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 1천 미터에서 바다를 그리던 사내

글_윤서현(연극평론가)

파독 광부들의 역경과 고국을 향한 그리움을 담은 <글뤽 아우프>(임주은 작/연출)가 제2회 너른고을연극축제의 일환으로 남한산성아트홀 소극장 무대를 통해 다시 한 번 관객들을 만났다. 작년 제22회 월드2인극페스티벌에서 대상, 연출상, 연기상의 3관왕을 수상함으로써 그 작품성을 인정받은 <글뤽 아우프>는 파독의 역사를 재조명한다는 측면에서 사회적 가치를 지니며 동시에 지하 갱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지점에서 그 표현 형식까지도 주목하게 되는 작품이다.

사진 제공: 극단 태양의바다 ©김덕원

암전이 걷히면 길게 드리운 로프에 매달린 정여성(백유진 분)이 보인다. 시커먼 얼굴, 땀으로 번들거리는 강인한 팔뚝. 고향에 두고 온 어머니와 넓은 바다를 그리며 사내다운 호탕함으로 흥얼거리는 그는 마치 로프가 아니라 파도의 출렁임에 흔들리는 것처럼 보인다. 이윽고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는 듯 둔탁한 굉음이 길게 울려 퍼지고 긴 적막. 부상당한 몸으로 생환의 의지를 잃어가는 그의 앞에 또 다른 광부(정경훈 분)가 나타난다. 마지막까지 이성의 끈을 놓지 않은 채 생환 방법을 궁리하던 이 광부의 도움으로 정여성은 지상으로의 귀환을 향해 다시 한 번 로프를 움켜잡는다.

이 작품은 파독 근로자들의 삶의 애환을 드라마로 전달하기보다는 지하 1천 미터 갱의 어둡고 답답한 노동 환경과 그 안에서 사투를 벌이는 광부들의 번들거리는 검은 육체를 감각적으로 무대화하는 데 방점을 두고 있다는 점에서 특기할 만하다. 더욱이 이전까지의 소극장 공연과는 달리 ‘너른 고을’에서의 넓어진 무대가 창작진에게 도전 정신을 요구했을 것이다.

남한산성아트홀 소극장의 높고 탁 트인 다목적 무대를 보면 창작진의 고심이 어떠한 것이었을지 예측하기 어렵지 않다. 대학로 소극장들과는 달리 무대가 몇 배로 넓어지면서 지하 갱의 협소함과 답답함을 표현하는 것이 관건이었을 것이다. 연출과 배우들이 함께 제작한 과감한 무대와 김광훈 조명 디자이너가 표현한 빛과 그림자의 섬세한 대조가 이를 해결한다. 주황 빛 조명과 그로 인한 갈색의 그림자가 적절히 배합된 무대 위의 한쪽에서 스모그가 뿜어져 나와 관객의 시야를 간헐적으로 흐린다. 여기에 무대 천정부터 거대하게 드리운 검은 그물 차양이 보태져 그 뒤에 서 있을 것만 같은 깎아낸 암석이나 흙덩이를 상상하게 만든다.

사진 제공: 극단 태양의바다 ©김덕원

무대 공간 또한 막다른 곳이 아니라 미로의 일부분으로 설정되어 있는데, 한쪽을 뚫고 들어갔다가 다른 곳으로 되돌아 나오는 장면, 갱도가 무너지는 것을 피해 관객석 사이의 통로를 이용하는 장면 등 공간적 상상력을 발휘하여 동선을 자유롭게 풀어낸 점도 인상적이다. 배우의 시선 끝에 각광과 측광을 사용한 것도 효과적이었는데 이를 통해 암흑 속에서 한 점을 향해 달려가는 이들의 급박함 또한 설득력 있게 표현되었다. 인물들의 절박함은 두리번거리는 두 개의 헤드라이트의 현란한 불빛에 의해 배가된다. 무대를 비워둔 채 인물들의 영상을 투사하는 짧은 장면을 통해 잠시나마 인물들의 표정을 자세하게 살필 수 있는 순간이 있는 것도 작품 전체에 적절한 변화를 주었다. 정여성의 의식이 몽롱해질 즈음, 마치 지하를 향해 손길을 뻗듯 천천히 하강하는 구조물 또한 인상적이었다. 꿈인지 현실인지 구분할 수 없는 구원의 순간. 반세기 전 이국땅 지하 1천 미터에서 어머니와 가족을 그리며 쓰러져갔을 광부들의 마지막 혼미한 의식이 안타깝게 다가온다.

또 다른 광부의 정체에 대한 궁금증이 작품 진행 내내 내러티브적 긴장감을 유지시킨다. 이 궁금증은 정여성에게 오래 전 먼저 파독 광부로 떠난 형 정윤규가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해소된다. 정여성이 처음부터 형을 못 알아봤을까 싶으면서도 의식이 또렷하지 못한 사람이 보호안경으로 얼굴을 가린, 석탄가루가 시꺼멓게 앉은 형의 얼굴을 알아보는 것도 쉽지는 않았으리라는 생각에 납득이 어렵지 않았다.

사진 제공: 극단 태양의바다 ©김덕원

정여성을 탈출 시켜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놓고 작가적 고심이 컸을 것이다. 관객들 중 많은 이들이 정여성의 무사귀환을 손꼽아 바랐다면 작품의 의도는 이미 달성된 것이 아닌가. 모두의 염원에도 불구하고 작품의 말미 정여성이 로프를 잡은 순간 다시 한 번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린다. 긴 굉음과 정적 끝에, 잠시 사라졌었던 정윤규의 원혼이 다시 나타나 자신의 몸에 난 것과 같은 긁히고 문드러진 상처를 동생의 몸에 착장(배우들의 피부 표면에 그리는 방식이 아닌 착용하는 방식으로 표현되었다) 시킨다. 작가는 정윤규의 원혼의 도움에도 불구하고 정여성마저 형과 같은 처지가 되는 비극적 결말을 선택했지만 그래도 죽음의 순간 정여성의 눈에 보이는 것이 고향의 바다였기에 위안이 된다. 프로젝터로 영사된 파도 거품이 갱을 뒤덮는다.

<글뤽 아우프>는 무엇보다도 1시간 동안 땀을 뻘뻘 흘리며 반세기 전 고국을 떠난 이들의 사투를 표현해낸 백유진, 정경훈 두 배우들의 열연이 인상적이다. 이 의미 있는 작업이 파도를 가르던 사내의 영혼에게 안식을 가져다주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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