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큰새프로젝트 <어부의 핵>

글_수진

 

1인극이다. 그런데 등장인물이 로봇이란다. 그것도 핵전쟁으로 인류가 멸망한 세상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스스로를 어부라 생각하는 로봇. 그는 왜 모든 것이 사라진 세상에 홀로 남겨졌을까. 그리고 그의 눈으로 보게 될 파멸한 세상은 지금 우리에게 어떤 말을 건넬까. 그동안 꾸준히 로봇 이야기를 통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을 반추해 온 큰새프로젝트가 이번에는 ‘최후의 로봇’1 베이비 보이와 함께 관객을 찾았다.

연극 <어부의 핵>(작 김도영, 연출 장한새) 속 로봇의 이름은 ‘베이비 보이(Baby Boy)이다. 인간이 프로그래밍 한 대로만 작동할 수 있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을 지었을까? 홀로 남아 멸망한 세상을 항해하는 그가 존재하는 이유는 인류의 종말 이후에 올 새로운 종들을 위해 바뀐 지형의 지도를 그리기 위함이다. 유럽에서 시작해 미대륙을 지나 아시아까지, 핵전쟁으로 파괴되고 바다에 잠겨 뒤바뀐 지형을 기록하며 그는 무수한 생각에 잠긴다. 그리고 오롯이 혼자인 것만 같았던 캄캄한 세상에서 말미잘을 만나 도움을 받고 투닥거리며 항해를 이어간다.

대부분 1인칭의 독백체로 이루어진 이 극은 어부 로봇 베이비 보이의 이동과 의식의 흐름에 따라 펼쳐진다. 그는 자신이 도착한 나라와 뒤바뀐 지형에 대해 기록한다. 그리고 각 나라의 지난 정보들을 이야기하며 카이사르 원정대가 되기도 하고, 소말리아 해적이 되기도 한다. 마치 어린 아이 혼자 인형 놀이를 하듯 역할극과 독백을 이어가던 로봇은 유일한 생존 생명체 말미잘을 만나며 대화를 시작한다. 또 다른 존재와의 만남 속에서 깨닫게 되는 세상에 대한 통찰력은 저장되어 있는 데이터를 홀로 쏟아내는 것과는 차원이 달라진다. 진짜 세상의 이야기, 혹은 세상이 감춰둔 이야기는 누군가와 더불어 살아가는 부대낌 속에서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1인극이므로 로봇과 말미잘은 한 명의 배우가 연기하지만, 마치 각각의 존재를 따로 보는듯한 느낌이다. 배우가 쓰고 있는 로봇 얼굴과 연극적 허용으로 말미잘이 된 장갑 덕분이다. 본래는 로봇의 손이었던 마디마디를 연결해 만든 장갑은 말미잘의 등장과 함께 본체에서 떨어져 나와 새로운 생명체가 된다. 그 둘의 호흡은 극의 재미를 주기도 하지만, 앞서 언급한 멸망한 세상 속에서 찾아내는 메시지의 전달 역시 극적으로 만든다.

 

사진 제공: 큰새프로젝트

 

 

어부 로봇의 눈에 비친 마지막 세상은 차갑다. 단순히 물리적 기온이 낮아서 느껴지는 차가움은 아니다. 오롯이 홀로 남겨진 외로움이 주는 공허함 때문이다. 로봇조차 느끼는 외로움의 한기는 언제일지 모를 미래에서만 찾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빠르게 변해가는 현대 사회에서 인간은 이미 혼자이다. 누군가와 함께 가는 것이 세상의 빠른 속도에 발맞추지 못하기에 인간은 스스로 홀로 남기를 선택한다. 그리고 그 공허함에 차갑게 식어버린다. 작품 속 로봇의 외로움과 공허함을 몰아내는 것은 작고 힘없는 말미잘이다. 그는 생명을 걸고 로봇의 배를 밀어주고, 이내 둘은 항해의 길동무가 된다. 그들은 서로를 필요로 한다. 로봇과 말미잘도 알고 있는 이 세상의 이치를 오히려 인간은 모른다. 서로가 서로에게 필요한 존재라는 단순한 진리를. 작품은 로봇과 말미잘을 통해 인간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 더 이상 우리를 차갑게 만들지 않을 방법에 대해 말해준다.

이처럼 비인간 존재인 어부 로봇과 말미잘의 이야기는 마치 말미잘의 촉수가 로봇의 신경을 건드리듯 인간의 폐부를 콕콕 찌른다. 선크림 때문에 미국에 사는 사촌들이 다 죽었다는 말미잘은 인간이 자신들(생태계)을 무시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망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요즘 우리가 거듭 되뇌이는 말과 다르지 않다. 심각한 기후 변화와 그로 인한 자연 재해, 끝없이 생겨나는 전염병들은 눈에 보이는 이익을 위해 자연을 무시한 우리에게 당연히 다가올 수밖에 없는 미래였다. 인간의 오만함은 이 비극적인 미래를 자신들이 쌓아놓은 과학과 지식의 힘으로 바꿀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로봇 베이비 보이는 말한다. 인류의 멸망 앞에 인공지능은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다고. 로봇은 스스로의 한계를 인식했지만, 인간은 그러지 못한다. 그래서 무지한 우리 인류의 최후를 이 작품은 로봇의 눈을 빌어 보여준다.

 

사진 제공: 큰새프로젝트

 

인류에게 보내는 어부 로봇의 간절한 메시지는 다양한 극적 연출을 통해 관객에게 다다른다. 작품은 처음부터 로봇을 등장시키지 않는다. 일상 속의 배우가 멸망한 세상에 홀로 남은 어부 로봇이 되는 순간을 보여주며 세상의 마지막이 우리 가까이에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무대 삼면의 벽에 투사되는 영상과 바닥에 깔린 두꺼운 검정 비닐은 핵전쟁으로 사라지는 세상의 면면을 이미지로 담아낸다. 출연진들의 열연도 돋보인다. 전체 드라마는 1인극이지만, 중간에 등장하는 무용수의 안무는 말미잘의 내면을 표현하는 듯 캐릭터에 생명력을 불어넣으며 극의 분위기를 전환해 준다. 또한 극중 인물 뿐 아니라, 영상과 무대 효과까지 1인 다역을 소화하며 공연 내내 로봇 얼굴을 쓰고 종횡무진 하는 배우는 1인극의 매력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어부의 핵>은 말미잘의 죽음과 함께 어부 로봇 베이비 보이마저 스스로 핵 속으로 뛰어드는 것으로 막을 내린다. 자신을 프로그래밍 한 인간의 명령을 어기고 지금까지 작성해 온 새로운 지형의 지도와 함께 완전히 사라지기로 결심한 베이비 보이. 그는 언젠가 다시 생겨날지 모를 새로운 인류가 자신이 남긴 지도(地圖)로 쉽게 도약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한걸음씩 과정과 수고를 거치지 않은 도약은 또 다시 멸망을 초래할 뿐임을 알았기 때문일 것이다. 모든 것이 파멸하고 사라졌지만, 그래도 작품은 세상에 대해 낙관적이다. 도약을 꿈꾸다 머지않아 공멸할지 모를 인류에게 공생을 위한 지도(指導)를 남겨주었으니 말이다.

 

  1. 메리 셸리의 장편소설 『최후의 인간』에서 빌려왔다. 이 소설은 포스트 아포칼립스 소설의 효시로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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