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극단 <키스>

글_주하영(공연 비평가)

 

 

이미지와 영상이 넘쳐나는 시대, 실시간으로 전 세계의 뉴스가 공유되는 현재에 ‘타인의 고통’은 얼마나 진지하게 받아들여지고 있을까? 미국의 문화비평가 수전 손택(Susan Sontag)은 2003년 『타인의 고통』의 한국어판 출간을 기념하며 쓴 글에서, 세계 곳곳에서 발생하는 참사를 지켜볼 수 있는 기회가 셀 수 없이 많아졌음에도 오히려 진부하게 느끼며 무관심해진 사람들을 향해 질문을 던졌다. “매일 쏟아지는 전쟁과 폭력의 이미지로 인해 사람들의 현실 인식이 손상된 것이라면, 멀리 떨어진 분쟁 지역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고통을 염려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가지는 것일까?”1

 

보스니아 내전(1992~1995) 당시 사라예보에 체류했던 손택은 맹렬한 폭격과 포위 공격이 날마다 이어지고 공포가 지속되며 전쟁이 “진부한 일상”이 되어버린 경험을 겪지 않은 사람들이 “어떻게 전쟁을 실제로 이해할 수 있을까”를 자문하면서, 그럼에도 “안전하게 살아온 사람들”이 타인의 고통에 개입할 능력을 완전히 잃은 것은 아니라고 믿는다고 피력했다.2

 

2014년 독일 뒤셀도르프에서 초연된 칠레의 극작가 기예르모 칼데론(Guillermo Calderón)의 연극 <키스(Kiss)> 역시 유사한 질문과 고민을 던진다. 칼데론은 2011년부터 지속되고 있는 시리아 내전에 대한 보다 많은 세계인들의 관심과 전쟁의 종식에 대한 촉구를 위해 영어로 극본을 쓰고, 관객들 스스로가 자신을 돌아보고 반성하도록 만들 수 있는 매우 흥미로운 연극방식을 고안해냈다. 자기반영성을 특징으로 하는 메타드라마(metadrama)이기도 한 연극 <키스>는 극중극(a play-within-a-play)의 형식을 적용하지만 기존과는 상당히 다르다. 웃음과 반전, 충격과 사유를 낳는 칼데론의 <키스>의 연극 스타일은 비평가들과 관객들의 갈채 속에 미국과 영국, 캐나다와 같은 영어권 국가들을 중심으로 큰 주목을 받았다. 2023년 서울시극단은 시즌 첫 작품으로 칼데론의 <키스>를 국내 초연으로 선보였다.

 

사진 제공: 서울시극단

 

번역과 연출을 맡은 우종희는 프로그램북을 통해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한 세계의 비상상황이 끝나기도 전에 2022년 2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발발하면서 희곡 <키스>가 생각났다고 설명했다. 그는 “전쟁 관련 기사들이 다른 기사들로 우선순위가 대체”되는 변화를 지켜보면서 “여전히 진행 중인 전쟁의 아픔에 대해 무감각”해지는 현상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고 덧붙였다. 또, 시리아 전쟁을 다룬 칼데론의 희곡이 “우리 사회의 소통 범위를 익숙한 문화권 바깥에서 펼쳐지고 있는 아픔들까지로 확장시킬 수 있는 포용력”을 가질 수 있기를 희망했다.

 

국내 공연 <키스>의 경우, 2020년에 출간된 영문 희곡을 거의 그대로 따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단, 우종희 연출이 프로그램북에서도 언급하고 있듯, <키스>는 “놀라운 구성과 자유도 높은 연출적 포용력”을 품고 있는 작품인데, 원작에서 바나 역을 연기했던 배우가 로라(Laura)라는 이름의 연출로도 등장해 연계성을 갖게 되는 부분을 국내 공연에서는 우종희 연출이 실제 무대에 등장하는 것으로 변화를 가져왔다. 또, 작품의 구성상 연출의 자유로움을 가장 많이 발휘할 수 있는 ‘세 번째 파트’에서 시리아 여인인 ‘아미라의 여동생’이 직접 노래를 하는 장면을 스피커를 통해 객석을 채우는 미리 녹음된 노래로 증폭한 특징이 있다.

