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극단 신작로 <새빨간 스피도>

글_주하영(공연비평가)

 

1983년 미국의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은 기업인들과의 간담회에서 “미국은 누구든 어디서 왔든지 간에 열심히 일하기만 하면 성공할 수 있는” 국가이며, 삶에서 마땅히 누려야 할 것들을 각자의 능력에 따라 스스로 손에 쥘 수 있는 사회임을 강조했다.1 이른바 ‘미국의 꿈(American Dream)’이라고 부르는 이 개념은 1931년 미국의 역사가인 제임스 트루슬로 애덤스가 처음 언급한 이후 많은 미국 대통령들의 상투적 문구가 되어 왔다. 계층이나 출생에 상관없이 각자의 능력에 따라 모두에게 공평한 기회가 주어져 삶이 더 풍요롭고 풍족해져야 한다는 애덤스의 개념은 ‘능력주의(Meritocracy)’라는 정치철학과 함께 모두가 ‘승자’가 되기 위해 무한 경쟁을 벌이는 경주를 만들어냈다.2

극단 신작로는 미국의 극작가 루카스 네이스(Lucas Hnath)의 2013년 작품으로 능력주의와 미국의 꿈, 공정과 윤리에 대해 질문을 던진 연극 <새빨간 스피도(Red Speedo)>를 국내 초연으로 선보였다. 하계 올림픽을 1개월 앞둔 수영선수의 도핑(doping) 문제를 중심으로 재능과 유전적 요인의 상관관계, 불공정과 공평의 개념, 스포츠와 경쟁 윤리, 원칙과 선택, 배신과 욕망의 주제를 다룬 네이스의 작품은 2016년 3월, 뉴욕 공연을 선보이며 오비상(Obie Awards)을 수상했다. 극단 신작로는 원작의 제목을 번역함에 있어 ‘새빨간 거짓말’을 떠올리게 되는 단어를 선택함으로써 국내 공연의 방향성을 드러냈는데, 이는 작품 속 인물들이 모두 거짓을 통해 상대를 이용하고 욕망을 성취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사진 제공: 극단 신작로

 

네이스의 원작의 경우, ‘레드(red)’라는 색은 글로벌 1위 수영복 브랜드인 ‘스피도(Speedo)’와 연계되면서 성공을 향한 강렬한 욕망과 투쟁을 상징하는데, 마지막 장면에서 형인 피터(Peter)와 동생 레이(Ray)의 유혈을 동반한 결투 장면과 연결되며 상당히 강렬한 이미지를 남기게 된다. 극단 신작로의 <새빨간 스피도>의 경우, 관객을 비롯한 창작자의 안전을 고려해 물리적⸱심리적 자극이 될 수 있는 요소들을 제외하는 ‘트라우마 프리’를 지향하기 때문에 극작가가 의도한 ‘유혈’ 부분이 반영되지 않은 특징이 있다. 따라서 원작이 겨냥하고 있던 미국의 꿈의 허상과 폭력적 억압, 성공이 품은 함정과 잔인함의 주제의식이 약화된 부분이 있다. 대신 수영선수이자 도핑 문제의 핵심에 있는 레이를 중심으로 형 피터와 수영감독, 전 여자 친구이자 스포츠 치료사인 리디아(Lydia)와의 ‘관계’에 보다 주목할 수 있는 장점을 갖게 된 것으로 보인다.

