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극작가 탐방

글_이재진

실러(Johann Christoph Friedrich von Schiller. 1759~1805)

-1부- <군도>

 

I. 실러-자료관(Deutsches Literaturarchiv Marbach)

실러는 1759년 11월 10일 넷카 강이 유유히 흐르는 작은 마을 마르바하에서 태어났다. 수년 전 나는 자료수집 차 그곳에 들른 적이 있었다. 자료를 대강 챙긴 후, 실러가 남긴 흔적을 찾아 골목이며 공원을 대강 둘러보고 떠날 계획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날 그 작은 마을을 떠날 수가 없었다. 시인의 체취가 나를 붙잡았던 것이다. 결국 이틀이나 그곳에서 묵으며, 내가 가장 사랑하고 존경하는 시인의 산 모습을 떠올리며 공원이며 골목길을 걷고 또 걸었다. 넓지 않은 공원에는 제법 높이 자란 나무가 하나 서 있다. 5살 먹은 어린 실러가 그 커다란 고목이 있는 공원에까지 올라왔었을까? 나는 나무에 기대서서 시인의 손길을 잡아보고, 공원길을 걸으며 바람에 실려 오는 그분의 숨결을 조심스레 들이마셨다. 어린 실러가 남겼을 발자국 위를 포개 걷는다고 생각하니 너무나 기분이 좋았다. 맥주 한 잔에도 흠뻑 취해 내 마음은 마냥 비틀거렸다.

 

마르바흐 공원의 실러 동상

 

II. 괴테와 실러

괴테와 실러는 외모나 성격에서 서로 제법 다르다. 실러는 호리호리하고 키가 굉장히 크고(180cm이상) 빨간 머리는 헝클어져 있었다. 괴테는 의젓하고 젊은 나이에 이미 시인으로서의 월계관을 쓰고 있었다.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난 괴테는 타고난 천재적 머리와 아담한 체격(170cm에 못 미침), 뛰어난 용모를 갖추고 있었다. 그 당시 어느 누구도 괴테만큼 모든 행운을 한 몸에 지닌 채 태어난 시인은 없었다. 괴테는 물리학에 관심을 두는 등 자연과 호흡하는 창조적인 시인인데 반해 실러는 피

나는 노력과 의지 속에서 역사에 몰두하며 창조해 내는 극작가였다. 자유분방한 괴테는 이슬람과 같은 종교와 동방철학과 언어에 관심을 두었지만, 실러는 칸트의 철학에 심취해 있었다. 괴테는 그림 그리기를 특히 좋아했으나 불행하게(!) 음악에만은 소질이 없었다. 극작가에게 이보다 더 치명적인 약점은 있을 수 없다. 드라마는 희비애락이란 선율을 타고 격하게 흐르는 예술형태이기 때문이다. 실러의 작품에 나는 여러 번 덤벼들었지만, 한 번도 나는 괴테의 드라마를 번역하거나 연출한 적이 없다. (실러를 1. 2부로 나누어, 괴테가 있을 자리에 또 한 번 실러를 앉혔다.)

 

1857년에 리첼(Ernst Rietschel)이 바이마르 시에 세운 괴테와 실러의 동상

 

자연은 괴테에게 자상하고 온화한 어머니로 다가왔지만, 실러는 자연을 정신세계를 보살피는 시녀 정도로 받아들였다. 괴테는 자연 속에 활보하는 삶을 즐겼지만 (한밤중에 프랑크푸르트와 다름슈타트의 100리 길을 말을 타고 달리곤 했다.) 실러는 방안에 처박힌 삶을 택했다. 변호사였으나 일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많은 유산을 받은 아버지를 두고 태어난 괴테는 대중적이고 절약하며, 검소한 편이었다. 하위 공직자를 아버지로 둔 실러는 오히려 귀족적이었고 낭비벽이 있었다. 두 시인은 귀족가문의 자손은 아니지만 괴테는 1782년, 실러는 1802년에 모두 귀족칭호를 받았다.

