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배우 장용철이 만난 풍경_ 연극과 사람 2호

글_장용철 (극단 작은신화, 좋은희곡읽기모임)

 

 

2호_ 안티고네, 불쑥 죽기로 결심하다

 

엊그제였습니다. 밤은 깊고, 검게 내려앉은 어둠 속에서 길게 늘어진 영혼의 옷자락처럼 허옇게 흐르는 영산강의 한 줄기를 건너갈 수 있도록 그려놓은 듯 간단하게 마련된 다리 위에서 잠깐 몸을 멈추었습니다. 담양이었습니다. 드라마 한 컷 단역으로 출연하려고 5시간을 운전해서 도착한 대나무숲에서 밤은 깊고 깊어지다가 어느새 검은 공기가 푸르게 탈색되기 시작할 무렵, 10시간의 철야촬영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서 문득 지난밤의 메모를 머릿속에서 꺼내어 다시 읽었습니다.

바르게 지향할 줄 알아야 방황도 제대로 할 수 있다.

그러한 방황이 죽음으로 향할 때에도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에

명명백백 하나의 지향이 있었음에 감사할 것!

모든 문장을 정확하게 발음하기. 오늘의 책을 소리 내어 읽는 일은 우리를 어제와는 다르게 일깨웁니다. 소리 내어 읽을 때에는 토씨 하나 예외 없이 끝까지 발음하기. 모국어의 모음은 명랑하게 공명하며 우리말의 자음은 힘차게 우리 내면의 숨소리를 우뚝우뚝 세워놓습니다.

서울 대학로 연극인 동아리 ‘좋은희곡읽기모임’이라는 이름표를 붙여놓고 10여 년이 지나도록 희곡과 함께 세상의 안과 밖을 걸었습니다. 낯선 희곡을 펼쳐놓고 그 말들의 몸과 정신을 처음 만나 현존하는 육성으로 발음하는 일은 이미 알고 지내던 그 누군가의 이름을 더 깊고 간절하게 부르는 일과 같았습니다. 등장인물 전체 대사를 소리 내어 읽는 습관은 우리 눈앞에 닥치는 문장을 똑바르게 소리 낼 수 있도록 도왔습니다. 문장을 읽는 목소리가 누군가를 향하고 있다고 감각할 때마다 낱말들은 밝게 빛이 났고 그 순간 모든 페이지에 수놓은 듯한 불멸의 문장들이 드디어 ‘말’이 되어 또다른 생을 시작합니다. 종종 오래된 문장은 마음에서 떨어져나온듯 익숙한 시가 됩니다. 오래 불러서 무딘 노래가 됩니다.

“인간은 지향이 있는 한 방황을 한다.”

“어두운 충동에 사로잡힌 선한 인간은 바른 길을 잘 의식하고 있다.”

<파우스트> 제1권에 나오는 괴테의 문장입니다. 이 말에 혹해서, 전영애 선생님의 번역본으로 보름 남짓 소리 내어 다 읽었습니다. 모두 12111행입니다. 밑줄을 그어서 한 발 디디고 하나하나 페이지를 넘기며 천천히 높은 산을 오르듯 했습니다. 제1권 619쪽을 다 읽고 나자 20대의 괴테가 6주 만에 썼다는 소설이 궁금해져서 민음사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단숨에 읽고 곧이어 <파우스트> 제2권 891쪽을 꼼꼼하게 소리 내어 읽었습니다. 이전의 파우스트와 확연히 다른 일종의 폭발음처럼 진동하는 전영애 선생님의 문장으로 파우스트를 잠시 만났습니다. 읽는 내내 참 행복했습니다. 전영애 선생님의 연구주제인 ‘파울 첼란’의 시를 나도 읽어봐야지 하다가 우연히 앙드레 보나르의 <그리스인 이야기>를 집어 들었는데 결국 손에서 내려놓지 못하고 딱 걸려들었습니다. 눈앞에서 슬기롭게 흐르는 문장을 외면하지 못하고 하염없이 읽을 수밖에 어쩔 도리가 없어서 나는 호메로스의 문장을 다시 꺼내어 <그리스인 이야기> 1권과 <일리아스>를 동시에 번갈아 읽으면서 1주일을 꼬박 지냈습니다. 촬영으로 고단한 몸을 쉬게 할 겸, 담양에서 하룻밤 자고 일어나 ‘담양 소쇄원’에 들러서 시원한 물에 발을 담그고 앉아서 <그리스인 이야기> 제2권에 접어들었을 때 갑자기 정신이 번쩍했습니다. 제1장 <안티고네의 약속>이었습니다.

안티고네! 저항하는 첫 사람! 눈먼 아비를 떠나보내고 두 오빠마저 서로를 향한 칼끝에 매달려 이 세상을 떠나간 비통한 시절을 보내고 있던 안티고네는 명명백백 지향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무릅쓴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한편, 무릎이란 정강이와 넙다리 사이에 앞쪽으로 둥글게 튀어나온 신체 부분이며, 몸을 낮추며 심장을 땅에 더 가까이 하도록 돕는 지혜로운 관절이며, 무릎이란 다리가 있는 족속들이 좀 더 멀리 달려가볼 수 있도록 또 언제든 다시 몸을 일으켜 세상과 눈높이를 맞출 수 있도록 세련되게 설계되어 있으며, 우리가 대자연 속으로 걸어 들어갈 수 있다는 축복의 상징입니다. 돌연, 무릎을 꿇는다는 말은 온몸으로 굴복한다는 의미입니다.

