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두산아트센터 <댄스 네이션>

글_정애란(연극평론가)

 

이오진 연출, 무대 장호, 음악 단편선과 같은 패기넘치는 예술가들이 모여, 2023 두산인문극장 <나이, 세대, 시대>의 첫공연으로 미국 극작가 클레어 배런Clare Barron의 <댄스 네이션>을 올렸다. 2018년 뉴욕에서 초연된 <댄스 네이션>은 공연되기 전부터 주목을 받으며 그 문학성을 인정받았다. 미완성 대본으로 클레어 배런이 아직 작업 중이던 2015년에 미국의 극작가상인 ‘리렌트리스상Relentless Award’을, 2017년에는 미영 합작으로 여성극작가를 발굴하는 ‘수잔 스미스 블랙번상Susan Smith Blackburn Prize’을 각각 수상하였고, 2019년에는 퓰리쳐상 드라마부분에 최종후보로 오르기도 하였다.

 

 

배리어 프리?

한국에서는 2023년 이오진 연출에 앞서, <춤의 국가>라는 제목으로 래빗홀씨어터 윤혜숙 연출이 2020년에 무대화하여 주목을 받았는데 이것이 <댄스 네이션>의 초연이라고 할 수 있다. 청각장애인 무용수를 아미나 역으로 캐스팅했던 윤혜숙의 고민은 이오진의 무대에서도 발견된다. 소위 ‘배리어 프리’ 공연이라 하면, 비장애인 중심으로 완성된 공연에 “그저 통역을 얹는 것”1인데, 창작 단계에서부터 장애인을 포함한 다양한 ‘몸’들을 등장시킨 것이다. 공연 전체를 관통하는 가장 강렬한 장면은 루크와 주주의 첫경험에 관한 상상대화 장면과 주주 엄마와 패트의 갈등 장면이라 할 수 있다. 루크 역의 백우람과 주주 엄마 역의 강보람은 장애인 배우로서 이미 십여 편이 넘는 연극에 출연한 경력답게 매우 탄탄한 연기로 작품의 깊이와 울림을 이끌었다.

최근 공연계의 화두가 배리어 프리 공연이라고 하지만 우리가 생각해 볼 점은, 한국 대학들의 모든 연극학과에, 교강사나 학생들 중 어느 쪽이라도 장애인들이 과연 존재할 수 있는 구조인가 하는 점이다. 필자가 파리의 대학에서 수업할 때, 드라마트루지나 연극사와 같은 과목은 휠체어 탄 교수들이 가르치는 경우도 종종 보았다. 한국에서는, 정형화된 ‘미’에서 제외되는 특정한 ‘몸’으로는, 입학이나 입사부터 차단되고 무대에 오르기도 힘든 차별적인 현실 앞에 놓여있지는 않은가.

 

사진 제공: 두산아트센터

 

이런 구조에서 배리어 프리 공연은, 장애인들을 무대 저쪽의 관객석에 묶어놓고 대상화시키는 경계를 넘기가 쉽지 않다. ‘하는 자’와 ‘보는 자’로 구분짓고, 수어와 자막을 첨가하면 ‘정치적인 의무’를 다 하는 현실에서, 배리어 프리 공연은 오히려 행위자와 관람자의 구조적인 경계를 더욱 공고히 하여 그 구분을 넘지 못하도록 차별하는, 이분법적 이데올로기에 기여하고 마는 아이러니에 놓인다. 한국연극의 배리어 프리 공연이 정치적인 선전이나 구호 이상의 상징성을 갖기 힘든 이유이다.

장애연극이나 장애인연극의 정의도 모호한 채 남아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는, 가시화된 장애와 내면화된 장애들, 각자의 다양한 장애를 안고 살아가는 불완전한 존재라는 인식도 여전히 결여되어있다. 한국연극이 진정으로 장애-배리어들을 걷어내고 있는가, 예술 접근성은 진정으로 ‘개방 공유’되고 있는가 하는 배리어 프리 연극들의 그 실효성은, 장애연극이 곧 일반연극이라는 통합적 관점이 부재한 현실에서 구조적인 변화를 가져오지 않는 한 의문으로 남는다. 때문에 장애가 예술과 결합했을 때, 신체적, 정신적 불편이나 제약을 넘어 사회적 억압의 의미, 사회구조적인 의미로까지 확장되는 것이다.2

