일상과 세속잡사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생활인으로서 실제작가와는 다를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내포작가는 때로 실제작가를 배신하기도 한다. 보수 왕당파 지지자였던 발자크가 봉건귀족의 몰락과 공화정의 도래를 진단한 <고리오 영감>을 집필하거나, 종교적 국수주의자였던 도스토옙스키가 <카라마조프家의 형제들>에서 무신론자와 서구주의자를 더 매력적으로 그린 경우가 이에 해당한다. 실제작가의 (사상적) 자기실현 욕망은 내포작가의 준엄한 예술성 원칙과 시대정신 앞에서 하염없이 스러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극작가의 경우, 문학적 완결성을 주관하는 내포작가1과 희곡의 무대화를 상상하는 내포작가2로 세분된다. 희곡은 집필로 그 소명이 종료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좋은 희곡은 내포작가1과 내포작가2의 협력과 경쟁, 혹은 대결로 탄생한다. 가상의 연출가로서 내포작가2는 사실상 실제 연출가와 공모하는 존재이다. 극작가의 집필이 완료되면 그 희곡은 내포작가2의 것이 된다. 이때부터는 무대화가 관건이다. 저작권을 가진 극작가와 문학성을 담지한 내포작가1은 ‘저자의 죽음’ 목록에 이름을 올린다. 이제 내포작가2와 결탁한 연출가가 희곡 해석의 전일한 의지(意志)가 된다. 때로는 극작가의 비판에 움찔할 수도 있고, 내포작가1의 문학적 저항에 직면할 때도 있다. 하지만 연출가가 읽어야 할 텍스트는 내포작가2의 것이고, 그것이 ‘작가’의 의도에 충실한 무대화이다.

무릇 모든 공연은 (원작 충실도와 무관하게) 일정 정도 각색이다. 심지어 토시까지 준수한 공연도 결국 각색이고, 극작을 병행한 연출가의 공연도 각색이다. 그렇다면 각색 논쟁은 정도의 문제에 천착해야 한다. 어느 정도의 각색이고, 어떤 각색인가의 문제 말이다.

리듬을 머금은 행위와 발화

이철희의 <불가불가>가 보여주는 가장 큰 매력은 물 흐르듯 유연하고 매끄러운 리듬감에 있다. 배우의 화술, 대사 교류 방식, 장면의 전환 등 미시단위에서 거시단위까지 음악적 구조를 체현한다. 배우들은 TV사극의 화술을 양식화하면서도 속도와 음고를 높인 어조를 통해 역사극의 고루함과 헐거움을 벗어낸다. 배우 간 반응시간도 후반부로 갈수록 점점 더 짧아지면서 긴장감을 고조시킨다. 장면전환도 정확한 시점에 적절한 간격으로 이뤄지고, 배우들의 자연스러운 대화가 윤활유처럼 그 속을 채운다.

음악의 주된 속성인 리듬이 배우의 화술과 연출가의 무대기법을 통해 발현될 때, 관객은 부분들을 결합하여 하나의 장대한 리듬의 세계를 구축한다. 개별 장면의 음악적 구성으로 시작된 리듬의 법칙은 반복과 변주의 이음새를 연결하여 하나의 총체적 세계상을 그리도록 유도한다. <불가불가>에 녹아든 장면전환의 유려함과 리듬의 치밀함은 정확한 정지자세와 초단위의 시간배분을 요구하는 ‘연출가’의 지시 장면을 통해 패러디되기도 한다.

이렇게 음악적 흐름과 리듬이 갖춰지면 관객은 보다 쉽게 몰입·집중·동화를 체험할 수 있다. 그래서 스타니슬랍스키도 템포-리듬에 대한 절대음감을 가진 배우를 양성하길 꿈꾸었고, 메이예르홀트는 음악이 무대행위를 발생시키는 토대라고 주장했으며, 니체는 무대행위와 언어가 음악이라는 바다가 일으키는 파도라고 설파하기도 했다. 1인 코러스 기능을 담당한 구음 배우와 알콩달콩한 ‘커피송’의 경쾌한 이완도 음악성을 부추기는 조력자들이다.

