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프로젝트그룹 빠-다밥 <추락 Ⅱ>

글_윤서현(공연과이론을위한모임)

 

남아프리카공화국. 한 흑인 여자 수강생을 상대로 위계 성폭력을 저지른 백인 남성 교수 루리. 공연은 피해자인 멜라니의 고발로 열린 진상조사위원회의 회의 장면으로 시작된다. 과오를 인정하고 후회하지만 이에 대해 사죄하지는 않겠다는 그의 태도는, 진정한 뉘우침이 아니더라도 사건 종결을 위해 형식적이라도 사과의 모습을 보이라고 권유하는 몇몇 위원들의 태도에 비해 윤리적인 인상을 준다. 자기감정과 욕망에 거짓 없는 자신이 원하는 것은 멜라니와의 직접적인 대화인데 우리 관계를 잘 알지도 못하는 위원들이 멜라니를 대변한답시고 앉아있는 게 영 마뜩치 않다. 루리의 말과 태도는 공연 초반부터 이 인물을 아주 흥미롭게 만드는데 원작 소설에 기반한 동명 영화의 경우와 비교했을 때 이러한 지점이 더욱 명확해진다. 영화가, 루리가 성매매하는 장면이나 멜라니에 대한 일방적 접근, 진상조사위원회에 출석해 고상함과 오만함으로 무장한 발언을 늘어놓는 그의 모습, 그리고 그런 그를 당혹스럽게 바라보는 위원회 소속 동료들의 시선을 통해 작품 초반부터 루리가 ‘나쁜 주인공’ 혹은 적어도 ‘처음에는 나빴던 주인공’이라는 것을 명확히 해주는 데 비해, 이번 공연은 ‘자기 욕망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는 루리의 일관된 신념을 강하게 부각시켜 이 인물에 대한 관객의 가치 평가를 유보시킨다.

루리의 ‘추락’-제목의 한국어 번역에 대한 이견은 분분하지만-은 그가 대학을 벗어나 딸이 있는 한적한 농장에 머물면서 시작된다. 흑인 강도들의 성적 공격으로 딸 루시가 임신까지 했지만 그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농장에서의 삶을 포기할 수 없는 루시의 입장에서는 이웃 흑인 공동체의 가부장 페트루스가 ‘다스리는’ 지역 근처에서 살고 있는 만큼 그에게 의탁하는 것이 합리적인 생존법이다. 루리를 겁탈했던 이들 중의 하나가 페트루스의 친척 아이여도, 더 나아가 루시를 향한 공격 자체가 페트루스의 묵인 하에 이루어진 것이어도 어쩔 수 없다.

 

사진 제공: 서울연극협회

 

저항하지 않는 루시를 이 작품의 또 다른 주인공으로 받아들이는 일이 현대 관객들에게 쉽지 않아 보인다. 농장에서의 삶이 루시에게 어떤 의미인지 드러내는 장면이 충분했음에도 불구하고 사건 이후의 고통이 극심하게 표현되었기 때문인지 이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이곳에 계속 남겠다는 루시의 결정은 다수 관객들의 공감을 얻지 못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역사를 인지하고 있는 관객들의 경우에는 루시의 이러한 결정에 인종 간 화해의 제스처라는 상징적 해석을 했을 수도 있겠지만 그랬다 해도 ‘역사적 죄책감을 홀로 짊어진 백인 여성으로서의 루시’는 다소 관념적인 해석이다. 멜라니가 루리에게 카메라를 들이대며 침묵의 시선으로 등장하거나 또는 쉽게 죽음에 놓이는 말없는 거리의 개에 빗대어 표현된 것처럼 루시도 침묵과 시선을 중심으로 표현되었으면 더 나았을까. 다시 한 번 느끼지만 외국 작품의 컨텍스트를 관객에게 전달하는 것은 정말 어려운 문제 같다.

루시가 아버지를 설득하기 위해 언어를 사용하면 할수록 관객은 이 부녀 간 언쟁에서 한 인물의 의견을 선택해 기울게 되는데 이 때 상당수의 관객들이 루시의 논리에 설득되지 못하고 루리의 애타는 부성에 손을 들어주면서 루리는 선으로, 페트루스 일가는 악으로 받아들여지는 순간이 생긴다. 하지만 페트루스는 악이 아니다. 현대인의 관점에서 아무리 부조리해보일지라도 그 또한 공동체 유지를 위해 나름의 방법으로 애쓰는 인물이다. 그는 공동체가 사용할 무언가를 만들기 위해 끊임없이 움직이고 때로는 베풀 줄도 아는 지도자다. 입으로 먹고 살아왔고 많은 문제를 언어로 해결해온 루리에게 있어서 어눌한 영어를 쓰는 페트루스는 미지의 영역이다. 공연은 미지로서의 페트루스를 언어 특징뿐만 아니라 움직임의 속도, 시선 등으로 효과적으로 표현했다.

피해자가 된 경험이 루리의 삶에 얼마나 큰 변화를 가져온 것인지는 질문이다. 그는 여전히 멜라니의 집에 예고도 없이 불쑥 찾아와 용서를 구하고 그 부모에게 멜라니가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묻는다. 예의지국의 현대인이 보기엔 아무래도 여전히 염치가 없다.

 

사진 제공: 서울연극협회

 

작품의 말미, 개 안락사 일을 도와온 루리가 자신이 특별히 애착을 느꼈던 케이티라는 이름의 개를 안락사 시킨다. 케이티의 연기는 멜라니 연기를 맡은 배우가 함께 맡았는데 이로 인해 공연의 마지막 대사인 “이 개를 단념한다”는 루리의 말은 마치 멜라니에 대한 발언처럼 들린다. 또한 딸 루시도 멜라니처럼 약자, 피해자였다는 것을 떠올려보면 이 개는 루시이기도 하다. 여전히 이들에게 자신을 이해시키지 못해 안타까워하는 루리가 결국은 ‘단념’을 말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다 큰 자녀가 부모에게 자신을 ‘단념’하라고 요구할 때처럼, 이것은 안쓰러운 ‘포기’이면서 동시에 타자에 대한 ‘인정’이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이 겪어온 식민의 역사나 끔찍한 인종문제가 한국 관객들에게 고스란히 전달되기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을 선택한 과감함과 개인의 욕망과 타자의 존재 사이에서 발생되는 복잡한 심리적 층위를 그려내려는 시도가 훌륭한 작품이다. 많은 경우, 타 장르 기반의 소재들이 무대화 되면 등장인물의 성격이 전형화되는 경우가 있는데, 이 공연은 원작의 긴장감을 지속시키면서도 인물의 복잡 미묘한 심리를 곱씹어 볼 수 있게 세밀하게 각색되었다. 공간 사용, 특히 안락사 되는 동물들이 카트에 올라앉아 멍한 눈으로 어디론가 실려 가는 모습을 표현한 반복적 장면들이 인상적이다. 또한 언어적으로나 신체적으로 다양한 조건을 지닌 배우들을 캐스팅함으로써 타자와 경계에 대한 화두를 내용과 형식 모든 측면을 고려하여 효과적으로 전달하고 있다는 점도 놀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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