 

III. 실러의 연극세계

실러에게 예술은 일종의 종교와 같았다. 시인은 예언자요 전도하는 임무를 갖고 있다고 생각했다. 실러는 만하임 언어학회의 비서자리를 얻고자 1784년 학회에서 도덕적 산실로서, “연극무대의 기능과 역할”에 대해 강연을 했다. 그 당시 학회 회원은 연극을 일시적 오락거리로 간주했다. 이 강연에서 실러는 무대는 도덕적 산실이며 지혜를 실습하는 배움터임을 강조했다. 사회정치적 기능을 교육하는 산실이며 계몽의 도구이다. 연극무대는 아름다움을 창조하는 미학적 기관일 뿐 아니라 시대를 뛰어넘는 보편타당한 모범적 규범을 구현하는 도덕적 산실로 본 것이다. 연극무대는 국가와 종교에 이어 제3의 권력이다, 그러므로 국가행정 체제나 종교가 마비되어 법이 가동되지 않을 때는 연극이 도덕적 기관으로서 그런 역할과 기능을 할 수 있을 것이라 실러는 생각했다.

뷔히너(Büchner. 1813-1837)는 실러의 이상주의적 예술론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실러가 관객에게 도덕적 문제를 호소하고 교훈을 주려했다면, 뷔히너는 시인의 과제는 역사적 문제를 제시하고 그것에서 관객이 자연스럽게 무언가 배우는 것이 더 보람이 있다고 보았다. 실러처럼 너무 이상적으로 극대화하면 현실을 보여줄 수 없다고 뷔히너는 생각했다. 뷔히너는 실러보다는 셰익스피어나 괴테를 더욱 가깝게 느꼈다. 실러처럼 이상주의적 시인들은 하늘의 입맛에 맞추어 허수아비처럼 지나치게 떠들어댈 뿐, 그래서 살아 있는 인간의 모습은 적나라하게 표현하지 못한다고 뷔히너는 비판했다. 하이네(Heine. 1797-1856)는 실러의 작품은 적나라하게 현실 문제를 표현하고 있다고 뷔히너와 정반대의 견해를 보여준다. 즉 실러는 혁명의 거대한 이념을 작품에 담았다고 하이네는 주장한다. 하이네는 실러가 자유의 탑을 높이 세웠다고 믿기 때문에 실러를 위대한 시인으로 떠받든다. 니체(Nietzsche. 1844-1900)는 실러를 ‘도덕군자’라 비판하였다. 시인이란 예술을 통해 도덕이나 교훈을 크게 불어대는 나팔수 역할을 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즐거움을 주는 쪽이 더 보람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브레히트(Brecht. 1898-1956)는 이에 대해 회의적이었다. 실러가 살던 사회상황과는 이제 많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19세기 초 지식인들은 온통 이상주의에 들떠 여러 가지 요구를 크게 떠들어댈 수 있는 주체였지만, 20세기는 그런 요구 자체와 맞서 싸우는 투사가 되었기 때문이라는 주장이다. 연극은 이제 실러가 말하듯 도덕적 산실이 아니라 사회를 변화시켜, 결국 인간을 변화시키는 구심점이 되어야 한다고 브레히트는 주장한다. 실러가 인간을 변화시키려 들었다면 브레히트는 사회를 변화시키려 한다. 브레히트는 인간을 구하기 위해 세상을 변화시키려 한다면 실러는 자유를 얻기 위해 인간을 변화시키려 했다. 실러에게는 인간이 변해야 자유를 얻게 된다면 브레히트에게는 사회구조가 바뀌어야 인간은 자유를 얻게 되는 것이다.

