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극작가 탐방

글_이재진

계몽주의 연극 – 레씽, <에밀리아 갈로티>

 

I. 프랑스 고전극

하나님이 태초에 하늘과 땅을 만드신 후 “빛이 있으라! 말씀하시니 빛이 있었다.” (창세기). 요한복음의 1절에는 “최초의 말씀이 있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기독교는 말씀(logos)의 종교이지 형상의 종교는 아니다. 즉 보여주기보다는 알려주는(말하는) 종교이다. 이런 특성때문에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되면서 연극은 오랫동안 기반을 잡지 못했다.

종교적 틀에서 벗어나 인류가 ‘다시 태어난’ 것을 르네상스라 부른다. 영국은 셰익스피어 연극(엘리자베스 여왕시대), 프랑스는 바록크연극(루이 14세)에 일찍이 볼 수 없었던 연극의 전성기를 맞게 된다. 코르네유, 라신느, 몰리에르 등이 주도한 17세기 프랑스 연극은 그리스 고전(아리스토텔레스)이나 로마 고전(Horaz)의 작품이나 극이론을 본보기로 삼았다. 이들은 엄격한 원리원칙에 따른 “규범연극”(doctrine classique)을 추구했다.

루이 14세의 절대군주제 안에서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왕정이 온갖 서민들의 삶을 모두 규정했다. “짐은 국가(궁정)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규범은 물론 심지어 아름다움이나 고상한 것, 정신적인 것, 품위 있는 것이 어떤 것인지 등등. 연극무대는 세련됨을 요구했다. 궁중의 취향에 맞는, 그에 어울리는 고상한 도덕관, 세계관, 인간상을 추구했다. 극작가의 과제는 무슨 일이 실제 일어났는지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무슨 일이 일어날 수 있을지를 알려주는 것이다. 불확실한 것을 표현하는 것은 피하고 보편타당한 사실을(사실보다는 사실적으로) 보여준다. 연기나 대사 등은 품위를 살려서 예의범절이란 틀에서 벗어나면 안 된다. 신체나 외형적인 추함은 피한다. 예를들어 관객앞에서 살인하지 못한다. 그래서 비극적이고 궂은 상황은 무대 밖에서 처리한다(전령보고). 절대로 관객에게 등을 돌리고 연기하지 않는다. 원형을 찾기보다 고전을 모방한다. 비극의 주인공은 높은 신분을 갖는다. 사건을 여러 갈래로 키우지 않기 위해 1막 이후 새로운 인물은 등장시키지 않는다 등등.

특히 문제가 되는 것은 “3통일 법칙”(trois unités)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에서 한가지 사건을 24시간 내에(48시간까지 허용된다.) 처리하도록 요구한다. 장소의 제한은 없었지만, 프랑스 연극은 이를 추가했다. 무엇보다 화려하고 복잡한 바록크 연극의 무대장치를 전환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막이 바뀌었지만, 무대장치는 전환할 필요가 없을 때는 이 ‘장소’의 제한에서 벗어난다. 셰익스피어는 삼통일법칙을 무시했다. 독일 극작가들은 프랑스 고전비극에서 셰익스피어로 전향하면서 이 법칙의 굴레를 뛰어넘는다. 이후 프랑스의 연극전통에 예속되어 있던 독일은 연극뿐 아니라 문화적으로도 프랑스의 틀에서 벗어나게 된다. (뒤렌마트의 <물리학자들<은 이 삼통일법칙을 그대로 활용하고 있다.)

