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기둥에서 뻗어나온 가지 끝 여린 것의 진실

김소연_연극평론가

페르소나. 화제의 연극을 직접 무대에 선 배우와 함께 구석구석 살펴봅니다. 배우와 함께 나누는 캐릭터, 연기, 연극 이야기.

<공포가 시작된다>는 3.11 동일본대지진 이후 후쿠시마 원전에서 일하는 노동자들과 그 가족들의 이야기다. 연극의 무대는 고인이 된 타케루의 상을 치르고 있는 그의 집 거실이다. 서랍장, 불단, 위패, 향, 전화기, 좌탁 등등이 차려져 있다. 무대 한가운데에 있는 이 거실은 바닥에서 높이를 두고 올려져 있는데, 사방을 빙 둘러 빈 공간을 두었다. 소박하고 평범한 거실을 차려놓은 무대와 횡 하니 비여있는 사방의 빈공간이 대비되면서 이 평범한 듯한 거실이 섬처럼 떠 있는 것 같이 불안하다.

연극은 이 방을 둘러싸고 있는 빈 공간에서 시작된다. 어슴프레한 희미한 빛이 들어오면 머리부터 발끝까지 감싸고 있는 흰 작업복을 입은 노동자들이 빈 공간에서 일하고 있다. 숫자들과 경보음이 급박한 분위기를 자아내면서 오프닝 장면은 곧 마무리된다. 이제 무대 한가운데 평범한 가정집 거실을 비추는 조명이 환하게 켜진다. 예를 갖춘 듯 검은 정장을 입은 한 여자와 이 집의 주인인 듯 한 또 한 여자가 마주 서 있다. 히사코와 무쓰미다. 무쓰미의 남편 타케루는 얼마 전 세상을 떠났다. 내일이 그의 49재다. 히사코의 남편 카쓰히로는 타케루와 같은 작업장에서 일했다. 히사코는 오늘이 타케루의 49재인 줄 알고 찾아왔는데, 49재는 내일이다. 히사코는 큰 실례를 범했다고 여러 차례 인사하고, 무쓰미는 괜찮다고 차라도 마시고 가라고 권한다. 노동자의 두 아내들은 남편의 죽음, 남편 동료의 죽음으로 만나게 된 것이다.

연극은 두 노동자의 아내의 만남으로 시작되고 전개된다. 히사코는 연신 사과를 하면서도, 타케루의 피폭이 어느 정도였는지, 그것이 그의 죽음의 직접적 원인인지, 산재를 신청할 것인지 등등 궁금함을 감추지 않고 묻는다. 무쓰미는 히사코를 정중히 대하지만, 그녀는 마치 딴 생각에 빠져있는 듯 자꾸 대화를 놓친다. 그리고 이들 대화 사이사에는 과거의 시간과 공간이 끼어든다. 원전에서 일하고 있는 타케루와 동료들, 원전 작업의 위험을 두고 벌어지는 타케루와 딸 히요리의 갈등, 급격히 건강을 잃어가던 타케루의 모습. 타케루와 무쓰미만이 아니다. 히사코와 카쓰히로 그리고 그들의 아들 쇼타도 갈등을 겪고 있다.

이 과거의 시간과 공간은 스스럼 없이 현재의 장면에서 그대로 이어지고 겹쳐져 있다. 마치 상대는 알 수 없는 각자의 상념처럼, 그리고 그녀들 둘 모두 알 수 없었던 남편들의 작업장의 이야기처럼. 이야기만을 놓고 보자면 이 연극은 원전에서 일하던 노동자가 피폭으로 죽음을 맞은 이야기다. 현재의 시간은 타케루의 죽음으로 시작되고 과거의 시간은 타케루의 죽음을 향해 전개된다. 연극은 타케루의 죽음에 대한 연극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연극은 무대 위 타케루의 제단이 차려져 있는 거실이 한 가운데에 놓여 있고 타케루의 죽음 이후에서 시작된다. 연극의 현재는 타케루의 49재 하루 전날과 타케루의 49재가 끝난 날 밤이다. 현재의 시간은 무쓰미와 히사코의 시간이고 과거는 이 현재의 시공간에 스스럼 없이 잇대어 있고 겹쳐지는 것이다. 이것은 장면전환을 위한 연출적 고안일까. 혹은 타케루는 어떻게 죽었는가 하는 추리극적 긴장을 위한 드라마트루기일까.

그러나 타케루의 죽음은 복잡한 사건들의 전개에서 비롯되는 것은 아니다. 현재에 잇대어 불러들여지는 과거의 장면들에서 타케루는 휴게실에서 동료들과 웃고 있다. 그들의 왁자지껄한 수다스러움은, ‘20’이라는 피폭지수와 연관된 것인데 위험한 노동에 대한 불안과 의심을 다독이기 위한 서로가 서로에 대한 격려이다. 이러한 태도는 현실에 대한 안이하고 어리석은 이해와 대응이라고도 할 수 있다. 타케루와 딸 히요리의 갈등도 그렇다. 히요리는 원전에서 아빠와 함께 일하고 있는 약혼자 류세이가 일을 그만 두기를 바란다. 타케루는 류세이가 일을 그만둔다면 결혼하지 말라며 화를 낸다. 무대를 지켜보고 있는 이편에서 보자면 위험은 너무 자명한데 타케루는 왜 저렇게 완강할까.

