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이백 명이 연주하는 <파우스트>

– 임야비(tristan-1@daum.net)

소설가, 서울 신포니에타 기획 및 연출

극단 듀공아, 외계 공작소, 동맹, 아레떼 연출부 드라마투르그

 ‘기십(幾十) 명이 연주하는 파우스트’를 너머 이제 ‘100~200명이 연주하는 파우스트’에 접어들었다. 이제 오를 수 없는 산(山)이었던 ‘파우스트’의 정상이 슬슬 보이기 시작한다.

 많은 작곡가들이 원작 희곡 파우스트의 거대한 구성을 음(音)으로 구현하기 위해서 대편성 오케스트라와 여러 독창자 그리고 합창단까지 동원했다. 이런 대규모 연주의 형식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오케스트라가 주가 되고 거기에 성악(독창, 합창)이 덧붙여진 형태로, 무대 위에는 오케스트라 단원들과 지휘자 그리고 성악가와 합창단이 빽빽하게 들어선 ‘콘서트(또는 ‘오라토리오)’ 형식이다. 다른 하나는, 무대 위에는 연극처럼 등장인물들(성악가)이 연기와 노래를 하고, 지휘자와 오케스트라는 무대 아래 보이지 않는 곳(Orchestra Pit)에서 연주하는 ‘오페라’다.

(좌) ‘콘서트 형식의 무대 구성
(우) ‘오페라’의 무대 구성

 이번 연재에 소개할 곡은 로베르트 슈만의 역작 ‘괴테 파우스트의 정경(Szenen aus Goethes Faust, WoO. 3)으로 ‘콘서트’ 형식에 속하는 작품이다. 

(좌) 로베르트 슈만
(우) 악보 표지

 로베르트 슈만(Robert Schumann; 1810~1856)은 독일 낭만주의를 대표하는 작곡가다. 피아노곡, 가곡, 실내악에서 수많은 명작을 남겼지만, 네 곡의 교향곡 이외에는 이렇다 할 대규모 작품이 없었다. 슈만은 자신의 역작을 쓰기 위해 그에 어울릴 만한 텍스트를 찾아야 했고, 자연스럽게 대문호의 대작인 파우스트를 선택했을 것이다.

 슈만은 거대하고 심오한 원작을 담기 위해 가장 커다란 그릇을 준비했다. 80명 정도의 2관 편성 오케스트라에 10명 이상의 독창자 그리고 어린이 합창단과 혼성 4부 합창단 편성이다. 간단하게, 소리를 낼 수 있는 것들은 전부 무대 위에 올렸다고 생각하면 된다.

 그는 파우스트처럼 이 곡에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 부었지만, 작품의 완성 과정은 괴테의 원작처럼 무척 험난했다. 결국, 연주가 가능할 정도로 완성되는데 1844년부터 1853년까지 총 10년이 걸렸다. 괴테 탄생 100주년 기념일인 1849년 8월 29일에 드레스덴, 라이프니츠, 바이마르에서 곡의 일부분만 동시에 초연되었고, 완성된 전곡의 초연은 슈만 사후인 1862년에서야 이루어졌다. 

 우선 슈만의 음악을 살펴보자. 세부 사항까지 들어가면 너무 복잡해져서 가장 큰 둘레만 파악하면 위의 표와 같다. 서곡과 1, 2, 3부로 구성되어 있고 총연주 시간만 무려 120분이다. 음악의 1부와 2부는 각각 원작의 비극 1부와 2부에서 세 장면씩 뽑아 음악을 붙였고, 음악의 3부는 비극 2부의 마지막 장인 ‘심산유곡(深山幽谷)’을 통째로 재현했다. 이해를 돕기 위해 괴테의 원작 텍스트를 위의 표에 덧붙이면 아래와 같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점은 슈만의 ‘텍스트 선택’이다.

 음악의 1부를 구성하는 원작의 세 텍스트에는 순진한 처녀 그레트헨이 파우스트와 사랑에 빠지고 혼전 임신으로 좌절하는 ‘전개’와 심한 죄책감에 쓰러지는 ‘위기’만이 있다. 비극 1부, 일명 ‘그레트헨의 비극’이라는 플롯의 가장 중요한 골격인 ‘발단’(악마와의 계약)과 ‘결말’(그레트헨의 죽음과 파우스트의 절망)이 없다. 게다가 매력적인 악마 메피스토펠레스의 활약이 돋보이는 ‘라이프치히 아우어바흐 지하 술집’과 ‘발푸르기스의 밤’도 없다. 슈만은 왜 이런 선택을 했을까? 질문에 답하기 전에 음악의 2부를 살펴보자.