II. <아담의 죽음> (Klopstock. Der Tod Adams. 1757)

클롭스톡은 비중 있는 극작가라 할 수는 없지만 18세기 독일문학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작가이다. 3막으로 구성된 비극 <아담의 죽음>은 완성된 작품은 아니고 무대에 오를 만한 희곡작품도 아니다. 극적인 변화가 없고, 아담의 심리적 갈등만을 조용히 나열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껏해야 방송국에서 한번 방영되었을 정도다. 아담과 이브, 카인과 아벨, 실낙원 등 .. 독일극작가를 탐방하면서 제일 먼저 성경과 연관시켜 보고 싶었다. 독일 드라마에 성경만큼 자주, 많이 등장하는 소재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담

– 하나님은 이 아비에게 불멸의 영혼을 불어 넣어주셨다! 나에게 축복을 내리시고 나를 심판하신 그분의 형상을 나는 보았다! – 그분은, 그 위대한 경배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그분은, 너희에게 큰 고통을 주실 것이다, – 그리고 큰 기쁨도! 그러나 그분은 불멸의 생명을 다시 얻기 위해 너희가 죽어야 한다는 사실을 때때로 기억하게 해주실 것이다! … 서로 사랑하라! 너희는 모두 형제이다! … 하나님이 위대한 예언자를 너희에게 보내시면, 머리를 쳐들고, 하늘을 향해 기도해라, 그리고 너희들이 태어났음을 감사해라! – 그렇지만 너희들이 흙에서 왔으므로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 (마지막 말을 끝내자, 멀리서 육중한 소리가 들린다.)

기독교의 구약성경은 유대교의 경전인 타나크(Tanach)가 원전이다. 이에 따르면 낙원을 떠난 최초의 부부는 동쪽으로 가서 18년을 살다가 카인과 아벨을 낳는다. 아벨이 죽자 야훼는 힘들어하는 부부에게 세트를 낳게 해준다. 아담의 나이 130세였다. 아담과 이브에게는 아들 33, 딸 33이 있었다고 한다. 930세에 아담은 죽는다. 이브는 일주일 후 아담을 뒤따른다. 타나크에 따르면 카인은 노드(Nod)라는 곳으로 쫓겨났다고 한다. 야훼는 카인의 이마에 살인자의 증표를 붙여주었다. 그곳에서 많은 자손을 얻는다. 이런 질문을 던지는 사람들이 있다: 카인의 아내는 그런데 누구였을까?

 

실낙원. 보스턴 미술관(Benvenuto di Giovanni, 대략 1470)

 

III. 실낙원

미켈란젤로는 아담을 다듬을 때 무척 고민을 했을 것이다, 하나님이 흙으로 빚어 만든 이 최초의 인간은 배꼽이 있었을까?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이브의 벌거벗은 몸뚱이를 그릴 때 잠시 망설였을 것이다. 어미에서 태어나지 않은, 지아비의 뼈다귀를 빌려 주물러 만든 이브에게 산고의 흔적인 배꼽을 그려 넣어야 한단 말인가? 하나님이 당신의 형상에 맞춰 인간을 만드셨다면, 그런데 인간에게 배꼽이 있다면, 하나님도 배꼽이 붙어있단 말인가? 배꼽이 있는 하나님은 그럼 어미가 있단 말인가? 어미가 있는 하나님은 정녕 하나님인가? 끝내 포이어바하는(Feuerbach. 1804-1872) 이렇게 말했다. “인간이 인간의 형상에 맞춰 하나님을 만들었다!”

뱀의 꼬임에 빠지기 전 아담과 이브는 아래를 가리지 않아도 불편하지 않은 동물의 상태에 머물러 있었다. 선악과를 먹는 순간 이들은 허전한 아랫도리를 의식하게 되었고, 비로소 짐승의 단계를 뛰어넘어 이성을 가진 생명체로서의 첫걸음을 내딛게 된 것이다. 이브의 선택으로, 즉 하나님을 거역함으로써 인간은 하나님을 인식하기 시작하였다. 선악과를 먹기 전 아담과 이브는 하나님의 존재를 알지 못했다. 선악과를 먹는 순간 아담과 이브는 새로이 태어난다. 뱀의 예언처럼 아담은 신(하나님)만이 가지고 있던 분별의 지혜를 훔치고, 이브는 신만이 누리던 인식의 능력을 깨닫게 된 것이다. 노여움의 하나님은 아담과 이브를 당신의 뜰에서 쫓아낸다. 버림받으며 에덴동산을 떠날 때 짐승의 무지에서 벗어난 이들은 하지만 조금도 슬퍼하지 않았다. 낙원을 떠남으로써 최초의 인간들은 비로소 낙원을 찾았던 것이다.