극단 신작로의 <새빨간 스피도>의 또 하나의 특징은 젠더프리를 적용해 남자 선수인 레이 역에 여자 배우를 캐스팅했다는 점이다. 네이스는 주인공 레이로 하여금 등 전체를 덮고 왼쪽 다리까지 이어지는 바다뱀 문신을 한 채로 시종일관 무대 위에서 빨간색 삼각 수영복을 입고 있는 것으로 설정하고 있다. 작가가 피터와 감독, 리디아와 다르게 몸을 드러낸 레이를 설정한 것은 운동의 특성상 ‘몸’이 노력과 헌신을 드러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스포츠 대회의 메달이 기업의 홍보와 매출을 위한 이미지와 연결되면서 ‘몸’이 상품화되는 측면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또, 일반적으로 남자 수영선수의 올림픽 메달이 더 크게 주목받고 기업들의 홍보 모델을 위한 대상이 된다는 점을 인식한 현실의 반영이기도 하다. 4살 때부터 수영을 시작해 경제적 어려움으로 인해 감독에게 무료로 강습을 받으며, 국가대표 선수만을 목표로 현재에 이른 레이에게 ‘몸’은 성공으로 갈 수 있는 유일한 자산이자 도구이다. 레이가 몸에 그린 바다뱀 문신은 물에서 속력이 가장 빠른 선수가 되고픈 강한 욕망의 표현이기도 하지만, 수영모와 물안경으로 인해 자신의 개성을 드러낼 수 없는 수영선수가 스스로를 구별되도록 할 수 있는 정체성의 표현이기도 하다. 더불어 법과 윤리, 원칙의 경계를 빠져나가는 미끄러운 뱀의 성질과 그리스 신화의 히드라(Hydra)를 떠올리게 하는 괴물, 혹은 난관을 상징하기도 한다.

 

사진 제공: 극단 신작로

 

이영석 연출은 프로그램북을 통해 젠더프리 캐스팅에 대해 “남녀 구별이 엄격한 수영계 이야기에 남녀를 가로지르는 육체와 관계 양상을 부여하는 것”이 취지라고 설명했다.3 성별을 이분법적으로 가르는 경계를 허무는 일종의 도전의 의도가 있었던 셈이다. 젠더프리 캐스팅이 극작가가 의도한 몸의 상품화의 메시지를 약화시킨 점이 있고, 여자 배우가 반신 수영복을 입게 되는 설정으로 인해 바다뱀 문신이 상징적으로 크게 다가오지 않는 결과를 가져오기는 했지만, 작품의 주요 메시지 전달에는 큰 차이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사실 네이스가 공정과 경쟁, 윤리에 대한 주제를 다루면서 스포츠를 배경으로 한 것은 미국 안에서 스포츠가 “진정으로 능력주의적인 몇 안 되는 경우”에 해당하기 때문이었다.4 2012년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ESPN과의 인터뷰에서 사람들이 스포츠에 매료되는 이유를 설명하는데, 스포츠의 경우 “대충 어떻게 된다는 게 거의 없고, 철저한 기준에 따라 판명”되는 특징이 있기 때문이라고 강조한다.5 네이스는 운동선수의 도핑 문제에 전 국민이 관심을 가질 뿐 아니라 미국이라는 나라의 정체성과 사회의 신념까지 언급하게 되는 부분에 흥미를 느낀다. 그는 세계 반도핑 선언문을 찾아보면서 경쟁 스포츠에서 경기력 향상 약물로 지정된 것들을 금지하는 가장 큰 이유가 ‘안전’에 있다는 점에 주목한다. 선수들의 몸에 해로운 부작용을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이 첫 번째 이유이고, 불공정한 이득을 얻는 방식이 경쟁 정신에 위배된다는 것이 두 번째 이유라는 점은 연극의 아이디어가 된다.

경쟁을 통해 국가대표 선수가 되고, 스피도사와 후원 계약을 체결해 명성과 부, 지위를 얻고자 하는 ‘꿈’을 지닌 레이는 수영 클럽에서 쫓겨날 위기에서 리디아의 도움을 통해 1위로 올라선다. 전국대회에서 마이클 펠프스를 두 번이나 이긴 레이는 유력한 우승후보이지만 그의 승리는 ‘HCG’라는 호르몬제 투여와 관련이 있다. HCG가 든 아이스박스가 수영 클럽 공동 냉장고에서 발견되고, 레이의 형이자 보호자, 관리자인 피터는 감독에게 약물이 발견된 사실을 수영연맹에 보고하지 말 것을 요청한다. 변호사인 피터는 팀 선수 중 한 명이 경기력 향상 약물을 사용했다는 사실이 동생 레이의 기록에 의심을 살 수 있음을 염려하지만, 호르몬제가 레이의 것임을 모르고 있다. 감독은 원칙을 강조하고, 피터는 모두의 이득을 따지며 자신의 의지를 관철하려는 가운데, 레이는 경기에 사용할 약물을 확보할 방법에 골몰한다.