 덧붙인 표에서 보듯이 음악의 2부는 원작 비극 2부의 첫 시작인 ‘쾌적한 장소’에서 파우스트가 깨어나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그리고 거의 7,000행을 건너뛰어, 파우스트가 장님이 되는 ‘한밤중’과 ‘궁정의 넓은 안마당’에서 ‘멈추어라, 너 정말 아름답구나!’라고 말하며 죽는 후반 장면으로 이어진다. 즉, 음악의 2부에는 ‘발단’과 ‘절정’만 있을 뿐, ‘전개’와 ‘위기’가 없다. 음악의 1부와는 반대다. 그렇다면 ‘발단-전개-위기-절정-결말’ 중에 ‘결말’이 남는데, 슈만은 원작의 마지막 장인 ‘심산유곡’ 희곡 원문을 그대로 써서, 음악의 3부에 장대한 결말을 쌓아 올린다. 위에서 표로 제시한 슈만의 음악과 괴테의 희곡, 이 두 개를 합치면 아래와 같은 표로 정리된다.

 슈만의 선택 의도는 명확하다. 거대한 규모의 오케스트라에 긴 연주 시간을 쏟아부어도 우주적인 원작의 의도를 전부 담아낼 수는 없다. 그래서 슈만은 괴테의 텍스트를 취사선택하여 각색한다. 선택과 각색의 원칙은 i) 1부보다는 2부에 무게를 둔다. ii) 파우스트, 그레트헨, 메피스토펠레스 중 극의 주인공인 파우스트 박사에만 초점을 맞춘다. iii) 플롯의 ‘발단-전개-위기-절정-결말’ 중에 ‘결말’에 화력을 집중한다. 이렇게 세 가지다.

 그래서 결말에 해당하는 3부 ‘파우스트의 구원’에 슈만의 음악적 정수가 녹아들어 있다. 총 7개의 부분으로 이루어진 3부는 희곡의 차례대로 파우스트의 구원 – 파우스트의 변용 – 파우스트의 갱생으로 진행된다. 마지막 부분인 ‘신비의 합창(Chorus Mysticus)’에서 두 개의 합창단과 오케스트라가 쌓아 놓은 2중 푸가 위에 12,111행의 마지막 대사인 ‘영원히 여성적인 것이 우리를 이끌어 올리도다(Das Ewig-Weibliche Zieht uns hinan)’를 봉헌하며 곡과 극을 끝맺는다.

 슈만은 베를리오즈처럼 연극에 조예가 깊은 사람은 아니었다. (슈만이 모자란 것이 아니고 시대를 한참 앞서간 베를리오즈가 특별한 것이다) 그는 정신질환과 싸워가며 오로지 작곡과 음악 비평에 평생을 바쳤다. 그래서 음악인 ‘괴테 파우스트의 정경, WoO. 3’가 연극 연출적으로 훌륭하다고는 할 수 없다. 하지만 슈만은 천재적인 각색가였다. 뛰어난 문필가이기도 했던 슈만은 깊이와 높이를 가늠할 수 없는 방대한 분량의 문학 작품을 ‘콜라주 기법’처럼 재구성하고, 선택과 집중을 통해 결말 부의 주제인 ‘구원’을 드높게 구현해냈다. 

슈만과 클라라

슈만과 클라라

 슈만과 그의 부인 클라라 슈만(Clara Schumann; 1819~1896)의 지고지순한 사랑은 매우 유명하다. 아마도 슈만은 평생 자신을 위해 희생한 아내에게 이 장대한 음악을 바쳤을 것이다. 더불어 슈만은 10년을 공들인 이 역작을 통해 높디높은 괴테에게 닿고 싶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곡의 마지막 부분인 ‘영원히 여성적인 것이 우리를 이끌어 올리도다’의 고양은 한 사람의 구원을 넘어 괴테가 도달하고자 했던 ‘인류의 구원’처럼 높이 울려 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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