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극작가 탐방

글_이재진

 

연재를 다시 시작하며

대학로 무대에서 번역극을 심심치 않게 만나게 된다. <우리 읍내>, <벚꽃동산>, <세일즈맨의 죽음> 등 여러 작품이 단골메뉴처럼 매년 무대를 메꾼다. 때로는 브레히트, 뒤렌마트 등 독일작품도 무대에 오른다.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의 난처한 수준(번역, 연출)의 공연을 만나게 되면 부끄럽기도 하고 화도 난다. 번역자를 통해서 우리는 작가와 만나게 된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번역자의 위상이나 중요성이 그리 높지 않다.

이 연재를 통해 앞으로  (독일)드라마를 소개하며 공연평 등을 통해 작품주제를 분석하고 싶다. 시대별로 극작가를 선정해서 그분들의 작품을 (20여개 정도) 소개할 것이다. “2023년 독일 극작가 탐방”이 연극하는 사람은 물론 일반 관객에게도 제법 도움이 되었으면 기쁘겠다. 지난 번 연재했던 “스타니슬라브스키와 브레히트”, ”브레히트는 古典主義 작가인가“를 잘(!) 읽어보았다고 인사하는 사람을 요즘도 어쩌다 만나게 되면 무척 고맙고, 글 쓸 힘을 새롭게 얻는다.

얼마동안 집필하게 될지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다. 독자가 지루하다며 심하게 머리를 돌리고, 편집부에서 잽싸게 이를 눈치채고 차갑게 등을 돌리면 바로 끝낼 것이다. 고백하지만, 이제 내 ‘글힘’이 약해져서 독자를 잡아둘 자신이 점점 떨어진다. 더구나 기억력이 약해져서 이미 여기저기 썼던 글과 중복되고 엉키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럴 때는, 독자 여러분, 민망스럽게 내 허약해진 머리를 너무 나무라지 말고, 자신의 예리하고 빛나는 기억력을 기뻐하시라! (첫 번째 글에서는 번역상의 문제를 걸고 늘어지기로 했다.)

 

번역을 어떻게 할 것인가?

1970년 뒤렌마트의 <천사 바빌론에 오다>를 번역해서 이진순 선생님에게 드렸다. 극단 ‘광장’은 명동 국립극장에서 막을 올렸다. 공연 후 영감님은 내게 또 다른 독일 작품을 주문했고, 나는 클라이스트의 <암피트리온>을 선택했다. 헤라클레스의 출생을 다룬 독일 희곡 중에 보기 드물게 희극적인 이 작품을 번역하기에 학생인 나로서는 너무 버거웠다. 몇 줄 내려가지 않아 막히고 말았다. 지금 생각하면 별 큰 문제도 아니었지만 그 당시에는 전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서울을 온통 뒤집고 교수들을 찾아다녔다. 소용없었다. (그 당시 우리나라에는 독어독문학과가 서울에만 8개 대학에, 교수는 20여분 있었다.) 하숙집 딸과 결혼한 독일인 강사를 우연히 만나 쉽게 해결되었다. 분명 단수형이라야 되는데 복수형이라 이해하지 못했던 문장이다. 예를 들어보자. 주인공의 아버지가 남은 재산을 모두 정리하고는 만주로 훌쩍 떠났다고 하자. ”당신께서는 자식들보다는 조국의 독립이 우선이었을 것이다.“ 높인 말을 쓸 때 삼인칭이라 해도 때로 우리는 ‘당신’이라고 말한다. 외국인 번역자가 이를 번역한다면 어찌 이해할까? 고인이 된 그분은 한국음식도 모두 좋아했다. 연탄불에 넘쳐 타들어 가는 된장찌개 냄새를 제외하고는! 아- 오징어 타는 냄새였나?