중년의 가장인 타케루와 카쓰히로, 그들의 젊은 동료들인 류세이, 타쿠미 등도 위험을 모르는 것이 아니다. ‘20’이라는 피폭지수가 정말 안전한 것인지 의문이고, 경비 절감을 위해 마스크를 더 싸고 덜 안전한 것으로 교체하는 회사의 대책에 분통을 터트린다. 그러나 이들이 ‘위험’에 고개를 돌리는 것은, 원청 하청으로 얽혀 있는 노동구조와 원전 사고 이후 삶은 파괴되어 이주민이 되었고 이 위험한 원전말고는 일자리마저 부족한 완강한 현실이 놓여 있기 때문이다. 타케루는 국가에 대한 헌신과 고향을 복구한다는 자부심으로, 불안해 하는 가족들 앞에서 자신의 노동을 정당화 한다. 아내 히사코는 일을 그만두어야 한다고 하지만 가족을 부양해야 하는 카쓰히로 역시 회사의 말을 믿고 일하는 것 말고 다른 선택은 없다고 생각한다. 타쿠미는 결국 일을 그만두지만 불안한 삶은 계속된다.

회피와 불안은 타케루의 죽음 이후에도 마찬가지이다. 이 연극은 타케루의 49재를 하루 앞둔 날 시작된다. 날짜를 잘못 알고 찾아온 히사코는 남편의 위험한 노동에 불안해하며 생명보험을 들고 무쓰미에게 산재보상에 대해 이것저것 묻는다. 히사코와 달리, 그리고 딸인 히요미와 달리, 무쓰미는 타케루의 일에 대해 타케루의 말에 대해 별다른 반대를 보이지 않았다. 남편의 죽음 앞에서도 무쓰미는 산재 신청에 머뭇거린다. 산재 신청을 하지 않겠다는 타케루의 고집을, 지금 그가 없다고 꺾을 수 없다는 걸일까.

<공포가 시작된다>는 후쿠시마 원전 복구사업에 투입된 노동자들의 생생한 현실을 보여준다. 위험에 대해 국가도 회사도 책임지지 않는 현실이자 죽음에 이르는 위험 앞에서도 일하고 있는 노동자들의 현실이다. 연극은 이러한 부당한 현실에 대한 고발이라는 것을 감추지 않는다. 그러나 부당함을 드러내기 위해 위험 앞에서도 일을 멈출 수 없는 노동자들의 현실을 비참함이나 어리석음으로 그리지는 않는다. 죽음 이후에서 시작되는 연극은 죽음에 이르렀던 과정을 되짚는다. 그리고 이 부인할 수 없는 현실 앞에서도 남겨져 있는 선택과 결단을 그려간다. 무쓰미는 억지라는 것을 알면서도 타케루를 막지 못한다. 그리고 막지 않는다. 가부장적인 남편에게 순종적인 아내이기 때문일까. 사랑 때문일까. 연극은 무쓰미가 어떤 결정을 내릴지 알 수 없는 상태에서 막을 내린다. 연극은 부당한 현실만이 아니라 그 부당한 현실을 살아내야 하는 ‘사람들’, 부당한 현실 앞에서 결정을 앞에 두고 애쓰고 있는 ‘사람들’을 그린다.

타케루의 죽음 이후에서 시작되는 연극을 이끌고 가는 인물은 타케루가 아니라 무쓰미다. 타케루의 49재를 하루 앞둔 연극의 현재는 무쓰미의 시간이다. 그러나 연극은 무쓰미가 겪고 있는 죽음 이후의 시공간에 타케루의 시공간을 계속 겹쳐놓는다. 그래서 마치 무쓰미의 현재와 타케루의 과거가 뫼비우스의 띠의 안과 밖처럼 맞붙어 있다.

한 인간이 겪고 내고 있는 삶의 그자리

김소연: 지난 해 초연에 이어 이번 서울연극제 참가가 재공연이다. 재공연은 어땠나. 배우들은 재공연하는 걸 재미없어 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도 있다.

김용준: 대부분 초연만 못하다는 소리를 들어서 그런다. 그런데 이번 공연은 관객들도 많이 찾아주고 공연이 좋아졌다, 제목하고 연관성을 알겠다, 배우들이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게 자기 목소리를 내는 것 같다, 공연의 밀도가 좋아졌다, 그런 이야기를 들었다. 작년에는 엄청 집중해서 했다. 노동자들 역할이라고 공연 전에 전부 다 땀이 흐를 정도로 뛰고 그랬다. 이번에 슬렁슬렁했다는 건 아닌데, 작년보다 편하게 접근했던 것 같다. 그래서 우리끼리는 이상하다, 우리가 한 것보다 더 칭찬을 받는 것 같다 그랬다.

김소연: 초연도 좋았는데 이번 공연도 좋았다. 재공연을 보면서 제목의 의미가 크게 다가왔다. 연극이 결말에 도착했을 때 ‘공포가 시작된다’는 느낌이 갑자기, 불현듯 다가왔다. 초연에서는 원전 하청 노동자들의 공포스러운 현실을 모르고 있는 사람들에게 그 상황을 보여주고 있구나 하는 느낌이었다면 이번 공연에서는 결말에 이르면 계속 부인해왔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다는, 더 이상 회피할 수 없다는 것이 강렬하게 다가왔다. 제목처럼 공포가 시작되는 것 같았다. 어떤 변화가 있었던 건가.

김용준: 잘 모르겠다. (웃음)

김소연: 번역하는 이시카와 주리가 일본 공연 리뷰가 실린 링크를 보내주었다. 일본 공연은 코미디였던 것 같은데, 극단 산수유 공연은 초연도 그렇고 이번 공연도 그렇고 코미디는 아니었다. 하지만 이번 공연에서는 객석에서 웃음도 자주 터지고, 또 인물들이 더 활기있고 상황의 우스꽝스러움이 더 잘 드러났던 것 같다.