 

한편, 이오진 연출의 <댄스 네이션>은 과감하고 발칙하고 그래서 그 용기에 고마웠다. 숨겨지고 차단당했던 ‘몸’들-뚱뚱하고, 늙고, 느리고, 장애가 있고, 키 작고, 예쁘지 않은 몸이라고 사회적 편견으로 ‘판단’되었지만, 그렇게 불완전하기 때문에 너무나 인간적이고 비로소 아름다운, 담담한 현실을 묵묵히 대변할 수 있는 배우들-을 직접 무대 위로 불러낸다. 그동안 너무 쉽게 대상화되고 타자화된 변방의 인물들을 이내 당사자성으로 치환해 버린다. 그리고 당당하게 몸을 흔들어 춤 추기에 성공한다. 한국 사회를 대변한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표준화되고 획일화되고 균질화된 ‘몸’들로 결국은 사회적 편견에 올라타거나 더욱 강화시키면서, 인공적, 인위적, 그리고 위선적인 정치 무대를 만드는 연극들에 시원한 한 방을 날리는 <댄스 네이션>이었다.

 

사진 제공: 두산아트센터

 

댄스와 네이션

공연이 끝나고, 제목이 왜 <댄스 네이션>일까 생각했다. 우리는 언제부터 몸 흔들기-댄스를 멈추는가? 모든 아기들은 쉴 새 없이 몸을 흔든다. 모든 어린이들은 춤을 춘다. 모든 십대들도 댄스와 음악 없이는 살아가지 못한다. 그러면 우리는 언제부터 댄스를 멈추는 것일까? 나이가 들었다거나 철이 들었다거나 또는 어른이 되었다는 순간과 관련이 있을까? 우리 자신과 타인들을 국적, 나이, 학벌, 연봉 등의 ‘카테고리’로 구분하면 할수록 우리는 댄스에서 멀어지고 있는가.

<댄스 네이션>은 ‘나이’의 개념을 먼저 양의 변화로 즉, 시간의 축적으로 보면서 이로써 우리 ‘몸의 역사’로 인식하는 것 같다. ‘나이 들어 간다는 것’은 살아가는 것이고 또 죽어가는 것으로, 이 둘이 동시에 일어나는 현상이지, 삶과 죽음 그리고 늙어감이 분리되어 각자 소외된 채 진행되는 것이 아니다. ‘나이’와 ‘몸’은 그래서, 나이든 세대에게만 해당되는 문제가 아니라, 몸을 갖고 존재하는 우리 모두에게 해당되는 보편적인 문제인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 ‘몸의 역사’에서 “퇴적층처럼 남아 있는 십 대의 흔적”3을 <댄스 네이션>은 소환하고자 한다. 10대의 흔적이란, 아직 춤추고 싶던 시절, ‘카테고리’로 사람들을 나누기 전에 서로를 총체적인 존재로 인식하던 시절을 말한다고 할 수 있다.

10대를 소환함으로써, 그동안 ‘카테고리’의 분류 방식대로 살아온 10대 이상의 관객들에게, 그런 ‘카테고리’ 방식은 우리 모두를 파편화시키고 정체성을 해체시키지 않느냐고 질문하는 것 같았다. 우리 사회에 퍼져있는 ‘몸과 나이’에 대한 잔인한 이분법적인 이데올로기: 10대의 성적 욕망 표현은 이해되나 중년의 성적 욕망 표현은 도덕적으로 지탄받는 사회, 10대의 몸 흔들기는 당연하게 바라보나 중년의 몸 흔들기는 주책으로 보는 사회, 10대들은 중년세대와 끊임없이 문화적 차별을 두려고 거리두기를 하면서 독자적인 문화를 형성하고(예를 들면 페이스북에 중장년층이 많아지자 인스타그램으로 옮아감) 이를 따라가기에 바쁜 중년세대는 배제되거나 웃음거리가 되는 등 잔인한 이분법적 이데올로기는 우리 사회 곳곳에서 발견된다.