 

전혀 예상치 못한 반전과 인식의 충격, 그로 인한 진지한 사유로의 초대가 공연의 가장 중요한 요소인 <키스>는 모든 리뷰에 ‘스포일러 경고(Spoiler Alert)’가 요청될 만큼 사전 정보나 지식이 없는 편이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는 작품이다. 하지만 관극을 한 후 보다 많은 설명과 논의를 필요로 한다는 점에서, 리뷰를 통해 확산될 수 있는 문제 제기나 인식의 전환, 전쟁을 겪고 있는 현장에 대한 관심의 증폭과 연대의 필요성을 촉구할 수 없다는 단점이 존재한다. 연극 <키스>가 갖고 있는 이러한 딜레마는 현실을 재현하고 재구성하는 연극이라는 예술의 역할에 대한 관심 뿐 아니라 정치적 액션과 참여, 현실적인 정치 변화를 이끌어 낼 투쟁으로의 연극을 지향하는 칼데론의 방법론적 고민 또한 반영하게 된다.

 

사진 제공: 서울시극단

 

연극 <키스>의 내용을 간략하게 설명하자면, 서구 문화권의 젊은 배우들이 인터넷에서 우연히 발견한 다른 문화권의 희곡을 제대로 재현하기 위해 애쓰지만 결국 실패하고 있음을 인식하게 되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인터넷에서 우연히 발견한 희곡을 어떤 정보와 배경도 없이 시리아에서 매우 보편적이고 인기 있는, 감상적이고 신파적인 가벼운 연속극(soap opera)으로 판단해 무대에 올린 배우들은 어렵게 화상으로 연결된 작가와의 대화를 통해 ‘완전히 잘못된 해석’을 했음을 인지하게 된다. ‘Boosa’라는 ‘키스(kiss)’를 의미하는 제목의 대본은 총격전과 화학무기의 살포, 수많은 폭력과 고문, 강간이 자행되는 시리아 안에서 전혀 다른 의미와 함축들을 가지게 된다. 젊은 여성 시리아 작가가 연속극의 형식을 사용한 것은 전쟁 이전으로 되돌아가고픈 향수와 소망의 메시지를 담고 있으며, 바나라는 인물이 말하는 “나 누군가와 키스했어(I kissed someone)”라는 대사는 전쟁을 겪는 시리아 안에서 함축성을 갖게 된 성폭력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칼데론은 “재현이 인간을 전달하기 위해서는 재현이 실패해야 할 뿐 아니라 그 실패를 보여줘야 한다”는 주디스 버틀러(Judith Butler)의 말을 연극 <키스>를 통해 실현한다.3 서구권의 배우들이 시리아 문화와 전쟁의 경험, 현실의 고통에 대한 인식 없이 상연한 연극은 “재현할 수 없는 어떤 것”4에 대한 재현이 되며, 그들이 실패하는 모습을 보게 될수록 관객들은 역으로 시리아에 실재하는 화학무기의 공격과 강간, 파괴된 건물들과 죽음, 사랑을 향한 갈망과 고통을 인식하게 된다. 이것이 칼데론이 전체 극을 막이나 장으로 나누지 않으면서도 흐름상 ‘세 개의 파트’로 구성한 이유이기도 하다.

 

관객들은 폭소를 낳는 과장된 연속극으로 구성된 첫 번째 파트를 보면서 실소를 금할 수 없는 당혹스러움과 실질적인 즐거움에 자연스럽게 빠져든다. 급작스러운 하딜의 죽음으로 끝나는 연속극에 이어 의자가 일렬로 정렬되며 실제로 관객과의 대화가 이루어지듯 구현되는 두 번째 파트는 관객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든다. 하지만 레바논의 난민캠프에 있는 검은 선글라스와 히잡을 쓴 작가와의 화상 통화가 진행되는 두 번째 파트는 현실과 환상의 괴리와 문화적 무지에 대한 각성, 세계시민으로서의 책임을 인식하도록 만든다.