고전작품을 예를 들어 아리스토파네스의 번역본을 출판하려면, 출판사로서는 누구의 번역으로 출간할지 고민하게 된다. 독일의 경우 드로이센(Droysen)의 번역이나 세거(Ludwig Seeger)의 번역 중에서 고르게 된다. 정치가이기도 했던 드로이센의 번역은 시형식을 충실하게 따르고, 슈바밴 지방의 하이네란 별명을 가진 세거의 번역은 (독일)독자가 읽기에 좀 더 부드럽다고 한다. 셰익스피어의 독일어 번역은 많지만 보통 슐레겔-티크(Schlegel-Tieck)의 번역본을 사용한다. 한 단어가 혹은 같은 문장이라도 사안별로, -종교적이던 정치적이던 간에-, 달리 번역할 수 있다. 예를 들어 70년대나 80년대 유행했듯, 고전작품을 공연하면서 <오셀로>의 데스데모나가 비키니를 입고 등장한다거나 <햄릿>의 주인공이 무대에 기관총을 들고 나오는 등 특별한 경우에는 그에 맞게 대본을 다시 만들기는 한다. 하지만 그럴 경우는 번역상의 문제를 떠나 연출상의 문제가 된다. 70년대 유럽은 무정부주의 시대였다. 연극무대는 재판정으로 바뀌고 사회를 단죄했다. 이때 셰익스피어, 실러 등 고전주의 작가들의 작품이 시금석이 돼 주었다. 햄릿이 기관총을 들고 등장하고, 오셀로는 무대 위에서 비키니를 입은 데스데모나를 강간하며 죽인다. 이런 시대적 혼란 속에, 관객과 무대사이에, 이를 연결해 주는 비평가가 필요한 것이다. 원작은 이미 학교에서 배웠고!

 

 

우리의 경우에도 많은 희곡작품들이 번역되어 출간된다. 번역이란 외국어를 조금 읽을 수 있다 해서 누구나 마구 덤벼들 수 있는 손쉬운 분야는 아니다. 때로는 며칠 밤을 뜬눈으로 밝히며 피를 토하며 삶과 죽음 사이를 헤매며 써 놓은 천재시인들의 귀한 독백을 별 책임감 없이 무성의하게 편한 마음으로 마구잡이로 번역을 한다면 이는 무모한 짓을 넘어 범죄행위에 해당될 것이다. 우리만큼 희곡문학이 서러움을 받는 나라도 드물 것이다. 우리 자체가 안고 있는 창작희곡문학의 낮은 질적 수준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도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못된 번역 때문에 많은 고전작품들이 망가지고 결국 이상하게 불구가 된 작품 앞에서 많은 독자가 외면하고 떠나는데 더 큰 원인이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연애편지 한 번 제대로 써보지 않은 사람이 당대 최고로 추앙받는 시인들의 작품을 함부로 주무를 수는 없는 일이다.

희곡의 경우는 다른 장르에 비해 많은 부분이 생략되어 있거나 압축되어 있기 때문에 번역자는 상상력이나 표현력이 풍부하고 작가와 맞먹을 정도의 시인의 예술적 재능이 있어야 한다. 시인이 타고나야 되듯이 번역자도 타고나야 된다. 그렇지 않으면 그 고귀한 작품은 모두 망가지고, 결국 고전작품들은 누구도 쓸 수 없는 쓰레기가 되고 만다. 때로는 그 고귀한 작품이 평범한 번역자의 수준으로 끌려 내려오게 되는 불상사가 일어날 수도 있다.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어디에 있느냐고 내게 따져 물을지 모른다. 이런 오만의 독설은 독화살이 되어 되돌아와 내 등에 꽂혀 오히려 내가 더 고통의 신음 속에 허우적거리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고뇌와 고통 속에서 번역일이 이루어짐을 강조하고 싶은 마음에서 망설이지 않고 독하고 험하게 감히 내뱉는 것이다. 번역은 사전의 말을 옮겨 놓는 안일하고 안이한 유희가 아니다.

