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들 하신가요~ 잘 지내고 계시죠?!”

글_배선애(연극평론가)

사진 제공: 극단 푸른연극마을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다룬 작품들이 사건의 재현을 넘어 정서적 공유를 지향하는 양상으로 변모되고 있다. 40여 년의 시간이 흘렀기 때문인지 조금은 다른 시선으로, 다른 접근 방법으로 5·18을 연극적으로 기억하게 된 것이다. 올해로 창단 30주년을 맞은 극단 푸른연극마을의 <안부>(이당금 작, 이지현 연출, 대학로 열린극장, 2023년 3월 30일~4월 2일)도 그 범주에 포함되는 작품이다. 사건보다는 그것을 견뎌낸 인물들에 초점을 맞추면서 과거를 현재화하는 구성을 선보였다.

사진 제공: 극단 푸른연극마을

호남전기 회사 노동자인 박정, 이순, 고달은 힘든 노동의 일상 속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으며 함께 의지하고 살아가는 가족 같은 친구들이다. 노조활동과 투쟁의 과정, 그리고 승리의 내용을 중심으로 한 노동자 보고대회를 준비하던 이들은 5월 18일 계엄군을 마주하면서 자연스레 10여일 간의 광주민주화항쟁 시민군이 되었다. 마지막 날, 최종 항쟁을 앞에 두고 여성과 학생은 도청을 나가라는 결정에 따르면서도 마음은 무겁다. 결국은 함께 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이 큰 돌덩이가 되어 서로 뿔뿔이 흩어진 세 친구는 40여 년이 지나서야 서로의 안부를 물으며 다시 광주와 그때의 시간, 그리고 함께 했던 사람들을 대면하게 된다.

사진 제공: 극단 푸른연극마을

위의 내용은 시간 순서에 따라 정리한 것인데, 실제 공연은 지금 현재의 시간을 기본으로 설정하고 거기에 과거의 시간을 교차하는 연극적 재구성을 취했다. 공연은 ‘우리젊은날복지센터’ 직원인 이봄이 박정이라는 수급자를 현장방문하게 되면서부터 시작한다. 가끔씩 다른 시간대를 살고 있는 것 같은 박정을 보면서 이봄은 가족과 친구들을 수소문하게 되고 결국 40년만에 박정과 함께 5·18을 겪은 친구들을 한데 모으게 된다. 이것이 현재의 시간이고, 그 사이사이 박정이 마치 현재인 듯 말하는 친구들과 겪은 1980년의 일들이 과거의 시간으로 곳곳에 배치되어 있다. 과거가 중심이지만 현재를 전면에 두어 과거의 현재성을 강조한 구성을 취한 것은 이당금 작가의 영리한 선택이었다.

<안부>가 인상적인 것은 인물들이 여성노동자라는 점이다. 1970년대 여성노동자들은 두 가지의 호칭으로 불렸다. 하나는 ‘산업역군’, 하나는 ‘공순이’. 겉으로는 경제발전에 적극적으로 이바지하는 존재라는 의미로 산업역군이라 추켜세우지만 실제적으로는 공순이라는 이름으로 차별받고 멸시받는 존재였다. <안부>의 세 인물은 이 명칭의 간극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고, 그것이 자신들의 정체성임을 인지하고 있었다. 노동자의 권리를 위해 노동조합 활동을 열심히 하는 한편으로 대학생과의 사랑을 꿈꾸기도 하며 그런 자신들을 조소하기도 한다. 어디에도 기울어지지 않는 당대 여성노동자의 현실이 일상적으로 재현된 것이 이 작품의 제일 큰 미덕이다.

사진 제공: 극단 푸른연극마을

또 하나 주목되는 것은 ‘이봄’이라는 캐릭터의 설정이다. 복지센터 직원으로 일하는 이봄은 요즘의 젊은 세대를 대표하면서 박정의 기억을 환기시키는 역할을 하는 인물이다. 그러나 실질적으로는 이 작품의 가장 중요한 인물은 ‘이봄’으로, 그 존재 의미가 조력자나 서술자에 머물지 않는다. 그 이유는 이봄이 ‘기억의 주체’이기 때문이다. 5·18의 마지막 날, 학생과 여성들을 밖으로 내보낸 이유는 이 일을 끊임없이 이야기하고 기억해주길 바랐기 때문이다. 그것을 실천하는 것보다 살아남은 죄책감이 더 컸던 이순, 고달과는 다르게 이봄은 매우 적극적으로 움직인다. 기억이 중첩되는 박정을 이해하기 위한, 그리고 그 시간을 다시 만들기 위한 이봄의 노력은 5·18을 기억하려는 현재의 시선이고 태도이다. 따라서 이봄이 박정과 고달, 이순을 통해 깨닫고 느끼는 것들은 우리가 기억해야 할 모든 것들이다. 이봄이 기억의 주체로서 존재감을 드러낼 수 있었던 것은 그 역할을 연기한 오세희 배우 덕분이다. 세 명의 대선배와 함께 연기하는 부담이 컸을 텐데도 능청스럽고 귀엽고 뻔뻔한 이봄을 선보였다.