 

사진 제공: 서울시극단

 

<키스>를 통해 칼데론이 전달하고픈 연극의 역할과 예술의 정치성과 관련된 부분은 세 번째 파트에서 구체화되는데, 충격을 받은 듯 침묵 속에 앉아있던 배우들은 자신들끼리 모여 무언가를 논의하더니, 이내 “다시 시작하겠습니다(We’ll start over)”라고 외치고는 앞선 연속극을 전혀 다른 방식으로 구현하기 시작한다. 연출의 자유로움이 주어지는 부분은 다름 아닌 세 번째 파트이다. 국내 공연의 경우, 전쟁터의 폭격과 폐허가 된 거리를 강조하려는 듯 중산층 거실이었던 무대가 실제 내전이 진행 중인 시리아로 급격한 변화를 겪는다. 배우들은 무기를 소지하고 사격에 응대할 뿐 아니라 폭격에 무너지는 건물 사이로 몸을 피한다. 첫 번째 파트의 주요 대사들이 그대로 인물들을 통해 재현되지만, 전혀 다른 상황에서 다른 연기로 펼쳐지는 무대는 엇갈리는 사랑과 배신에 관한 첫 번째 파트의 이야기에서 멈추지 않고, 점점 더 무언가를 덧붙이기 시작한다. 원작과 비교해 국내 공연의 아쉬운 점이 있다면, 세 번째 파트의 핵심은 배우들이 온 힘을 다해 새롭게 얻은 지식을 바탕으로 희곡을 재현하려 하지만 여전히 ‘실패’하고 있음에 좌절한다는 것인데, 그 부분이 충분히 드러나지 않았다는 점이다.

 

칼데론은 제대로 된 재현이 아닌 배우들의 지속되는 ‘노력’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데, 그것이 시리아 문화와 언어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면서도 시리아 내전이라는 긴급한 문제를 작품의 소재로 선택한 그의 의도와 일치하게 되기 때문이다. 더 나은 세상을 위한 노력, 세계 시민으로서의 인식과 책임에 대한 숙고는 잘 알지 못하는 것일지라도 ‘오해’와 ‘실패’를 딛고 ‘진정성’을 다해 바로잡고자 하는 의지와 탐구를 통해 관철될 수 있다는 그의 메시지는 배우들의 재현 노력이 처절하게 실패할수록 그 의미를 더하게 된다. 마지막 장면에서 바나는 완전히 지친 상태로 앉아 있는 다른 배우들 사이로 홀로 관객들을 향해 서 있다. 마이크를 들고 “누군가 노래하는 법을 가르쳐 줄 필요”가 있음을 언급하는 그녀의 모노로그는 “압제에 눌려 사느니 차라리 칼에 찔리고 말겠다”는 얌마 무웨일 엘하와(Yama Mweil El-Hawa)의 노래로 연결된다.

 

칼데론이 <키스>를 통해 전달하고자 했던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려는 의지와 탐구, 노력은 다른 문화권의 고통과 현실을 재현하려 애쓰는 배우들의 분투의 과정을 통해 관객들의 마음속에 감정적 회오리를 만들어낸다. 칼데론은 극장을 나선 사람들이 자신의 연극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연극이 제시한 주제와 복잡함에 대해 토론하기를 기대한다. 5타인의 고통에 무감각해지지 않으려는 노력, 먼 곳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지속적인 관심을 가지려는 의지, “특권을 누리는 우리와 고통을 받는 그들이 똑같은 지도상에 존재”6하고 있음을 숙고하는 감수성, 칼데론이 연극 <키스>를 통해 관객들에게 전달하고자 한 것은 바로 그것이 아니었을까?

 


 

  1. 수전 손택. 『타인의 고통』. 이재원 역. 이후. 2007. p.13.
  2. Ibid.
  3. José A. Sánchez. “Preface to the English edition.” The Bodies of Others Essays on Ethics and Representation. Methuen Drama. 2022. p.xxvii.

  4. Ibid.
  5. Elyse Dodgson. “When a ‘Kiss’ Is Not Just a Kiss.” American Theatre. 25 Sep 2017. Web.
  6. 수전 손택. 앞의 책. 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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