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나무시어터 사회적협동조합 <알래스카 교도소>

글_김충일(연극평론가)

 

2010년 창단 이후 지역 문화자원을 기반으로 연극 및 공연 예술 창작활동을 통해 관객과 함께 호흡하고, 종합예술의 최고 가치 추구를 위한 연극의 공동체적 경험을 통해 공시적 문화현성으로 소통하고자 하는 연극 공동체, 나무시어터 사회적협동조합의 <알래스카 교도소>가 지난 9~10일 소극장 고도에서 제 14회 대전국제소극장연극축제(9.8(금)~26(화))의 자유참가작으로 공연되었다..

올해로 연극 무대 데뷔 30주년을 맞이한 남명옥(연출)은 10여년을 함께 작업해온 정미진(작가)의 월간 문학 신인상 수상작(2003년)인 <알래스카 교도소>를 명징한 연극적 콘셉트를 갖춘 희곡으로 각색(작가 이정수)하여 국내 처음으로 무대에 올렸다. 연극 제목은 이미 ‘갇힌 삶, 닫힌 사회’를 암시하면서, 이를 무대화 할 경우 교도소 속의 삶이 어떻게 연극적 공간으로 꾸려질 것인지 궁금증을 더해준다. 연극은 변화를 욕망하고 변신을 통해 이를 가속화 시키는 공간의 예술이다. 압축된 공간 속에 구축된 플롯과 자기 아닌 또 다른 역할을 위장하는 연극 고유의 속성은 우리가 통상적으로 믿는 관습들을 물리친다. 연극은 관념 속에 구축된 사건을 구체적인 무대 이미지로 육화시키고, 그 결과로 파생된 무대 위의 물성이 연극의 허구성을 환기시키면서, ‘무대화’라는 현존하는 공간성을 실현해 낸다.

 

사진 제공: 남명옥

 

판옵티콘(panopticon) 구조를 연상케하는 알래스카 교도소 수감실 내부에는 세 개의 구멍이 있다. 두 개의 창(바깥이 보이는 창, 감시탑이 보이는 감시창)과 드나드는 문이 그것이다. 낡은 목재로 만들어진 세 사람의 수납공간이 규칙적으로 자리하고 있으며, 무대 바닥은 죄수들의 침실 외에는 모두 진흙으로 어지럽혀져 있다. 아울러 주기적으로 감옥 안을 비추는 감시창 너머의 서치라이트가 배치되어 있다. 관객은 이 연극의 공간적 차원이 대단히 다층적일 것 이라는 것을 짐작한다. 이곳엔 사회로 부터 배반당한 채, ‘임금체불(노동)에 불만을 품고 공장 안에 화학 가스를 뿌려 20명 쯤 죽게 만들고 이곳에 들어온 현수(최한솔 분)’, ‘집 화재로 엄마를 잃고 고아원에서 살다가 같은 원생인 최진주를 겁탈(성폭행)하다 돌로 쳐 죽인 후 암매장 했다는 조작된 죄를 뒤집어쓰고 이곳에 들어온 덕배(김광원 분)’, ‘도둑질(폭력)하다 들켜 도망치다 진열대를 넘어뜨려 실수로 사람을 깔려죽는 사고로 이곳에 온 철표(임황건 분)’가 억압과 감시의 상태 속에서 가상의 희망 공간인 ‘샌프란시스코’를 찰흙으로 빚으며 살아가고 있다.