이봄을 연기한 오세희 배우가 안정적이었던 것은 과거 시간의 중심인 세 배우가 제 몫을 정확히 해냈기 때문이다. 박정 역의 전서진 배우는 60대의 현재와 20대의 과거를 수시로 오가는 역할이라 40여년의 시간을 표현하는 것이 쉽지 않았을 터인데 간단한 의상 교체로 서로 다른 시간 속 박정을 선명하게 연기했다. 사랑스러우면서도 꿈이 많았던 20대의 박정, 홀로 남아 과거의 시간 속에서 살고 있는 60대의 박정은 전서진 배우를 통해 결국 한 사람임을, 시간이 흐르지 못하고 멈춰있음을 잘 보여주었다. 이순 역의 이당금 배우와 고달 역의 윤부진 배우는 발랄하고 꿈 많은 20대부터 과거를 지우고 살아온 60대의 현실을 잘 보여주었다. 가수가 꿈이었던 고달은 툭하면 “이 세상에 깊은 꿈 있으니~”라며 노래 ‘내가’(김학래, 임철우. 1979년 MBC대학가요제 대상)를 부르며 웃음을 자아냈고, 현모양처가 꿈이었던 이순은 뻣뻣한 몸이지만 최선을 다해 자기 역할을 수행하려는 진지함으로 즐거움을 주었다. 관록의 세 배우가 빚어내는 앙상블은 고된 노동 시간을 견뎌낸 힘이 서로에게 있었음을, 사랑과 일상과 투쟁 그 모든 것들을 함께 해서 찬란했음을 관객들에게 전달해주었다.

사진 제공: 극단 푸른연극마을

연극 <안부>에서 배우들만큼 인상적인 것은 배경음악이었다. “봄비 속에 떠난 사람, 봄비 맞으며 돌아왔네”라는 가사로 시작하는 ‘봄비’(이은하, 1979)가 무수히 변주되어 작품 곳곳에 삽입되었고 각 장면마다 다양한 분위기와 정서를 자아냈다. 박정이 이봄에서 한 마디씩 가르쳐주는 노래이기도 한데, 사실 박정의 친구들이 광주를 떠났다가 다시 광주로 돌아온 것을 떠올려보면 5월의 봄비 속에 떠난 친구들이 다시 봄비 맞으며 5월 광주로 돌아온 셈이니 작품의 내용을 함축적으로 보여주는 노래이기도 하다. 박정을 찾아간 복지센터 직원 이름도 ‘봄’, 박정이 키우는 식물 이름도 ‘봄’, 배경음악에도 들어간 ‘봄’. 찬란하고 아름다워서 그래서 1980년 5월이 더 쨍하게 아린 것일지도 모른다. 봄이 넘쳐나지만 봄을 빼앗긴 사람들에겐 공허하기 그지없는 봄. 작품 속에서 다양하게 활용되고 강조된 봄만큼 그 의미가 여러 가지로 해석되었고 마음에 와 닿았다.

사진 제공: 극단 푸른연극마을

작품 속 무수히 많은 ‘봄’ 덕분인가? 다시 광주로 돌아온 친구들이 박정, 이봄과 함께 무대 구석구석에 작은 꽃화분을 놓는 마지막 장면이 큰 감동으로 다가왔다. 공연 내내 활용되던 큐빅 등에 마치 망월동 묘지의 묘비처럼 작은 표식을 세우고 그 옆에 이제 막 피어나는 꽃화분을 놓는 것이었다. 환한 미소로 헌화하는 듯한 인물들의 표정과 행동이 마법을 부린 듯 꽃으로 가득한 무대와 조화를 이루어 먹먹한 감동을 안겨준 것이다. 살아남은 자의 죄책감은 덜어버리고, 묘지에 묻힌 사람들 그리고 살아남은 사람들 모두 5월의 햇살처럼, 5월의 수많은 꽃처럼 찬란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찬란했던’ 모두에게 감사하고, ‘찬란한’ 모두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전하고 싶어졌다. 이 글의 제목에 적은 인사는 입 주위에 손을 동그랗게 모아 멀리멀리 퍼지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외치는 소리다. “안녕들 하신가요~~~”, “다들 잘 지내고 계시죠~~~?” 5·18로 사라진 사람들, 그리고 그 시간 속에서 현재를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진심을 담은 이 안부가 온전히 가닿기를 바란다.


  • 무료정기구독을 원하시는 분은 ohskon@naver.com으로 메일을 보내주세요.
  • 리뷰 투고를 원하시는 분은 ohskon@naver.com으로 원고를 보내주세요.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