IV. 계몽주의 연극

볼테르, 루쏘등 계몽주의 작가들은 이성을 앞세우고 자유와 평등을 부르짖었다. 이런 사상은 결국 프랑스혁명까지 불러온다. 레씽 (Lessing. 1729 –1781)은 작품의 주제, 극의 형식, 언어적 유희, 극적 재미 등에서 최초로 성공한 독일극작가라 평가할 수 있다. <민나>(1767), <에밀리아 갈로티>(1772), <현자 나탄> (1779) 등은 지금도 독일무대를 지키는 대표적인 독일고전작품으로 인정받고 있다. (*참조: 공연횟수를 통해 다른 작가들과 비교!) 레씽은 독일의 계몽주의 연극을 대표하고 새로운 시민비극도 구축하였다. 레씽의 작품은 독일희곡의 교과서와 같다. <사라 삼손>은 최초의 독일 시민비극, <민나>는 희극작품의 전형, <현자 나탄>은 넓은 관용이란 세계관을 품은 드라마로 인정받는다. 이론서인 “라오콘 논쟁”이나 [함부르크 연극론]은 예술적, 문학적 토론의 장을 열어주었다.

레씽은 신분의 벽을 허물고, 파렴치한 귀족의 권위에 도전하고, 시민계급의 의식구조 탈피, 인간의 관용과 포용, 종교자유 등을 폭넓게 작품에 녹여 넣었다. 맹목적으로 프랑스 연극에 치우쳐있던 일부 추종세력에 등을 돌리고, 코르네이유, 라신느 등 경직된 프랑스 고전주의 연극 대신에 셰익스피어를 내세웠다. 이런 움직임에 크게 동조한 괴테도 프랑스의 규범연극처럼 제한과 규제속에서는 천재적 작품활동은 불가능하다고 보았다.

<에밀리아 갈로티>에서 레씽은 삼통일 법칙, 무대위에서의 살인 등 엄격한 프랑스 규범극에서 많이 벗어나 있다. 주제면에서는 사랑을 둘러싼 음모로 구성되어 있으나 이를 국가권력의 차원으로 끌어올렸다. 이로써 정치적 드라마가 되었다. 점차 높아가는 시민의식에 맞추어 레씽은 군주의 폭력을 가시화시킨 것이다.