지금 문화일보사가 서 있는 서대문 언덕배기에 동양극장이 있었다. 영화도 가끔 상영했다. 형들을 따라 가서 그곳에서 커그 더글러스가 주연한 ‘율리시스’란 영화를 보았다. 지금도 영화 속의 많은 장면들이 떠오른다. 지중해의 외딴 섬에 거인 족 외눈박이(cyclops) 괴물들이 살고 있다. 이들 중 폴뤼펨(Polyphem)이란 거인은 포세이돈의 아들로 평화롭게 홀로 가축을 키우며 살아간다. 길을 잃고 헤매다가 율리시스 일행이 물과 먹을 것을 구하기 위해 이 섬에 당도한다. 이들은 거인의 굴에 들어갔다가 잡히고 만다. 폴뤼펨은 멸치 먹듯 율리시스의 부하들을 잡아먹는다. 취하게 만들려고 율리시스는 포도를 짓이겨 거인의 입에 쏟아 붓는다. 포도주에 취해 기분이 좋아진 폴뤼펨은 제일 나중에 잡아먹겠다며 율리시스의 이름을 묻는다. 목마의 속임수로 10여 년간의 트로이 전쟁을 끝낸 영리한 율리시스는 만약을 생각해서 “내 이름은 우티스(‘utis’)”라고 대답한다. ‘우티스’는 영어로 하면 ‘no man(niemand)’ 정도의 뜻이다. 폴뤼펨의 눈을 찌르고 율리시스 일행이 도망치자 앞이 보이지 않는 외눈박이는 고함을 치며 동료들에게 도움을 청한다. 동료들이 여기저기 동굴에서 뛰쳐나와 누가 그랬는가 물으니 ‘우티스’가 그랬다고 대답한다. ‘사람이 그리하지 않았다’(no man)면 이는 분명 제우스가 혼을 내준 것이라 생각하고 동료들은 모두 자기들 굴로 들어가 버린다. 이 장면에서 ‘우티스’를 어떻게 번역해야 될까? 이를 제대로 번역하려면 두 가지 조건을 충족시켜 주어야 한다. 첫째, 이름의 형태를 갖춰야 한다. 둘째, 사람이 아니라는 뜻을 줘야 한다. 그래서 나는 ‘안사람’이라고 번역함을 주장한다. 우리의 번역판을 뒤져보면 이 부분이 생략되어 빠져있거나 아니면 번역되지 않은 채 ‘우티스’로 그대로 옮겨 놓았을 것이다.

 

 

번역하면서 내가 늘 부딪치는 어려움이 몇 가지 있다. 첫째는 외국어의 장벽이다. 일생을 독일 말과 씨름하며 살았는데 아직도 고전작품 하나 시원하게 번역해내지 못하니 부끄럽다. 이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다. 두 번째로 비교문학의 한계이다. 번역을 하다보면 어색하거나 뜻을 명확하게 표현하기 위해 과감하게 원문에서 벗어나고 싶다. 하지만 표현이 어색해도 그대로 머물 때가 있다. 그리고는 연출상의 문제로 떠넘기게 된다. 이를 나는 어쩔 수 없는 번역상의 한계라 생각한다. 잘못하면 원작가의 세계를 너무 파괴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런 한계를 얼마나 잘 넘나드느냐에 따라 번역의 질이 갈릴 것이다. 세 번째로 시공간의 극복이다. 특히 고전작품을 번역하려면 시공간을 초월해서 다른 차원의 세계관을 이해해야 된다. 몇 세기 전에 가졌던 어떤 시인의 생각을 이제 와서 훔쳐보며 상상하기란 보통 힘든 일이 아니다. 고도의 예술적 재능을 타고난 사람이 아니면 그런 상상의 세계에 파고들어가 다른 차원에서 고전작가와 만나 서로 대화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와 더불어 희곡번역은 무대에 올린다는 엄연한 사실이 전제된다. 번역할 때 그래서 나는 항상 머릿속에서 연출하며 작업한다. 대사를 무대에 맞게 만들려고 애를 쓸 뿐 아니라 심지어 연기자들의 위치에 따라 같은 말이라도 달리 선택한다. 같은 단어라도 경우에 따라, 상황에 따라 다른 뉘앙스를 갖도록 다르게 번역하게 된다. 그 뉘앙스의 섬세한 차이는 번역자가 찾아서 관객에게 들추어내 주어야 한다. 즉 같은 단어라 해서 어느 경우든 똑같이 번역한다면 최상의 번역은 아닐 것이다. 또 하나는 그 나라 관객이 그 말을 들었을 때 받아드리는 뜻이나 강도, 그 느낌을 우리 관객에게 가능한 대로 거의 같도록 번역한다. 90년대 초 브레히트의 <코카서스 백묵원>(그 당시 나는 ‘하얀 동그라미 재판’이라고 제목을 붙였었다.)이 대학로 문예회관 소극장에서 공연이 있었다. 그 작품에는 속담이 많이 나온다. 나는 전부 우리 관객이 이해할 수 있게 풀어서 번역했다. 어느 독문학자가 연습실로 항의전화를 했단다. 제목이며 속담의 번역에, – 글자 그대로 번역하지 않았다고 -, 불만을 가졌던 모양이다.