 

 

IV. 실러의 작품. <군도>, <간계와 사랑>, <메시나 신부>

실러는 우주의 진리를 모두 섭렵한 듯 화려한 괴테와 같은 사치스러운 천재는 아니었다. 늘 가난했고 늘 건강이 좋지 않았던 실러는 사치할 여유도 그럴 시간도 없었다. 시끄럽게 떼를 쓰던 클라이스트와 같은 광기 어린 천재도 아니었다. 실러는 머리를 감싸며 책상에 앉아 인내하며 기다리며 이상을 부르짖으며 썩어가는 사과 냄새에 마취되어 글을 쓰는 관념적, 이성적 천재였다. 하지만 누가 실러의 언어를 흉내 내 자기 작품세계 속에 담고 싶지 않으랴! 실러의 언어는 인간의 언어가 아니라 살아있는 신의 언어이다. 영원히 대물림 되는 우주의 창조 속에서 신도 지루했나 보다. 잠시 지상에 내려와 실러란 시인의 손을 빌려 인간의 갈등을 소재로 비극 몇 편을 쓰고 다시 올라갔는지 모르겠다. 그렇지 않다면 인간이 어찌 그토록 깊고 높은 언어를 구사할 수가 있단 말인가?!

1) <군도>(Die Räuber. 1781)

 

2016 Münchner Residenztheater

 

18세기 후반을 문학사에서는 ‘폭풍노도’시대로 구분한다. 이 시기는 계몽주의 시대로 온통 규칙과 관습에 얽매인 채 교육, 계몽에 매달려 있었다. 이에 반발하여 젊은 새로운 세대가 고루한 기성세대의 등을 뛰어넘으며, 머리 대신에 가슴을, ‘이성 대신에 감성’(emotio – ratio)을 내세우며 등장하게 된다. 이들은 강인하고 거칠고 열정적인 인물을 작품의 주인공으로 내세웠다. <군도>의 주인공 카알 모아는 도둑의 우두머리가 되어 자기 방식대로 정의를 구현하고자 덤빈다. 이들은 관습이나 법규를 벗어던지고 자신들의 규율을 찾아 부르짖는다.

실러의 <군도>는 ‘카인과 아벨’의 성경적 모티브와 ‘법과 자유’ 사이에서 벌어지는 사회적 모순과 갈등을 다룬다: 모아(Moor) 백작에게는 아들이 둘 있다. 동생(Franz)은 형(Karl)에 비해 성품이나 외모에서 부족하다. 더구나 차남으로 상속권도 없다. 늘 형을 부러워하며 시샘한다. 카알은 유학을 떠나고 집에 남아 있는 동생 프란츠는 형과 아버지 사이에 오가는 편지를 위조하여 간계를 꾸민다. 그로 인해 형은 아버지에게서 버림받고 이에 분개한 카알은 아버지에 대한 분노를 사회전체로 확산시켜 나름대로 정의를 구현하려 든다. 도둑의 우두머리가 된 카알은 홍길동처럼 나름대로 정의를 위해 싸운다. 카알과 친구들은 도둑의 무리로 남아, 죽는 순간까지 서로 배반하지 않기로 맹세한다. 카알은 아말리아가 너무 보고 싶고, 돌아가셨다는 아버지가 궁금해서 고향에 돌아온다. 아버지의 재산을 독차지하고, 형의 애인까지 넘보던 프란츠의 간계는 폭로되어 밝혀진다. 카알은 분노한다. “나는 태양을 올려다보지 않을 것이다, 아버지를 죽인 놈의 피가 햇빛에 모두 말라 날아갈 때까지. (4막5장)” 프란츠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아들이 도둑의 우두머리임을 알고 아버지는 쓰러져 죽는다. 카알은 자기를 아직도 사랑하고 있는 아말리아에게 돌아가려 한다. 하지만 도둑의 무리들은 옷을 찢어 온몸의 상처를 보이며 숲속에서 맺은 ‘배반하지 않겠다’는 맹세를 상기시킨다. 카알은 죄 많은 자신이 돌아갈 곳이 없음을 인정하고 운명으로 받아들인다. 아말리아는 카알이 맹세 때문에 도둑의 무리와 헤어질 수 없는 것을 알고 더 이상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한다. 카알에게 다가가 죽음을 간청한다. (5막 2장)

 

아말리아  (카알의 무릎을 부둥켜안고) 오 제발,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이제 사랑 따위는 바라지도 않겠어요, 저편 하늘의 우리 두 사람의 별이 서로 등지고 멀어지고 있는 것이 보이지요- 제가 바라는 것은 오직 죽음이에요. … 이 떨리는 손이 보이시나요, 나는 내 손으로 심장에 칼을 꽂을 용기가 없네 요. 번쩍거리는 칼날이 무섭거든요. 당신이라면 식은 죽 먹기겠지요. 살인에 는 당신 도가 텄잖아요. 칼을 뽑으세요, 그러면 나는 행복해질 거예요.