김용준: 웃음을 만들겠다는 것은 아니었다. 초연에서는 인물들이 겪고 있는 어려운 상황, 어려운 처지를 ‘내 상황으로’라는 깃발이 있었다면, 이번에는 어려운 상황인데 어려움 속에서 인물들이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점에 더 집중했던 것 같다. 살아가면서 맞부딪치는 소소한 상황들이 좀 더 잘 드러났던 것 같다. 대화가 살짝 뜨기도 하고 그런 순간들.

김소연: 그렇다. 살짝 뜨고 엇나가고 그래서 어쩔 줄 몰라서 당황하고 이런 것들이 잘 보였다.

김용준: 초연을 준비할 때는 원전 노동자들에 대한 다큐멘터리도 보고 상황을 이해하려고 엄청 노력했다. 그러니까 거기서 살고 있는 사람은 그렇지 않을텐데, 우리는 그 바깥에서 들여다보는 거니까 함부로 말할 수 없고, 함부로 대할 수 없고 이런 것들이 있었다.

김소연: 희곡 자체가 여기 이렇게 엄청나게 고통받는 사람이 있다고 고발하는 그런 전개는 아니다. 물론 잘 알려지지 않은 현실을 드러내는 것이 있고 관객들은 그 현실을 마주대하면서 충격을 느끼게 되지만 말이다. 그런데 연극은 고통을 그리기보다는 그 어려움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그리는 것 같다. 그러다보니 회피하는 것 같고 어리석은 것 같기도 하다. 예를 들면 타케루는 산재 신청을 안 하겠다고 하고, 무쓰미 역시 내내 고민하고 있다. 자칫 그런 모습이 어리석게 보일 수도 혹은 비참함에 대한 연민으로 보일 수도 있는데, 만들면서 고민이 많았을 것 같다.

김용준: 초연을 준비하면서 여러 의견이 있었다. 희곡이 인물들에 대해 명확한 이유를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이번에도 고민이 많았다. 서로 해석하는 것도 많이 달랐다. 우리 안에서 모아진 이야기는 이거다. 타케루도 그렇고 모두들 위험을 알면서 일을 했던 거다. 타케루나 무쓰미가 산재 신청을 두고 망설이는 것은 재해라고 스스로 받아들여지지 않기 때문이다.

김소연: 그건 이해받을 수 있는 태도나 생각은 아닌 것 같다. 산업재해는 노동자가 위험을 알고 있었느냐 아니냐가 아니라, 노동환경이 안전하냐 그렇지 않냐의 문제다.

김용준: 연극에 원전 노동자 피폭 문제를 취재하고 있는 기자가 나온다. 아무리 소량이라도 방사능에 노출되면 위험하다는 르포 기사를 준비하고 있는데, 타케루의 죽음은 자기가 준비하고 있는 기사의 사례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회사가 말했던 것과 달리 기간을 다르게 놓고 보면 타케루는 위험한 수준에 노출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기자는 엄청 바쁜 와중에 무쓰미를 찾아와 이 이야기를 해준다. 타케루도 위험을 알았을 것 같다. 위험을 알면서도 바보 같은 길로 간거다. 섶을 지고 불로 들어가는, 뜨거운 줄 알면서도 손 갖다 대는 그런 지경인 거다.

김소연: 원전 노동자의 현실에 대한 충격이나 안타까움도 있었지만 위로가 다가왔다. 희생자의 처참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도 아니고 비판적 주장을 내세우는 것도 아니다. 어떻게 보면 이 연극에 등장하는 노동자들은 타협하고 손해를 감내한다. 사실 많은 사람들의 삶이 그렇다. 그런 보통 사람들의 삶을 정성껏 그려내는 게 고마웠다. 국가나 기업이 정치적 책임을 회피하고 이윤을 얻기 위해 노동자를 죽음으로 몰아넣고 있는 현실은 당연히 비판하고 반대해야 한다. 그런데 그 위험 속에서 일하는 사람들, 일하고 죽어가는 사람들을 이렇게 희생당했습니다라는 어떤 고발을 위한 게 아니라 그 사람들의 삶을 보여주고 있는 게 위로가 되었다. 그러고 보면 극단 산수유의 <후회하는 자들>도 비슷한 점이 있다. 성전환 수술을 했다가 다시 이전 성을 되찾는 두 사람의 이야기다. 트랜스젠더에 대해서 우리 사회가 너무 말도 안 되는 지점에서 논쟁을 하고 있다 보니 좀 더 내밀한 삶의 이야기를 꺼내기가 어려운 점이 있다. 개인의 삶으로 보면 이런 선택도 있을 수 있고, 후회도 있을 수 있다. 삶의 여러 과정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런데 정치적으로 너무 대결 국면이다보니 그런 속 깊은 이야기를 꺼내기가 어렵다.