은유와 몽타주

악보와 공연은 동일한 원리로 써진다. 세로줄로 구획된 하나의 마디가 이어져서 단락을 이루고, 이것이 뭉쳐서 악장을 형성하고, 악장이 모여 하나의 공연을 완성한다. 희곡 <불가불가> 자체가 그러한 결합 원리로 만들어졌다. 각각 다른 시대, 다른 인물로 구성된 배우군이 몇 개의 단락을 반복적으로 연습하면서 하나의 악장을 만들어간다. 공연 <불가불가>는 배우들의 자체 연습을 다루는 전반부 1악장, 연출의 등장 이후 이어지는 중반부 2악장, 그리고 배우1의 돌발행동이 발생하는 후반부 3악장으로 구성된다. 공연의 마디를 이루는 에피소드는 계백장군과 부인 장면, 무신정변, 을사늑약, 10만 양병설 논쟁, 병자호란 등 다섯 장면이 있고, 여기에 고문당하는 독립군 장면이 3악장에서 추가된다.

1악장의 연습은 마치 일부 선별된 장면 연기처럼 보이지만, 연출가가 임석한 2악장을 보면 공연 형식 자체가 역사적 사건들의 짜깁기임을 알게 된다. <불가불가>는 인과성이 약한 개별 장면들의 연결이라는 점에서 역사적 몽타주이고, 그 장면들이 선택된 내적 맥락을 유추해야한다는 점에선 은유 놀이라고 할 수 있다. 에피소드 결합원리로서 몽타주는 상이한 장면들의 결합을 통해 의미론적 폭발을 일으켜 새로운 인식단계로의 도약을 지향하고, 에피소드 선택원리로서 은유는 개별 장면의 의미와 상호연관성에 관한 궁금증을 증폭하는 수수께끼로 기능한다.

은유와 몽타주의 불꽃 튀는 화학작용은 배우1이 배우5에게 칼부림을 하는 순간, 정점에 이른다. 살인사건으로 비화될 지도 모를 그 칼부림에 대해 어떤 부연 설명도 없다. 빈 공간! 논리적 정합성이 파쇄되면서 발생한 그 빈 공간으로 자유로운 연상과 추론의 회오리가 급속도로 유입된다. “어서 나가요”라는 연출가의 마지막 대사에 자리를 뜨는 관객의 행위는 공연의 마지막 퍼즐이다. 몽타주가 완성되고 은유의 수수께끼가 마침표를 찍는 순간이다.

푸가적 리듬

은유와 몽타주의 음악적 체현물이 바로 푸가(fugue)이다. 첫 장면을 개시한 배우1과 배우14의 계백장군 에피소드는 작품의 주제부로 제시된 후 모방대위법적 형식으로 끝까지 변주된다. 대주제(對主題)에 해당하는 다섯 에피소드는 대위법적 위치에서 주제부의 메시지를 발전·심화시키며 나아간다. 모방, 반복, 확대, 축소를 대위법적으로 이어가는 푸가처럼 <불가불가>의 에피소드들은 점점 더 완성된 형태로 확대되다가 후반부에선 압축적 형태로 축소되며, 이러한 양상을 모방과 반복의 단락으로 충당한다. 푸가적 형식은 그 자체로도 흥미진진하거니와 반복적으로 변주되는 주제부의 멜로디와 리듬에 관객이 쉽게 동화될 수 있다. 리듬에 올라탄 관객은 그 리듬의 변화에 적극적으로 반응한다. 심장과 마음이 움직인다는 말이다. 리듬이 미적 지각의 가장 고상한 속성이기 때문이다(호이징가). 풍부한 리듬의 공연이 명작인 것은 아니지만, 명작은 반드시 리듬이 넘친다.