먼저 이 작품이 현실 속 가상의 무대인 교도소로 설정 되어 있음은 의미심장하다. ‘가두어진 공간’ 속에서도 햇빛이 드는 ‘기다림의 창’을 바라보며 찰흙으로 삶의 자유로운 아름다움인 ‘희망’을 빚는 철표, 감시창 너머에서 들려오는 ‘절망의 사이렌 소리’에 짓 눌려 동료의 이름을 버리고 숫자로 부르기를 고집하며 죽음을 잊으려는 어둡고 음습한 ‘닫힌 인간’ 현수, 세상물정 모르는 바보 취급을 당하면서도 늘 창 밖은 아름답다고 하면서 이곳보다 더 차갑고 눅눅한 ‘샌프란시스코’를 희원하는 수인번호 삼천 오백십구(시편 35장 19절)번 ‘기도하는 인간’ 덕배. 이 세 사람에게서 뿜어 나오는 열정적인 연기는 알래스카 교도소란 가상공간을 죽음이라는 후회와 무기력의 형벌의 장(場)에서 “죽으려고 온 사람들로 하여금 살고 싶게 하려는” 희망의 공간으로 전환시킨다. 급기야 이 공간은 “여긴 감옥이 아닐지도 몰라. 우리 스스로 가두고 있었을 지도‘라는 삶에 대한 ’질문과 성찰의 무대‘로 다가온다.

이 작품 속에는 악취 나는 삶의 바닥을 푸른 하늘로 변모시키려 연극 오브제가 소환된다. ‘찰흙 빚기’이다. 앞서 보았듯이 무대배경을 매우 입체적인 의미공간으로 만들고, ‘닫힌 몸’ 속에 갇혀 있는 끈질긴 삶에 대한 애착과 희망을 끌어내기 위해 ‘찰흙과 소조 작업’을 통해 배우들의 체화된 행위를 지속적으로 유발시킨다. 이 때 찰흙 빚기는 ‘창 밖 바라보기’를 거쳐 ‘죽음의 두려움 잊기’를 통과한 후 결과적으로 ‘자유로워지기’라는 즉 ‘나를 들여다보는’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는, ‘샌프란시스코 모형의 현실적 실현’이란 생명력을 담지한 대체물로 다가온다. 또한 이를 둘러싼 무대 분위기를 강화하고, 극적 전환을 위해 애잔하고 잔잔하게 때론 비트적인 리듬감으로 느껴지는 음향곡과 덕배와 허밍의 노래 소리는 관객을 무대로 흡입하는 극적 성취도를 올려준다.

 

사진 제공: 남명옥

 

특히 이 작품은 ‘스스로 감옥이라고 생각했던 공간은 알고 보면 나 자신이 열고 들어간 곳’이란 샘물(원작)에 ‘소돔과 고모라 같은 세상에 희망’이라는 리트머스 실험지(각색)를 접속시킨다. 남명옥은 갇힌 삶으로 조각난 인생을 한 땀 한 땀 기워 입혀내 관객들에게 샘물을 퍼 나르는 표주박(연출)이 되어 ‘살아남은 자를 통해 삶에 희망’이 있음을 보여주는 <알래스카 교도소>란 집짓기를 주관한다. 공연은 완성도 높고 흥미로웠다. 연출은 정확하게 텍스트를 읽었고, 자신의 서부 텍스트이기도 한 상황극적 절실함을 구축한다. 이를 위해 연출은 메시지의 진지함과 탄력적인 무대 구성력, 참신한 오브제의 지속적인 선택, 시각과 청각의 느낌을 불러일으키는 연주곡의 대비를 통한 인물의 감각적인 심리묘사를 표출해내면서 무대 위에 절제력 있고 박진감 넘치는 에너지를 뿜어낸다,

너무 일반적인 언사일까. 연극은 고정된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 스스로를 흔들고 의심하면서 인간이해의 현실을 뒤집을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 살아있는 유기체다. 어쩌면 현실의 은폐된 진실을 알아가는 과정에서 <알래스카 교도소>가 이미 세상 놀이에 길들여진 관객들에게 ‘또 다른 빛깔의 감금과 억압’으로 다가오진 않았을까. 85분의 관극을 끝내고 귀가 길 버스에 오르는 발걸음 속에 묻힌 ‘뿌연 안개 속을 거니는 듯 무게감과 거리감’이 멀어 보이기도 하고 가깝게 다가오기도 한다. 오늘 밤, 다음 작품을 ‘희망’하면서, 잠은 늦게 잦아들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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