김용준: 그 작품 할 때 공연팀도 걱정했다. 성전환을 자연과 건강을 해치는 일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한테 이용되기 딱 좋은 소재다. 그런데 오히려 공연이 오르고 나서는 트랜스젠더나 성소수자들의 반응은 우리 마음길을 그대로 쭉 그려주어서 고맙다는 것이었다. 수술할 때, 수술하고 나서 새로운 성으로 살 때, 다시 돌아오고 싶었을 때, 다시 수술하고 나서 불안했을 때 등 딱 그 자리에 그 모습으로 있는 것만으로도 위로, 이해, 접근, 소통 그런 게 되는 것 같다. 오히려 바깥에 있는 사람들이 걱정하는 거다. 그 작품을 하면서 어떤 구도나 주제로 파악할 게 아니라 그 사람이 느끼고 겪었던 이야기를 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김소연: 정치적 이슈를 다루더라도 한 인간이 겪어내고 있는 삶을 그리는 것이 중요한 것 같다. <후회하는 자들>도 그렇고 <공포가 시작된다>도 그렇고 우리 사회의 첨예한 정치적 이슈를 다루는데 논쟁의 쟁점에서 좀 떨어져서 전개된다. 정치적 쟁점을 외면한다는 것이 아니라 첨예한 쟁점의 한복판에 있는 이들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그 쟁점을 보여주는 것만이 아니라 그 한복판에서 삶을 살아야 하는, 살고 있는 사람들을 그린다는 거다. 그러다 보니 인물에 더 섬세하게 접근해야 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자칫 쟁점을 회피하는 것으로 보일 수 있으니까.

김용준: 시대정신이 분명히 있다. 그런데 두 작품을 보면 그런 큰 기둥, 큰 흐름에서 약간 벗어나 있는, 오해받을 수도 있는, 큰 기둥의 곁가지 같은 이야기다. 그런데 그런 곁가지가 많이 있어야 큰 기둥도 제대로 드러날 수 있는 것 같다. 어쩌면 우리가 하는 연극은 딱 한사람의 이야기인 것 같다. 큰 기둥이 되는 사람이 아니라 거기서 뻗어나온 가지랄지, 새순이랄지, 아니면 약한 가지랄지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같다. 우리 아니면 할 수 없고 또 그런 것들이 있어야 전체가 드러나는 것 같다. 그걸 그려내는 것이 재미이기도 하고 힘든 것이기도 하다. 큰 기둥은 사회적 분석이 되어 있는 거니까.

마음을 진짜처럼 먹으려면

김소연: 그럼 그 흐름에서 뻗어나와 있지만 약간 벗어나있는 가지, 그것의 진실은 어떻게 찾는가. 큰 흐름은 사회적 분석도 있고 논쟁도 많지만 그 가지 끝의 여린 것의 진실은 어떻게 발견하고 어떻게 그걸 무대 위에서 그려내는지 궁금하다.

김용준: 그게 항상 힘들다. 그런데 그게 정말 재밌다. 연기에 대한 나의 공부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다. 책도 보고, 다른 사람 연기도 보고, 내 연기에 대해서도 생각해보고 그러는데, 결국은 마음인 것 같다. 마음을 진짜처럼 먹으면 잘했다는 평가를 받는 것 같고 마음이 진짜가 아니면 관객들에게 다가가질 못하는 것 같다. 그래서 마음을 진짜처럼 먹는 기술이 필요하구나 했다. 그런데 그 기술을 가르쳐주는 책은 없는 것 같다. 혼자 궁리하고 그러면서 생각한 것이 무대 위에서 어떻게 하면 평범해질 수 있을까이다. 무대는 부자연스럽고 어색하다. 여러 사람들이 다 나를 쳐다보고 있고 내 행동과 말은 모두 정해져 있다. 그런데 어떻게 거기서 평범해질 수 있나 생각하다가 마음 공부를 해보자 하고 불교 공부도 하고 절에서 살아보기도 하고, 출가를 한 건 아니고 행자로 일년 정도 절에서 살았다, 스님들 가르침을 따라가 보기도 했다. 배우려고. 그러면서 연기를 연기 이론적으로 배우기보다는 셰익스피어나 입센 이런 작가의 작품을 계속 읽고 불교식으로 생각하는 그런 과정이 있었다. 그러면서 무대 위에서 평범해지려고 하고. 그 사람 마음으로 이 자리에 딱 있는 게 어떻게 하면 될까 궁금하고 항상 화두였다. 불교 공부를 할 때 스님이 해주신 염주 이야기가 있다. 염주는 씨앗으로도 엮고 구슬로도 엮는데, 구슬 하나가 한 세계고 한 우주라고 한다. 이게 묶여지면 구슬들이 서로 비춘다. 자세히 들여보면 계속 무한이 비추고 있다. 하나의 구슬 안에 무한히 비추는 구슬들이 담겨 있는 거다. 그 말씀을 들을 때 염주의 구슬이 서로서로 비추는 것처럼 김용준이 인물에 비추고 그래서 인물에 내 모습이 있고 그런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이게 많은 배우들이 빠지는 딜레마인데, 인물을 그냥 자기로 살아버리는 걸로 빠질 수도 있다. 그것이 아니라, 이 안의 세계가 작지만 계속 다른 세계를 비추고 비추고 비춰서 여러 모습이 있는 거고 일단 내 안에서 그 인물과 가장 공통적인 거, 나와 다른 거를 같이 찾아서 내가 나한테 없던 지점으로 많이는 아니고 아주 조금, 1밀리 정도? 용기 있게 다가가는 그런 노력을 하는 거다. 그 싸움도 큰 싸움이다. 작품을 만나서 마음을 조금 다르게 먹는 그 싸움을 작품마다 하는 거다.

