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서울시극단 <겟팅아웃>

글_김기란(연극평론가)

 

역시 고선웅이다. 의심할 바 없이 그는 우리 시대 연극 장인(匠人)이다. 6월 23일부터 7월 9일까지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에서 공연된 <겟팅아웃>의 커튼콜을 보며 든 생각이다. 고백컨대 2005년 극공작소 마방진의 시작부터 고선웅의 공연을 보아온 나는 그의 연출의 정점이 <조씨 고아>(2015)라고 생각했다. 이후 그가 유사한 형식의 <낙타 상자>(2019)와 <회란기>(2022)를 무대에 올리며 전성기를 구가할 때는 오히려 매너리즘에 빠진 것은 아닌가 의심하기도 했다.

작년 서울시극단 단장으로 자리를 옮긴 고선웅의 첫 번째 연출작인 <겟팅아웃>이 궁금했던 것은 이런 맥락에서다. 여기에 남성이 연출하는 여성 이야기라는 점도 구미가 당겼다. 바야흐로 여성 연출가 전성시대, 여성 이야기는 여성 연출가에게 전유(專有)되는 듯한 상황은 항상 어딘가 불편했다. 고선웅 본인의 말처럼 “<겟팅아웃> 과 같은 사실주의 세트에서 공연한 적이 거의 없었던” 그가 사실적 환영을 요구하는 폐쇄 구조의 드라마를 어떻게 연출할지, 그 또한 기대되는 바 컸다. 결과적으로 <겟팅아웃>은 장인의 손맛으로 가능한, 섬세하고 완성도 높은 공연으로 구현되었고, 고선웅이 이전에 보여준 탈환영적 개방 구조의 무대들이 이와 같은 탄탄한 기본기를 바탕으로 가능할 수 있었음을 동시에 증명했다.

남성 연출가는 여성 이야기를 어떻게 풀어나갈까. 이 역시 무대로부터 분명한 답을 찾을 수 있었다. 관극 내내, <잘자요, 엄마>로 알려진 마샤 노먼(Marsha Norman)의 1977년 첫 희곡작품이라는 이유로 <겟팅아웃>을 여성 이야기로 지레짐작했던 나의 선입견을 아프게 실감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혹시 우리는“해당 작품에 대한 글이 아니라, 해당 작품이 향하는 것에 대한 글”에 익숙해져 가면서,‘일제히 향하는 것’에 작품을 끼어맞춰 왔던 것은 아닌가. 고선웅이 연출한 <겟팅아웃>은 여성의 이야기가 아니라, 인간의 편견에 대한 이야기였다.

 

사진 제공: 세종문화회관

 

<겟팅아웃>은 8년의 복역을 마치고 가석방 출소한 여성 알린(이경미 분)이 루이빌의 낡고 허름한 아파트로 돌아와 겪는 하루 동안의 이야기를 다룬다. 알린의 목표는 교도소에서 낳아 입양 보낸 아이를 찾아 평범한 엄마로 살아가는 것이다. 하지만 알린에 대한 온갖 편견을 작동시키는 주변 인물들은 알린의 이러한 소박한 목표를 방해한다. 새로운 삶을 위해 이름까지 알리에서 알린으로 바꾸었지만, 과거의 일탈이 현재의 편견으로 작동하고, 알린은 알리의 삶으로 돌아가지 않기 위해 격렬하게 저항한다. 동시에 부모로부터 보호받지 못했던 유년기, 음흉한 속내를 숨기지 않던 교도관들과 교도소에서 보낸 10대, 자신을 방어하고 생존하기 위해 만들어진 알리의 정체성은 교화를 거쳐 갱생되어 마땅한 것으로 치부된다. <겟팅아웃>은 늙은 교도관 베니(정원조 분), 비뚤어진 모성애의 엄마(박윤정 분), 포주였던 남자친구(서우진 분)의 도발 속에서, 알린이 자신의 또 다른 자아인 알리(유유진 분)와 갈등하는 심리극이 된다.

<겟팅아웃>의 메인 플롯은 가석방 출소 후 고군분투하는 알린의 갱생기지만, 주변 인물들을 통해 환기되는 알린의 과거(알리)가 서브 플롯으로 동시에 작동한다. 희곡텍스트에 내재된 알린의 메인 플롯과 알리의 서브 플롯을 동시에 사실주의 세트로 구현하기는 쉽지 않다. 과거와 현재가 교차되고 그 안에 작동하는 것이 행동이 아닌 심리일 뿐인 희곡텍스트를, 고선웅은 각각 현재와 과거를 지시하는 복층 구조의 무대를 알리만이 자유롭게 넘나들 수 있도록 연출함으로써, 시각화하는데 성공했다. 결과적으로 <겟팅아웃>은 드라마의 극테두리를 고수하여 드라마가 제공할 수 있는 극적 환영을 포기하지 않는 세련되고 고급진‘연극’이 되었다. 특히 극 중 교도소의 소등(消燈)을 암전된 인터미션으로 활용, 극적 흐름과 환영을 깨지 않으면서도 110분에 육박하는 러닝 타임이 지루하지 않도록 연출한 감각은 고선웅만이 할 수 있는 선택이었다.