끝으로 희곡의 경우에 번역자는 연극계의 흐름을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어야 하고 더 나아가 연극에 대한 경험이나, 최소한 연극의 돌아가는 무대역학을 이해해야 된다. 드라마는 장르 특성상 종막을 향해 서둘러 달려가기에 중간 중간 쉬어갈 시간적 여유가 없다. 소설 같으면 상황이 여러 번 반복되고 보충하며 설명이 되지만, 드라마의 경우는 많은 부분이 압축되고 생략되게 마련이다. 그렇지 않다면 지루해지고 긴장감이 떨어져 관객을 사로잡는 드라마는 생겨날 수가 없다. 누가 이런 압축되어 숨겨진 부분을 찾아 내 본능적으로 냄새를 잘 맡느냐에 따라 번역의 질이 달라진다. 이런 야수적 본능이 부족한 사람이 번역했을 때 독자나 관객이 입는 상처(피해)는 상상을 초월하게 된다. 문장의 앞뒤관계도 고려하면서 특히 그 순간 극작가가 가졌을 법한 감정도 번역자는 훔쳐볼 수 있어야 한다. 그 단어 앞뒤에 숨어 있는 다른 말들을 상상해 낼 수 있는, 시인의 마음을 훔쳐볼 수 있는 도둑놈 같은 재주가 필요하다.

번역은 엄청난 힘이 드는 창조의 작업이다. 번역하는 사람들이 잠시라도 시인의 고통을 함께 괴로워하고 시인의 슬픔을 가슴에 묻으며 시인보다 더 크게 통곡한 적이 있을까? 우리의 무책임한 번역자들은 쉽게 작업을 끝내고 그럼 무엇을 하는가? 건강에 해롭다며 작은 소주잔마저 내 팽개치고 누런 주스 한 잔으로 목을 축이며 만족해하지는 않는가?! 그런 메마르고 무심하고 느슨한 마음으로 거대한 창조의 뜰 안에서 배회해서는 안 될 것이다.

셰익스피어, 실러, 헵벨 등의 언어는 인간의 언어가 아니라 살아있는 신의 언어이다. 영원히 되 물림 되는 우주의 진화 속에서 신도 지루했을 것이다. 잠시 지상에 내려와 이들 시인들의 이름을 빌려 인간의 갈등을 소재로 비극 몇 편을 쓰고 올라갔는지 모르겠다. 신들의 언어를 우리는 어떻게 번역할 것인가? 천재들의 이런 언어 앞에 우리는 가벼운 마음으로 덤벼들면 안 될 것이다. 집나간 자식을 위해 새벽에 일어나 몸을 깨끗이 씻고 냉수 한 사발을 떠 놓고 그 앞에서 기도하던 우리의 어머니처럼 우리는 간절하고 소박하고 경건하고 끈질긴 마음으로 시인들의 글을 두 손에 조심스레 담아 쥐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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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thoughts on “독일 극작가 탐방

  1. 글이 좀 무겁지만 느끼는바가 많습니다. 번역문학에서 번역가의 역할을 따갑게 지적한 글입니다. 앞으로 이런 좋은글 많이 접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2. “번역할 때 그래서 나는 항상 머릿속에서 연출하며 작업한다.”
    말씀에 무한 공감을 합니다.

    번역하시는 분들이 꼭 마음에 두시고 작업해야 할 말씀입니다.

    다음글도 기대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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