김소연: 그럼 이 작품에서 타케루의 마음을 진짜처럼 먹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김용준: 내 마음하고 연관성이 없을 수 있다. 매 공연마다 내가 해야 되는 말은 정해져 있고 만나야 될 사람들도 정해져 있다. 어떤 정해져 있는 세계로 들어가는 건데, 거기서 진짜 마음을 가지고 살아내야 한다. 아침에 일어나면 우리가 똑같은 이름으로 살지만 오늘 해야 될 일 이 있고 그래서 마음 먹는 게 있다. 똑같이 김용준을 살지만 매일매일 마음 먹는 게 다르다. 어제 딸 아이와 안 좋은 일이 있었으면 오늘은 좀 어떻게 해봐야지 이런 마음을 먹는다. 타케루한테도 그런 걸 준다. 스님들은 화두라고 할 텐데 그러니까 공연에서 내가 드는 화두랄지 질문이랄지 이런 게 있어야 무대 위에서 살아있을 수 있다. 그걸 들지 않으면 반복의 길로 자꾸 빠지게 된다. 왜냐면 익숙하니까. 익숙한 길로 자꾸 간다. 물론 만남과 길이 정해져 있지만 내가 오늘 유난히 궁금한 것들, 질문이 있어야 새로 만나는 게 가능하다. 이를테면 첫 공연에서는 아내한테 그만두고 싶다고 솔직하게 얘기를 해야되나 하는 질문을 들었다. 타케루도 알고 있다. 모르는 줄 알아, 알지만 어쩔 수 없잖아, 라는 속에 있는 말을 한다. 이 사람도 저 깊은 곳에서는 죽는다는 것을 알고 있는 거다. 솔직하게 한 번 얘기해 볼까 하는 거다. 하지만 내가 해내야 할 타케루의 대사는 그딴 소리 하지 마, 그럼 어떻게 먹고 살 거야, 이거다. 하지만 저 깊은 곳에 오늘은 얘기해 볼까, 라는 질문을 들면, 무쓰미가 나에게 말할 때 지금 얘기해볼까 싶고, 타케루의 말들은 ‘얘기해볼까’하는 마음을 누르는 말이 된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마, 했을 때 그 말이 살 수 있는 거다. 질문은 주로 무쓰미와 관계가 있다. 어떤 날은 가족들에게 윽박지르고, 내 스스로를 속이고, 내가 아는 지식을 속이는, 그런 생활로 인해서 내가 죽는다는 거, 그것이 가족들한테 미안한 거다. 미안해라는 말을 언제 할까 하는 질문을 드는 거다. 작품에서는 제일 마지막에 미안해 라고 한다. 그 마지막이 오기 전에 언제 할까, 언제 할까, 언제 할까 하는 질문을 계속 가지고 있는 거다. 그러다가 제일 마지막에서야 그걸 말할 기회가 오는 건데, 계속 기다린다. 이렇게 쳐다보면서 지금 할까, 그러다가 아니야 지금은 무조건 살아야 돼, 그려면서 화를 더 내는 거다. 미안하다는 말을 감추기 위해서. 이제 등에 멍이 많아졌을 때 올 게 왔구나, 미안하다고 말하려고 하지만, 또 누르고 안 한다. 걱정하지마, 그런다. 그러다가 이제 작가가 써준 타이밍이 오는 거다. 그때 내내 누르고 있던 말을 하는 거다. 미안하다고.

김소연: 타케루는 가족들에게 호통치고, 아내나 딸의 말을 듣지 않는다. 전형적인 가부장적 권위의식을 가진 인물이라고 할 수 있는데, 타케루의 모습이 가족을 억누르고 있다는 느낌은 아니었다. 김용준 배우의 연기가 강하게 분출하는 연기가 아니어서 그런 건가 했는데 인물에게 촘촘한 상황을 부여하는 것 같다.

김용준: 무쓰미와 다르게 딸 히요리는 타케루가 화를 내도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할 소리 다 한다. 타케루가 무조건 윽박지르고 마이웨이 하는 사람이라면 딸이 그렇게 따지지 못할 거다. 나와 딸을 생각해도 그렇다. 내가 아빠지만 주도권은 항상 딸에게 있다. 타케루는 이미 약자다. 더 크게 이야기하니까. 오늘은 마누라하고 딸한테 지지 않겠다, 그런 거다. 딸하고 아내한테 고맙다라는 말을 제일 듣고 싶어한다는 화두를 들었던 적도 있다. 배운 거 없고, 가진 거 없고, 노동밖에 할 줄 아는 게 없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집 한 채를 유지하고 살았던 그 동네로 다시 돌아가고 싶고, 아빠 고마워 여보 고마워 라는 말을 듣는 걸 제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섶을 지고 불로 들어갈 거다.

김소연: 희곡만을 놓고 봐도 앞 부분에서는 어 이 사람 왜 이러지 싶은데, 뒷부분에서 살았던 마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가 왜 위험을 부인하면서 일하는지 알겠더라. 타케루만이 아니라 동료들도 그럴 거 같다. 타케루를 좋아하고 존경하지만, 타케루가 괜찮다 열심히 하자 하니까 그냥 따르는 건 아닐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용준: 무식한 아저씨들이라고 할 수 있지만 함부로 무시할 수 없는 그들만의 태도, 신념이 있는 거다.

김소연: 지금 이야기한 것이 중요한 것 같다. 가진 거 없고, 하지만 고향을 지키고 내 가족들을 건사하고, 가족들로부터 사랑을 받는 것. 타케루는 그게 삶의 중요한 가치인 거다. 그걸 무대 위에서 보여주어야 하는데, 화를 내지만 그런 삶의 태도를 담고 있고 위험을 회피하는 것이 현실에 대한 무지가 아니라 자신의 가치를 지키려는 절실함을 담고 있어야 한다. 김용준 배우가 분한 타케루는 완고하고 고집스러운 점이 있는데, 그것이 상대에게 위력으로 다가오는 것은 아닌 것 같았다.