모아    당신 혼자만 행복해지려고? 저리 가시오, 나는 여인을 죽이지 않소.

아말리아    하, 살인자 주제에! 당신은 행복에 겨운 사람들만 골라 죽이나 보죠, 삶이 지겨운 사람들은 못 본 척 지나쳐 버리고. (기어서 다른 도둑들에 게 간다)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망나니의 수제자님들! – 당신들 얼굴 에는 피에 굶주린 동정의 빛이 역력합니다, 가련한 사람에게는 오히려 그것 이 위로가 되는군요 – 당신들의 스승은 시시한 겁쟁이 허풍쟁이에 불과하답 니다.

모아    무슨 말을 하는 거요, 여인? (도둑들이 몸을 돌린다.)

아말리아    친구가 하나도 없나요? 이 많은 이들 중 나를 도와줄 친구가 하나 도 없다니! (일어난다.) 그럼 좋아요, 나 스스로 해결하는 수 밖에! (나가려 하자 도둑 하나가 칼을 꺼내, 찌르려 한다.)

모아    잠깐! 그래 좋다, 모어의 여인은 모어의 손에 죽어야 한다! (찌른다.)

 

1782년 만하임 극장의 초연 때 사용한 <군도>의 프롬프트 노트북

 

“모아의 여인은 죽어야 한다면, 모아의 손에 죽어야 한다.” 카알 모아는 죽어가는 연인 앞에서 전율한다. 자신은 썩어빠진 사회를 고발하고 처단하려고 덤볐다. 잘못된 세상을 치유하기 위해서라면 어떤 끔찍한 방법도 용서받고, 옳은 목적을 위해서라면 어떤 수단 방법도 가리지 않는, 잘못된 법을 고치기 위해서라면 경우에 따라 끔찍한 불법이라도 수용하려는 자신이 잘못되었음을 깨닫는다. 카알은 스스로 법의 심판을 받는다.

레씽 이후 독일의 연극풍토는 점차 프랑스의 “규범연극”(doctrine classique)에서 벗어나고 있었지만, <군도>는 여러 면에서(20개가 넘는 장면변화, 살인 등) 아직 공연하기에는 너무나 획기적이었다. 실러는 출판용이란 의미로 레제드라마(Buchdrama)라고 부제를 붙였다. 출판사를 찾지 못하자 결국 사비로 800부를 찍었다. 익명으로 발표된 <군도>는 엄청난 주목을 받는다. 굉장한 성공을 거두긴 했으나 여러 곳에 약점이 드러나기도 했다. 간계와 술책이 너무 인위적이고 너무 감상적이고 인간성의 고찰이 부족했고 등등… 하지만 실러에게서 마치 “자연스러운 인간은 선하고 좋다. 모든 악이 솟아나는 곳은 인위적으로 잘 꾸며 놓은 바로 이 사회이다.”라는 루쏘의 세계를 보는 듯 하다.

1782년 1월 13일 만하임 극장은 흥분의 도가니에 휩싸였다. 4시간에 걸친 긴 공연이 끝나고 9시에 막이 내리자 극장 안은 마치 뜨거운 용광로처럼 이글거렸다. 관객은 주먹을 불끈 쥐고 눈을 휘둥그레 뜨고, 발을 구르며, 낯선 사람들끼리도 흐느끼며 서로 얼싸안았다. 그렇게 오랫동안 기다리던 독일의 셰익스피어가 드디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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