<댄스 네이션>은 10대 연기를, 20대부터 나이 지긋한 중년배우들의 몸까지 사용하여 별다른 분장이나 색다른 연기 없이 소화해 내는 것으로써 ‘몸과 나이’에 대한 잔인한 이분법적 이데올로기를 정면으로 마주한다. “몸을 통해 과거의 나를 현재의 나와 연결해”주고 어떤 여성의 몸이든 한때는 “소녀였으며, 한 여자였고, 지금의 내가”된다.4 이렇게 한사람의 ‘몸의 역사’를 존중하는 순간, 젊은 몸과 늙은 몸이라는 허구적 구별이 무의미하게 된다. 그 한 ‘몸’ 에 ‘몸들’이 모두 들어 있다는 인식의 전환인 것이다. 그 한 ‘몸’이 살아가고 늙어가고 죽어가는 ‘동시적인 몸’이라는 인식은, ‘몸과 나이’를 명사형이 아닌 동사형으로 인식하고 그리하여 진행형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여성이 된 몸에서 소녀의 흔적을 소환해 마음껏 흔들어대는 무대는, 만약 우리 인류에게, 우리를 왜곡시키고 분열시키는 ‘카테고리’를 뛰어넘는 오직 한 가지 ‘네이션’이 있다면, 그것은 ‘댄스 네이션’이라고 선언하는 것 같았다. 몸을 흔들기 시작하면 언어도, 국적도, 나이나 연봉의 차이도 필요 없고, 오로지 몸을 흔들고 있다는 사실, ‘댄스’의 세계만이 옳기 때문이다.

 

사진 제공: 두산아트센터

 

터부여성의 몸

마에브(홍윤희), 코니(이미라), 아미나(윤현길), 패트(마두영), 소피아(황미영), 루크(백우람), 바네사(강보람), 애슐리(부진서), 주주(장호인), 9인이 의도적으로 전시하는 ‘몸들’과 언어는 앞서 말한 대로, 유폐된 ‘몸들’의 드러내기였다. 특히 터부시 되어왔던 여성의 몸과 생식기는 가부장제의 억압과 근대의 욕망이 기술되어진 공간으로, 금기와 위반의 이중적인 영역이 된다.5 <댄스 네이션>에서는 생리, 자위행위, “누구의 보지도 내 보지만큼 훌륭할 수 없다는 것”을 노래함으로써 억압되고 폄하된 여성의 ‘몸’을 복권하려 외친다. 여성의 ‘몸’을 기존 언어의 틀 속에 집어넣는 것이 아니라, 금기와 금지의 언어를 파기하고, 양적, 질적인 변화가 계속 진행되는 몸 자체를 드러내고, 선언하고, 포고한다.

남자 선생님인 패트가 패러디하면서 전시하는 세계는 경쟁사회, 군대식 피라미드로 상하 복종하는 사회, 승자와 패자가 나뉘는 사회, 능력과 재능이 권력인 사회, 한 명의 영웅이 대중을 이끄는 사회, 한 영웅을 모두가 기다리는 남성성의 세계이다. 이런 세상에서는 여성성을 약함의 상징으로 정의하고 부정하지만 남자 또한, 신체적인 강함에서 오는 힘의 우월함을 과시하고, 슈퍼맨처럼 모든 문제를 책임지고 해결해야 하는 강요된 리더쉽과, 남자라면 눈물을 보여선 안된다고 하는 등의 남성다움 콤플렉스로 이어진다. 결국 왜곡된 여성성-남성성의 문제는, 여자-남자의 문제가 아니라 여-남 모두에게 연결된 하나의 문제라는 인식이 필요한 것은 두 말할 필요가 없다.

남성성을 보여주는 인물로 패트 이외의 유일한 남자 캐릭터는 루크인데, 루크는 장애의 몸을 전시한다. 대본을 뛰어넘는 이오진 연출의 탁월한 선택이 여기에 있다. 비틀리고 왜곡된 남성성 앞에 그동안 그토록 견고하다고 느꼈던 패트의 세상이 얼마나 허구였는지, 위대한 한 명의 영웅을 기다리는 패트의 세상에서 그 ‘고도’는 끝끝내 오지 않을 것이라는 것, 루크(백우람)가 사랑스러우면 사랑스러울수록 영웅이 없는 남성성이 실은 얼마나 사랑스러울 수 있는지를 매우 훌륭하게 구현한다.