김용준: 아무리 공부를 하고 상황에 대한 인물에 대한 배경 지식을 쌓아도 그 사람이 되는 것은 쉽지 않다. 불가능하다. 결국 내 생활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희곡에는 타케루의 말과 생활이 있다. 내 삶은 원전 방사능 제거 노동자하고는 전혀 다르다. 타케루의 말을 아무리 외우고 연출의 디렉션을 따른다 해도 원전 방사능 제거 노동자 마음을 가질 수가 없다. 내 생활, 오늘은 아침에 일어나서 이런저런 일을 하고 비보도 듣고 그런 모든 나의 생활에서, 그걸 몰입이라고 밖에는 할 수 없을 것 같은데, 인물의 대사와 행동을 자꾸 겹쳐본다. 인간이 아니라 괴물이다. 일이라면 일인데, 실제 생활에서 내 일의 상황을 계속 대입하는 것이다. 이렇게 사는 줄 알면 아마 사람들은 나를 상대도 안 할 거다. 그런데 많은 배우들이 그렇게 하고 있다. 나의 모든 생활에 타케루의 말과 행동을 하나씩 넣어본다. 속으로 해보고 또 남이 듣진 않겠지만 입으로도 해본다. 그 말을 떼서 희곡과는 전혀 다른 맥락에 넣는 거다. 내 생활 안에서 그 대사로 생활해 본다, 대입해 본다, 대비한다. 그러면 그 말은 전혀 다른 차원의 의미가 된다. 그러고 나서 이제 리허설을 할 때나 공연을 할 때 그것이 올곧이 들어가면 이제 보이는 것들이 조금씩 달라진다. 무대에서 살라고 하는데, 타케루의 말을 가지고 살 수 있게 된다.

무대는 내가 경험해 보지 않은 새로운 세계다. 타케루의 말을 김용준의 세계로 갖고 와서 여기다 적응해 보는 것도 타케루가 경험해보지 않은 세계에서 그 말을 하는 거다. 어색하긴 마찬가지다. 내 삶에서 살아보면 무대에서도 살아진다. 타케루 말 중에 “입 닥치고 있어”가 있다. 나는 감히 한번도 집에서 그런 말을 해보지 않았다. 하지만 아내가 “왜 나한테 아무 말도 못하게 해”라고 나한테 몇 번 얘기한 적이 있었다. 내가 그 말을 쓰지 않았지만 “당신은 입 닥치고 있어” 이런 식의 신호가 아내에게 간 거다. 직접 내뱉은 적은 없지만 내 삶에도 타케루의 ‘말’이 있었던 거다. 타케루가 미안해라고 하는데, 나는 한번도 해본 적이 없다. 조선인이라 그렇다. (웃음) 근데 이 작품 하는 동안 화장실에서 많이 했다.

그냥 부서져 내릴 거짓말에 삶을 기대고 사는 사람

김소연: 그런데 희곡과 인물을 처음 파고들 때 설득이 잘 안 되고 더 답답해지고 이런 건 없나.

김용준: 답답하다. 내가 연기한 인물들은 다 죽여버리고 싶다. 말이 안 된다. 왜 그렇게 사냐, 그런 생각도 든다. 타케루도 그렇다. 성질머리도 마음에 안 들고, 가족들에게 거짓말하고. 자기도 알면서 거짓말을 한다. 타케루가 위험을 알면서도 계속 일하는 것은 죽겠다, 자살하겠다는 마음이 아니다. 이렇게 해서 살겠다, 이렇게 해서 고향으로 돌아가겠다, 다시 되돌리겠다, 내가 뭔가 하겠다, 고마웠다는 말을 듣겠다, 내 사랑을 이걸로 표현하겠다, 그런 거다. 말도 안 되는 그냥 부서져 내릴 거짓말이다. 그런데 누구나 살기 위해서 거짓말 하나가 필요하다. 그 거짓말이 없으면 하루도 못 산다. 타케루는 나 괜찮아, 나 해낼 수 있어, 나 안 죽어라고 거짓말을 한다. 방사능 수치가 올라가는데, 온 식구가 다 걱정하는데 나만 딱 믿어 난 안 죽어 난 괜찮아 라고 한다. 세상에 이런 거짓말이 어디있나. 자기도 위험하다는 걸 안다. 그런데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서 거짓말로 누르고 있는 것이다. 타케루의 모습은 일본 정부가 위험에 대처하는 것과 똑같다.

김소연: 타케루는 왜 그런 허약한 거짓말에 자기 삶을 기대고 있는 걸까.

김용준: 그거 말고는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의심이나 불안이 커질수록 거짓말도 점점 더 커졌던 것 같다. 스스로를 속인 그런 거짓말을 부여잡기 위해 건강한 생명을 빼다 쓰는 거다. 그게 말도 안 되는 바보짓이라고 고백하는 과정이다.

김소연: 타케루의 말과 행동은 억압적인 가부장처럼 보일 수도 있고, 그래서 연극은 억압적인 가부장의 몰락으로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런데 공연을 보면 상대를 억누른다기보다는 스스로 애쓰는 안간힘이 다가온다. 그건 무쓰미의 촘촘한 리액션에서 구축되는 것도 있는 것 같다. 무쓰미는 타케루의 눈치를 보는 것 같으면서도 돌아서서 한마디 하기도 하고 그래 당신 말이 다 맞다고 달래기도 한다. 원전의 노동자들의 위험이 드러나면서 쌓이는 긴장도 크지만 타케루와 무쓰미 두 사람이 쌓아가는 긴장도 팽팽하다.