 

사진 제공: 극단 신작로

 

 

네이스는 2014년 담화에서 워싱턴 D.C 공연 후 ‘관객과의 대화’에서 도핑을 나쁘지 않은 것으로 바라보는 시선을 지적한 관객의 상당한 비판이 있었음을 언급하는데6, 마지막 장면에서 인물들이 모두 도핑 문제를 뒤로하고 앞으로 나아갈 것 같은 뉘앙스를 남기기 때문이다. 하지만 작가의 관심은 인물들의 이후 선택이 아닌, 능력주의와 재능, 유전적 요인과 공정에 대한 의문 제기에 있다. 네이스가 레이의 대사나 다른 인물들의 행동을 통해 관객들에게 던지는 질문은 다음과 같다. 선천적으로 테스토스테론을 더 많이 몸에 지니고 있거나 유전적 요인에 의해 우수한 신체를 가진 경우, 그렇지 않은 선수들은 재능을 불공평의 요소로 볼 수 있을까? 또, 스포츠를 통해 성공에 이를 수 있는 사회에 산다는 것은 그 자체로 하나의 기회의 이점이나 행운을 가진 것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한 번의 실수가 모든 기회를 박탈하는 사회에서 다른 사람을 끌어내리지 않고 두 번째 기회를 가지는 것은 가능할까? 그리고,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 자기 자신에게 최선인 것을 행하는 게 결국 모두에게 이익”이라는 피터의 말에 과연 우리가 동의할 수 있을까?

매 순간 이겨야만 하는 것이 지긋지긋하면서도 앞만 보고 달리는 세상, 책임져야 할 것과 감당해야 할 것을 ‘모두를 위한 선택’이라는 합리화로 외면하는 이기심, 연인이나 형제조차 이득을 먼저 생각하고 서로 이용하는 무신경, 의도가 무엇이었든 결과에 반영되지 않았으면 다음으로 넘어가도 된다는 성과주의…. 네이스가 겨냥하는 것은 최선의 노력과 희생, 강한 의지로 개인이 스스로 성공을 거머쥘 수 있다고 보장하는 사회의 ‘허점’과 능력에 따른 보상 과 책임, 윤리와 원칙을 뒤흔드는 질문들이다. 목표한 것을 얻기 위해 수많은 것을 저버려야 하는 현실 속에서 모두가 공평한 기회를 가진다는 것은 가능할까? 스스로를 기계로 만들어서라도 성공하려는 욕망의 성취에 “마땅히 누려야 할 것”이라는 보상은 정당한 것일까? 능력주의를 완벽하게 실현한 사회는 정의로운 사회라고 말할 수 있을까? 과연 우리는 이 모든 질문에 답을 할 수 있을까?

 

  1. 마이클 샌델. 『공정하다는 착각』. 서울: 와이즈베리. 2020. 59쪽.
  2. Matthew Wills. “James Truslow Adams: Dreaming up the American Dream.” JSTOR Daily. 18 May 2015. Web.
  3. 이영석. ⸀애초에 발상이 과연 있었을까?」. 『밥과 손과 땀과 연극 : 새빨간 스피도 프로그램북』. 극단신작로. 2023. 8쪽.
  4. 마이클 샌델. 앞의 책. 60쪽.
  5. 위의 책. 60쪽.
  6. Debra Miller. “A Conversation with Playwright Lucas Hnath, Director Deborah Block, and the Cast of Theatre Exile’s RED SPEEDO.” Phindie. 23 October 2014. We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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