아미나는 본인이 1인자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말하는 데에 힘겨워한다. 착한 소녀 컴플렉스에 길들여져 주주에게든 누구에게든 양보하고 2인자로 남는 것에 더욱 익숙해 보인다. 친구들로부터 자위행위하는 법을 배워 어설프게 실행한다. 입술 밖으로 새어나오지 못하고 침묵 속에 묻혀버린 말들, 여자는 앞에 나서면 안되고 항상 뒤에서 2인자에 머물라고 가르치는 강요된 미덕, 창녀 아니면 어머니로 욕정의 대상과 모성 사이에 떠밀려 세워진 허구의 자화상. 이율배반적이고, 사라지고, 묻히고, 떠밀리고, 지워진 그 세상 어디에도 아미나는 없다, 주주도 없다, 루크도 없다. 십대의 어린 ‘나’처럼 포기하고, 양보하고, 뒤에 서고, 조용히 하는 데에 익숙한 세상에 아홉 명의 십대들은 더이상 없다. 아홉 명 배우들은 둘로 찢겨진 여성성-남성성의 비틀린 몸을 묻어 버리려하는 세상으로부터 탈출하고 도주한다. 그들의 몸 흔들기-댄스는 해방의 몸부림이었다.

 

사진 제공: 두산아트센터

 

유폐되었던 ‘몸들’은 그 자체로 완성형이 되어 드러내고 나타나서, 왜곡되고 비틀린 세상을 흔들어 털어버린다. ‘보지송’을 부르며 뛰노는 그들의 무대는 비상구가 되고 피난처가 되었다. 입 속에서부터 내장기관 속으로 들어가는 구조를 형상화했다는 장호의 무대는 그래서 재미있다. 탈출하고 도주한 곳이 자기 자신의 내장기관이 된 셈이다. 자기 내면의 소리, 뱃속의 소리, 내장기관의 소리, 심장소리와 마음의 소리에 귀 기울이는 것이 바로 자기 자신을 찾아가는 길이고 그것이 해방의 길이라는 은유가 된다. 이 얼마나 환상적이고 아름다운 형상화인가! 마지막 ‘보지송’은 금기의 세월, 반역의 세월, 터부의 세월, 허구의 세월을 갈아엎고자 하는 십대들의 거부요, 이의제기요, 결전이었다. 필자가 10대였던 때부터 40여년이 지난 지금도 싸우고 있는 우리 십대들의 노래에, 그 고단함에, 그 분노에, 그리고 그 웃음소리에, 걷잡을 수 없이 눈물이 흘렀다.

올해 영 어덜트 연극을 표방하며 청소년 성장기 연극을 그리는 몇몇 작품들이 있었다. 극단 작은방의 <견고딕-걸>, 극단 비밀기지의 <소년대로>, 공놀이클럽의 <버건디 무키 채널 오프닝 멘트>, 앤드씨어터의 <유원> 등이 그들이다. 청소년 연극은 아동극과 성인극 사이에서 무엇보다 어려운 장르이고 제일 개발이 덜 된 황무지라고 할 수 있는데, <소년대로>를 제외하면 모두 여러모로 아쉬운 작품들이어서 청소년극의 쉽지 않은 현실이 그대로 반영되었다 하겠다. 그 중 <댄스 네이션>이 메마른 땅에 촉촉한 비를 뿌리며 해갈의 단비가 되어 주어 고마울 따름이다. 청소년극이 앞으로 나아갈 과감한 방향성을 보여주고, 파격적인 언어, 해체된 위선, 도발적인 반역을 계속 그려나가길, 10대들의 길들지 않은 영혼과 댄스로 무대를 계속 장악하기를!


 

  1. 윤혜숙 인터뷰, 올댓아트, <보고 듣지 못해도 공연을 즐길 수 있을까? 래빗홀씨어터가 찾아낸 ‘공동의 감각’>, 네이버포스트, 2021.06.02. https://post.naver.com/viewer/postView.naver?volumeNo=31645834&memberNo=37451778
  2. 전지영, <장애예술과 장애인예술의 개념 논의>, «한국예술연구» 2021, 32호, 195-215쪽.
  3. 장지영, <나를 감각하는 곳, 춤의 국가>, <댄스 네이션>프로그램, 두산아트센터Space111, 2023.05.02-20, 13쪽.
  4. 최은주, <오래된 나를 만나러 갑니다>, <댄스 네이션> 프로그램, 두산아트센터Space111, 2023.05.02-20, 9쪽.
  5. 윤혜옥, <여성의 몸과 젠더의식문정희, 김혜순 시를 중심으로>, «인문학연구» 2013,46호, 407-43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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