김용준: 타케루가 윽박 지르는 사람이라면, 무쓰미에게 무서운 사람이라면, 그런 층위는 생겨나지 않았을 것이다. 무쓰미가 이해하는 건 저 거짓말이 무너지면 저 사람 살아갈 힘이 없다는 거다. 만약에 아내가 당신도 지금 무서워 하고 있어 라고 말해버리면, 딸은 그렇게 말해버린다, 그때 이미 죽어버릴 것 같다. 그런 불안이 무쓰미에게도 있는 거다. 타케루가 소리지르는 게 무서워서 아무 말도 못하는 그런 건 아닌 거다. 어떤 중요한 말이 나오기 전에 막으려는 거다. 타케루가 그 말을 하면 무너질 걸 아니까. 그의 거짓말을 지켜주려는 것이다. 무쓰미는 속지 않았던 거다.

김소연: 염주 이야기를 하면서 타케루와 김용준이 서로를 비춰준다고 했다. 그걸 좀 더 이야기해줄 수 있나.

김용준: 나와 타케루 둘 다 겁이 많다. 그 점은 정확하게 서로를 거울처럼 비춘다. 타케로는 노동자로 살아온 그의 삶의 마지막, 가족을 지키려는 거짓말, 그런 것이 그가 겁이 많다는 것이다. 나도 살아오면서 지금 현재 물러설 수 없는 어떤 상황에서의 두려움 같은 것이 있다. 그런 점이 둘이 마주서 바라보는 것 같다. 타케루하고 나하고 마주 보면서 너도 걱정이지, 나도 걱정이야 하는 거다. 타케루는 그래서 가족한테 소리 지르면서 위험으로 뛰어드는데 나를 통해서 가족한테 약간 져주게 되었던 것같다. 얼핏 보면 타케루는 강철같이 쭉 밀고 가다가 꺾이는 것같은데 나를 만나서 강팍함으로 치닫지 않았다고 할까. 내 허당기가 입혀졌다고 할까 그런 게 있다. 히요리에게 그런 건 상관없는 무책임한 인간이야라고 화를 내는 장면에서 내가 오빠삐(*연극에서 언급되는 코미디의 우스꽝스러운 동작) 흉내를 냈다. 아버지가 딸에게 막 소리를 지르면서 화를 내는데 거기서 벌거벗고 춤추는 코미디 동작 흉내를 내는 거다. 타케루가 그랬는지 안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이고 타케루가 나를 통해서 그렇게 한 것 같다. 나는 또 타케루를 통해 닥쳐 이렇게 소리지르는 생활을 해본 것 같다. 이렇게 서로 비쳐주는 거다.

여실히 드러나는, 죽음밖에 없는 상황

김소연: 그런데 그렇게 안간힘을 쓰면서 애를 쓰는데 결국 죽는다. 타케루의 죽음은 우리에게 어떻게 남겨지는 건가. 어리석음도 아닌 것 같고, 그리고 노동자를 죽음으로 내몬 국가와 회사에 분노로 남겨지는 것도 아닌 것 같다. 물론 국가와 회사에 대한 분노가 있지만, 그것만은 아닌 것 같다.

김용준: 거짓말이 끝나는 지점에서 죽는다. 거짓말이 끝나고, 일본 사회가 개인을 속이고 있다는 거, 일본 사회뿐만 아니라 개인을 구조가 속이고 있다는 것, 그 희생으로 사회가 봉합되어 있다는 것, 그 가리워져 있던 구조가 드러나는 순간, 진실이 드러나는 순간 이 사람의 거짓말이 끝나고 죽는다. 어떤 개인의 삶, 그 사람을 살게 해주는 어떤 그 거짓말이 끝나고 구조가 여실히 드러나는, 죽음밖에는 없는 상황. 그 공포스러운 상황을 드러내는 것 같다. 만약 내 삶도 내가 살기 위해서 하고 있는 어떤 거짓말들이 지적당하고 그것을 내가 인정하는 순간 아마 더 못 살 것 같다. 그런 지점에서도 나와 타케루가 만났던 것 같다.

김소연: 이번 공연을 보면서 제목이 다가왔다는 것이 그런 점인 것 같다. 갑자기 오싹해진다. 지금까지 배우로서 자신이 창조해야 할 타케루를 만났던 과정에 대해 이야기했다. 시간을 더 거슬러 올라 희곡을 처음 읽었을 때 이야기를 듣고 싶다.

김용준: 강력한 힘이 있었다. 어떤 노동자를 통해 사회의 약한 고리를 이렇게 진실하게 드러낼 수 있을까, 그리고 이렇게 재미있는 것들을 빼곡이 담아놓을 수 있을까 싶다. 인물과 인물의 세밀한 관계들도 인상적이고 무거운 주제를 다루면서도 위트와 유머가 배어있다. 위트나 유머에는 일본인들의 특징도 있는 것 같다. 사소한 걸 진지하게 대하는 태도 같은 것. 처음에 읽었을 때 글로도 그런 강력함이 느껴졌다.