 

 

안티고네는 불쑥 죽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죽음을 무릅쓰고 집을 나섰습니다. 안티고네의 방황은 저항이며 죽음의 길로 들어섰습니다. 안티고네는 무릎을 꿇고 들판에 버려진 오빠 폴뤼네이케스의 장례를 치렀습니다. 국가의 반역자는 절대로 매장하지 말라는 크레온 왕의 명령에 불복합니다. 안티고네는 죽음 앞에 무릎 꿇었어도 왕의 명령에는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무릅쓴다는 말은 필멸 앞에 무릎을 꿇을지라도 결코 굴복하지는 않겠다는 결심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런데 사실상 안티고네와 크레온은 우리 인생과 꼭 닮은꼴은 아닌가? 정말로 그렇다!라고 책의 저자 앙드레 보나르는 자문자답합니다. “우리는 크레온의 실수가 인간 본성의 일부임을 부인할 수 없다”라고도 말합니다. 동시에 “삶에 대한 전적인 사랑이 아니고서는 어느 누구도 죽을힘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주제를 안티고네를 통하여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고 강조합니다. 물론 비극의 주제가 어떻게 오늘날의 우리 영혼의 윤곽을 밝혀줄 수 있을까요? 다음 문장은 우리를 숙연하게 합니다. 이렇게 불쑥 고독이라니!

“비극이 끝나갈 무렵, 크레온에게나 안티고네에게나 커다란 위협이 다가온다. 그것은 바로 고독, 절대성에 사로잡힌 영혼들에게 학교가 되기도 하고 함정이 되기도 하는 고독이다.” (그리스인 이야기 2권 35면)

안티고네는 또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나는 증오를 나누어 갖기 위해 태어난 게 아니에요. 나는 사랑을 나누어 갖기 위해서 태어났어요.”

왕권에 대항하는 한 마디치고는 참으로 낯설게 진술하고 있습니다. 나는 당신의 말이 아주 틀렸다고 생각해요!라고 한다면 모를까 위와 같은 자백은 가련한 오이디푸스家의 비극성으로 우리를 또다시 사무치게 합니다.

알베르 까뮈의 희곡 <정의의 사람들>에서도 유일한 레지스탕스 ‘도라’는 말합니다. “증오라고 한번 발음해 보세요… 야네크는 그 증오라는 말을 할 줄 몰라요!” <정의의 사람들>에 등장하는 젊은 사람들 역시 분명한 ‘지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물론 ‘인생을 사랑해서 혁명에 뛰어든’ 야네크와 ‘인생을 사랑하지 않고 다만 정의를 사랑하는’ 스테판의 이야기는 다음 기회로 미루어둡니다.

인간의 지향은 방황 혹은 절대적인 실수를 유발합니다. 우리에게 실수가 없고 삶에서 실패가 첨삭되지 않는다면, 큰비가 없고 오로지 태양만 있어서 언제나 뜨겁고 밝으나 그것은 고작 사막에 지나지 않음과도 같습니다.

<그리스인 이야기> 제2권 안티고네의 약속은 결국 무엇일까? ‘합리적이고 정당한 공동체 내에서 개인의 자유(의지)가 꽃피우는 사회? ’ ‘바로 우리 자신에 대한 격렬한 신뢰가 운명에 맞서기 위해서 분연히 일어난다’는 진리? 굵게 밑줄을 긋고 잠시 침묵하였습니다.

“우리는 안티고네의 활활 타오르는 불꽃이 되기에 앞서서 크레온의 묵직한 흙으로 빚어졌다.”

이 문장은 ‘비극 작품을 감상하는 즐거움 가운데 가장 크게 발휘되어야 할 통찰력 있는 연민’입니다.

다시 파우스트로 돌아가서, 지향하는 인간이 어떻게 방황하는가? 장우재의 희곡 <여기가 집이다>에서 장씨는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종이에 적어놓은 자작시를 읽습니다. 지향하는 인간이 왜 방황을 하는가에 대한 근삿값은 어두운 충동을 지닌 우리가 이제는 선한 사람이 되려는 결심과 조우합니다. 그렇다면 죄짓는 일 역시 그 방황에 포함되는 것일까? 그러한 방황에 깃들게 마련인 어떤 무거운 고독에게 아래의 문장을 보냅니다.

나는 벌 받으러 이 산에 들어왔다

뒤돌아보는 사람은 지금 후회하고 있는 사람이다

이제는 괴로워하는 것도 저속하여

내 몸통을 뚫고 가는 바람소리가 짐승 같구나

슬픔은 왜 독인가

희망은 어찌하여 광기인가

나는 죄짓지 않으면 알 수 없는가

가면 뒤에 있는 길은 길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 앞에 꼭 한 길이 있었고, 벼랑으로 가는 길도 있음을

마침내 모든 길을 끊는 눈보라, 저녁 눈보라

다시 처음부터 걸어오라, 말한다

-詩, 황지우 <눈보라>를 장 씨 마음 가는 대로 시구의 순서를 편집하여 읽는다.

-장우재 희곡집 2, [환도열차] <여기가 집이다> 74면

여기서 2호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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