 

사진 제공: 세종문화회관

 

무엇보다도 한 인물의 두 개의 자아를 두 배우가 연기하도록 설정한 부분이 흥미롭다. 알린와 알리는 동일 인물이지만 서로 다른 정체성의 인물이기에, 이런 내용을 반영하여 알린의 현재 삶을 재현하는 아파트와 과거 알린의 삶(알리)을 재현한 교도소가 동시에 노출되도록 무대를 만든 것도 탁월한 선택이다. 알리와 알린의 이름을 혼동하는 주변 인물들처럼 현재의 알린도 자신이 알리이어야 하는지 알린이어야 하는지 알 수 없는 내적 투쟁에 시달린다. 복층 구조의 무대는 과거와 현재, 일탈과 일상을 오르내리며 분열되고 간섭하는 알리와 알린의 시공간을 가뿐히 시각화한다. 두 인물이 한 공간에 동시에 존재하는 것처럼 연출된 덕분에, 관객들은 알린이 알리로서의 과거를 회상하는 심리를 섬세하게 따라갈 수 있었다. 알린의 과거 회상과 심경 변화에 따라 알리가 튀어나오고, 이때 무대 조명은 백색에서 주황색으로 바뀌었다가 다시 알린의 아파트 창틈의 햇빛으로 변화한다. 과거와 현재, 알리와 알린이 동시에 무대에 보이고, 만날 듯 만나지 못하는 이들의 어긋남은 정체성의 분열에 따른 지금, 여기 알린의 심리적 불안을 드러낸다.

알린의 정체성의 분열은 자신의 탓이 아니다. 부모로부터 보호받지 못했던 알린은 교도소에서도 위험에 노출된다. 누구도 그녀의 편을 들어주지 않고, 그녀의 말을 믿지 않는다. 부모, 교도관, 남자친구는 그녀를 착취하고 편견으로 대할 뿐이다. 이들의 태도는 알린에게 강제적으로 투사되고, 알린 역시 자신의 또 다른 자아인 알리를 폐기 마땅한 존재라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타인에 대한 편견은 이 과정에서 덤처럼 따라온다. 누군가의 호의조차 갓 출소한 알린에게는 악의가 될 수 있음을 늙은 교도관 베니와의 관계를 통해 보여준다. 베니의 능글맞은 행동과 다정한 말은 때때로 어긋나 그의 선의를 의심할 수밖에 없지만, 그가 알린에게 호의적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이런 점에서 루비(최나라 분)의 극 중 역할은 매우 중요하다. 루비라는 명명(命名)이 암시하듯 루비는 알린에게 보석같은 존재가 된다. 루비는 편견 없이 알린을 대하는 유일한 인물이자 자신의 존엄을 포기하지 않고 자신을 사랑하는 자존감 높은 인물이다. 루비는 선의와 일치된 호의를 보여줌으로써 알린이 편견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자신을 사랑하는 방법을 보여준다.

 

사진 제공: 세종문화회관

 

교화라는 명목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바꾸도록 강요받았던 알린은 자신의 정체성을 인정하는 것이 곧 사회에 적응하는 교화된 삶임을 알게 된다. 교도소는“범죄자를 교정하고 교화해‘건전한 사회인’으로 복귀”시키는 시설이다. 교도소 안에서의 교화가 혹 자신의 정체성을 송두리째 바꿔야 가능한 것이라면 그 얼마나 폭력적인가. 그것이 무엇이든 한 개인의 정체성을 강제로 변화하도록 요구할 수 있는 권리가 누구에게 있는가. <겟팅아웃>에서 교화의 의미란 인물의 자기 확신에서 찾을 수 있을 듯하다. 자신을 사랑하는 것만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인정하는 것만으로, 편견에 찬 세상에 던져진 알린의 삶이 나아질 것이라 확신할 수는 없지만, 최소한 그것이 세상에 교화되는 첫걸음인 것만은 분명하다.

알리와 알린이 드디어 만나 서로를 따뜻하게 안아주고 때맞춰 아파트 창틀의 화분에 빛이 드는 마지막 장면, 증오하고 경멸했던 알리를 마주 보며 지워버리고 싶었던 그 삶이 있었기에 지금의 알린이 이렇게 존재한다는 것을 감동적으로 수긍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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