* 1961∼1962년

셰익스피어 2550, 괴테 2020, 버나드 쇼 1550, 실러 1350, 몰리에르 1170,

브레히트 1080, 레씽 1050

V. <에밀리아 갈로티>(Emilia Galotti)

군주에게서 딸의 순결을 지켜주기 위해 재판과정 중 많은 방청객 앞에서 딸을 칼로 찔러 죽이고, 군주를 권좌에서 쫓아낸 장군이 있었다. 레씽은 중세 로마에서 있었던 버지니아(Virginia)-사건을 이 비극의 소재로 삼았다. 하지만 로마의 이야기를 독일로 가지고 오지는 못하고, 무대배경이나 인물설정을 그대로 로마에 두었다. 더구나 민중의 반란은 취급하지도 않았다. 그랬더라면 물론 이 작품은 검열에서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구아스탈라 공국의 왕자(영주)는 에밀리아를 본 순간 한눈에 반해버린다. 오도아르도의 딸 에밀리아는 아피아니 백작과 약혼한 사이다. 백작에게 임무를 주어 멀리 떠나보내려 수작을 부리지만, 결혼을 앞둔 백작은 이를 거부한다. 군주와 하수인은 좀 더 노골적인 방법을 쓰게 된다. 일단 백작을 살해하고 에밀리아의 납치를 계획한다. 결혼식장으로 떠나는 두 사람을 도둑의 무리로 하여금 습격하게 만든다. 백작은 총상을 입고, 에밀리아는 왕자의 별장으로 피신하게 된다. 군주는 에밀리아에게 사랑을 고백하면서 그 속내가 드러나고, 백작은 죽으면서 왕자의 하수인이 누구인지 밝힌다. 군주에게 버림받은 백작부인이 나타나 이들의 음모를 밝힌다. 에밀리아가 얼마나 위험한 처지에 빠졌는지 오도아르도는 알게 된다. 에밀리아는 영주의 손아귀에서 빠져나갈 수 없음을 알게 되자, 순결을 지키기 위해, 아버지에게 죽임을 부탁한다. 아버지가 망설인다. 딸아이는 스스로 칼을 치켜든다. 아버지가 이를 저지하자, 에밀리아는 머리에 붙어있던 장미 한 송이를 꺾으며 비장하고 애통하게 노래한다. 아비는 순간 딸아이를 찌른다.

 

아비가 딸의 가슴에 칼을 꽂는 이 마지막 장면은 너무나 비장하다. 이 순간을 보여주기 위해서라도 기꺼이 나는 이 작품을 무대에 올리고 싶다. (<에밀리아 갈로티> 5막 7장)

 

에밀리아 예전에는그런 아비가 있었지요, 자신의 딸을 치욕에서 구해 주려고 날쌘 칼을 가슴에 꽂아준 그런 아비가, 그렇게 해서 딸아이에게 두 번째 삶을 안겨준 아비가. 하지만 그런 것은 이제 모두 옛날이야기에 불과하군요! 이제 그런 아비는 없단 말인가요?!

오도아르도 그런 아비가 없다니, 아가, 그런 아비가 없다니! (딸을 찌른다.) – 오 하느님,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쓰러지려 하자 팔로 껴안는다.)

에밀리아 장미꽃 한 송이를 꺾어트린다, 세찬 바람이 불어와 떨어트리기 전에! 입맞추렵니다, 아빠의 이 손에!

 

– 우리가 앞으로 다룰 극작가를 아래 적어본다. 독일희곡문학에 꽤 관심을 둔 독자라 해도 몇몇 이름은 낯설 것이다. Klopstock(1724-1803)은 최초의 독일극작가로 소개하고 싶었다. 배우이기도 했던 Curt Goetz (1888-1960)는 독일의 극작가로서는 보기 드물게 할리우드에 발을 붙였다. Günter Eich(1907-1972)는 방송극을, Waechter(1937-2005)는 새로운 어린이극을 소개하기 위해 명단에 끼워넣었다.

Klopstock, Lessing, Schiller, Kleist, Hebbel, Büchner, Hauptmann, Wedekind, Kaiser, Hasenclever, Goetz, Brecht, Eich, Dürrenmatt, Waech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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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thoughts on “독일 극작가 탐방

  1. “낙원을 떠남으로써 최초의 인간들은 비로소 낙원을 찾았던 것”
    인상적인 문구였습니다. 작금의 시절과 비교해 곱씹어볼수록 묘한 여운을 남겨주는 말인 것 같습니다.
    이번 글도 잘 읽었습니다, 교수님.
    무더위에 건강 늘 유념하시길 바랍니다.

  2. 사람에게서 소망을 찾아볼 수 없는 시대를 살아갑니다.
    무대에서 배우가 들고 나는 것 처럼, 세상에는 새로운 영웅들과 새로운 사상들이 등장하지만 내가 사는 세상은 언제나 혹독합니다.
    다행이 우리 인간들은 백년을 살지 못하고 다 죽으니, 다행입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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