김소연: 이 희곡은 좀 독특한 구조다. 타케루의 죽음 이후에서 시작되고 무쓰미가 산재 신청을 할 것인지를 두고 전개된다고도 할 수 있다. 타케루는 과거의 장면들에만 등장하고, 그 과거의 장면들은 무쓰미가 지금 어떤 상황에 놓여 있는지 무엇을 고민하는지를 보여주기 위해 삽입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또 다시 생각해보면 3.11 동일본대지진 이후의 고통의 한복판을 통과하고 있는 것은 과거에 등장하는 타케루다. 그래서 무쓰미와 타케루, 과거와 현재가 뫼비우스의 띠의 안과 밖처럼 연결되어 은폐된 사실을 드러내면서 그것이 지나간 과거가 아닌 현재에 항존하는 것으로 전개된다. 거실을 벗어나지 않는 사적 공간을 그리면서도 이 거대한 재난과 부조리가 적나나하게 드러난다. 또 하나는 무쓰미와 타케루, 그리고 히사코와 카쓰히로. 두 부부가 대비된다는 것이다. 연극의 시작에서부터 카쓰히로의 징후가 나타나고 결말에 이르면 결국 그도 쓰러진다. 두 가족의 모습이 사뭇 다른데, 결국 죽음이라는 결말은 같다.

김용준: 타케루와 카쓰히로는 동료고 둘 다 똑같은 병에 걸린다. 감기 기운이 있다가 코피를 흘리고 백혈병에 걸린다. 두 남자는 똑같은 길을 가는 거다. 그걸 바라보는 가족들이 있다. 무쓰미는 타케루의 거짓말을 지켜주면서 따라가고, 히사코는 보험도 들고 뭔가 대책을 세우지만 역시 마찬가지로 따라가는 거다. 위험을 대하는 두 양상인데, 하나는 괜찮을 거야 내일은 오늘보다 나을 거야 하면서 따라가고, 다른 하나는 위험이 닥치면 난 여기로 도망가야지 하면서 대피로를 찾는 건데, 둘 다 결말은 같다. 두 집을 대비하면서 일본 사회가 피폭 노동자를 대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 같다. 괜찮겠지와 멀리 하는 거.

김소연: 김용준 배우의 연기를 보면, 이 작품만이 아니라, 어떤 상황을 명료하게 보여준다기보다는 명료한 상황을 명료하지 않게 보여준다. 이편의 객석에서 보면 상황은 너무 명확한데, 무대의 인물은 망설인다. 그것이 상황을 인지하지 못하는 어리석음이나 유약함이 아니라 명확하다고 생각했던 내 시선을 흔들고 상황을 더 깊고 부피 있게 그려낸다.

김용준: 망설임이 보인다니 나에게는 상찬이다. 망설임이 보인다, 지금 여기서 판단하고 있다는 것이 보인다는 건 내가 목표로 하는 최고의 연기다. 나는 어떤 해석을 정해놓고 무대에 오르는 것을 제일 경계해야 한다고 믿는다. 우리의 삶이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 하나하나의 행동, 한마디 한마디의 말이 어떤 판단의 연속이다. 우리는 끊임없이 망설이고 판단한다. 관객이 연극을 보러 오는 것도 그런 삶의 모습을 보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왜 저런 말을 하는지, 내가 이걸 해야 되는지 말아야 되는지 그런 인물의 망설임을 찾아가려고 한다. 어떤 연출은 그런 걸 하고 있으면 답답하다, 빨리빨리 해라, 그러는데 그러면 나는 상처받는다. 그 길로 가 그러는데, 그 길로 가야 될지 말아야 될지 내가 지금 여기서 망설이면서 애써 판단하는 걸 보여주고 싶다.

김소연: 이번 작품을 함께 한 류주연 연출도 그렇고 김용준 배우의 그런 망설임을 사랑하는 연출들과 꾸준히 작업하는 것 같다. 오늘 이야기 감사하다.


‘페르소나’ 캘리그래픽: 유진규
인터뷰 사진: 이자경
<공포가 시작된다> 공연 사진: fotobee studio 양동민

김용준

한양대 연극영화과와 뉴욕주립대학교 스토니브룩캠퍼스 대학원에서 공부했다. 1997년 연우무대 <날보러 와요>로 데뷔하여 연우무대에서 작업했다. 현재는 극단 놀땅 단원이다. 번역하고, 가르치고, 연기한다.

주요작품

영화 <다음소희> <드림펠리스> <돌핀> <콘크리트 유토피아> <세자매>
드라마 <더 게임: 0시를 향하여> <자백> <시간>
연극 <보이지 않는 손> <공포가 시작된다> <프루프> <누란 누란> <후회하는 자들> <히스토리보이즈> <환도열차> <하퍼리건> <사랑을 묻다>

인터뷰 일시: 2022년 5월 25일

인터뷰 장소: b2프로젝트(대학로)

극단 산수유 <공포가 시작된다> 2022년 제43회 서울연극제 공식선정작   공연일자: 2022년 5월 13일 ~ 5월 22일공연장소: 대학로예술극장 소극장   토시노부 코죠우 | 번역 홍명화 | 연출 류주연 | 조연출 손예리, 김서아 | 무대 이희순 | 조명 박성희 | 음향/음악 류승현 | 분장 이동민 | 의상 최원 | 그래픽/사진 김솔 | 기획 김경빈, 강지연   출연 김용준, 류주연, 우미화, 신용진, 김선미, 박시유, 반인환, 강선영, 김신영, 홍성호, 서유덕, 윤수현, 손필재, 황비홍

  • 무료정기구독을 원하시는 분은 ohskon@naver.com으로 메일을 보내주세요.
  • 리뷰 투고를 원하시는 분은 ohskon@naver.com으로 원고를 보내주세요.

One thought on “큰 기둥에서 뻗어나온 가지 끝 여린 것의 진실

  1. 멋진 질문과 멋진 대답!! 작품만큼이나 수준 높은 인터뷰를 만났습니다. 김용준 배우, 김소연 평론 두 분 감사합니다.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