허구에 갇혀버린 정치성

다시 첫 질문으로 돌아와, 이철희 연출의 각색은 성공인가? 연습실의 풋풋한 웃음과 희극적 장면의 그로테스크한 강조, 그리고 리듬감을 살려내는 음악적 구성법은 흠잡을 데 없다. 그런데 피날레가 가슬가슬하다. 원작은 연극적 환영(illusion)이 붕괴된 후 연출가가 관객과 생경하게 대면하는 장면으로 종결된다. 예기치 못한 칼부림으로 인해 연극적 약속이 순식간에 증발하고, 그 진공으로 현실의 질서가 몰려온다. 진공의 무대에 현실이 침범할 때 발생하는 폭발적 역류현상(backdraft)이 원작의 주안점이다. 하지만 이철희의 <불가불가>에서 배우1의 칼부림은 연극의 일부이자 무대행위로 가공된다. 인물들은 천연덕스레 커튼콜을 연습한다. 즉, 공연은 익명의 역사극(ⓐ)을 연습 중인 이현화의 <불가불가>(ⓑ)를 올리는 한 극단의 리허설(ⓒ)을 액자화한다. ⓑ가 ⓒ에 의해 극중극으로 상대화되면서 ⓑ의 피날레가 가졌던 살인사건(?)의 위중성은 약화되고 만다. 현실과 허구를 분별 못한 한 배우의 우발적 칼부림이라는 사건성은 경감되고 관객의 혼란도 희석되는 것이다. 칼부림은 현실로 침투하지 못하고 무대 장벽에 갇힌 채 허구로 주저앉는다. 치열한 정치적 논쟁을 그리는 에피소드들을 보라. 당시 정치인 것이 지금은 역사라면, 지금 역사인 것을 다시 정치화하는 것이 이 희곡의 매력이다. 하지만 원작이 가진 정치성은 후퇴하고 만다.

또한 텍스트 간 침윤현상이 생략된 것도 아쉬운 대목이다. 마지막 독립군 고문 장면은 계백장군 장면과 배우5가 등장하는 4개의 에피소드가 깔때기처럼 응집하여 새로운 의미를 배태하는 용광로가 된다. 여기서 청국의 속국 운운하는 을사늑약의 대사와 계백장군·부인의 대사가 침윤하고, 바로 이때 독립군을 연기하는 배우1는 광기의 상태에 진입한다. 반복·변형·압축을 겪던 텍스트들이 배우1의 몸과 정신을 횡단하며 교차·침윤할 때, 상이한 시공간을 꿰뚫는 역사적 진실과 개인의 윤리가 칼부림으로 발화(發火)하는 것이다. 텍스트에서 보이는 것이 무대에서 행위화·의미화되지 못한 것은 유감스러운 지점이다.

고전은 만들어진다

풍부한 성량에 유연한 신체, 탄탄한 기본기의 연기 테크닉을 보유한 배우들, 그리고 그들의 기량과 매력을 돋보이도록 미장센을 만들고 리듬을 창출할 줄 아는 연출가의 결합은 연극예술의 존재이유를 석명할 묵직한 근거가 된다. 자유로운 상상과 다양한 연상을 촉발하는 희곡 <불가불가>의 탁월한 문학성이 그 근거의 맹아였음은 말할 것도 없다. 이런 공연이 자주, 그리고 오랫동안 무대에 올라가고 온갖 각색과 오마주가 넘쳐날 때, 우리도 고전을 갖게 된다. 숨어있는 현대희곡을 발굴하겠다는 서울시극단의 기획은 그래서 간절하다. 창작극 맹신주의에서 벗어나 연극을 연극답게 매만질 때 고전은 탄생한다. 장기 공연을 위한 레퍼토리시스템은 그 징검다리가 될 것이다.


본 기사는 <한국연극> 5월호에 실린 비평문을 재수록한 글입니다. <오늘의서울연극>(TTIS)은 좋은 글이 널리 퍼질 수 있도록 재수록 정책을 실시하고 있습니다. 더 많은 독자가 연극비평을 접해서 건강한 관극문화가 꽃피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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