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2023 쿼드초이스 <더 웨일>

글_홍혜련

 

생의 끈을 모두 놓아 버리고 스스로 죽음을 향해 나아가는 남자가 있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겪은 뒤 그는 스스로의 생마저 먹어 없애려는 듯 끊임없이 먹어치우고, 또 먹어치운다. 그렇게 그는 270킬로그램의 거구가 되었다. 〈더 웨일〉은 혼자 힘으로 걸을 수 없는 것은 물론, 일어설 수조차 없는 이 “고래”같은 남자, 찰리의 마지막 일주일간의 이야기다.

 

ⓒ서울문화재단 대학로극장 쿼드 ·Studio AL

 

생과 죽음, 사랑과 증오, 포용과 배제가 한데 붙어 있을 수 있을까. 이제 죽음을 목전에 둔 찰리는 스스로를 철저히 파괴하기를 멈추지 않는 가운데 생의 마지막 기운을 그러모아 한 사람을 건져 올리려 한다. 9년 전 아내와 이혼하며 남겨 두고 온 하나뿐인 딸, 엘리다. 찰리는 다른 남자와 사랑에 빠져 아내와 딸을 버렸다. 겨우 여덟 살 때 아버지로부터 버림받은 엘리는 이제 자기 주위의 모든 것을 증오한다. 엄마마저 ‘악마’라 부르는 엘리에게서 찰리는 그러나, 다른 누구도 보지 못하는 빛을 본다.

문학 교수로서 지난 십 수 년간 학생들에게 에세이를 가르쳐 온 찰리는 심장발작을 일으키는 순간에도,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엘리가 14살 때 쓴 허먼 멜빌의 《모비딕》 에세이를 한 글자 한 글자 읽어 내려간다. 죽음이 임박했음을 직감한 찰리는 엘리를 자신의 집으로 불러들인다. 그가 엘리에게 원하는 것은 딱 하나, 자기를 보러 와서 한두 편의 에세이를 써 줄 것. 그러면 자신이 모은 전 재산, 12만 달러를 주겠노라고 약속한다. 그는 엘리에게 진짜 너의 이야기를 하라고 말한다.

 

ⓒ서울문화재단 대학로극장 쿼드 ·Studio AL

 

아이러니하게도, 찰리의 연인을 죽인 것도 ‘이야기’다. 찰리의 연인은 찰리를 만나기 전 독실한 몰몬교도였다. 몰몬경의 가르침에 순응하며 아버지가 정한 결혼을 앞두었을 때 그는 찰리를 만나 불꽃같은 사랑을 하고 삶을 완전히 새롭게 시작했다. 그런 그에게 아버지가 제발 딱 한 번만 더 교회에 나오라고, 너를 위한 예배를 준비했다고 부탁하자 그는 아버지의 청을 거절하지 못하고 예배에 다녀온다. 그런데 그 뒤로 그는 삶의 끈을 놓아 버렸다. 먹기도, 잠자기도 거부한 채 그대로 서서히 몸에서 모든 생의 기운을 뽑아내 몇 달 뒤 죽어 버렸다. 그런 그의 죽음을 곁에서 겪은 찰리는 연인을 죽음으로 몰아갈 만큼 참혹한 일이 그날 그 교회에서 벌어졌다고 믿고 있다. 그러나 그를 죽음으로 내몬 것은 그저 하나의 ‘이야기’다. 아버지가 그에게 들려준 요나의 이야기. 그러나 ‘성경’ 속 이야기는 종교의 탈을 쓰고서 그의 인생을 줄곧 좌우해 왔기에 그저 하나에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닌 것이 되어 있었다. 요나가 누구인가. 여호와의 명령을 거부하다 바다에 내던져서 고래의 배 속에서 3일 밤낮을 보내고 끝내 여호와에게 회개하는 이가 아닌가. 이 이야기는 그를 그가 평생 믿고 따른 하나님으로부터 배제된 삶을 사는, 고래에 입 속에 삼켜져 버린 이로 규정해 버렸다. 어떻게 사랑을 가르치는 종교가, 그저 하나의 이야기에 불과한 성경 속 신화가 한 사람을 이토록 처참한 절망 속으로 밀어 던져 버릴 수 있었을까. 자신을 사랑한 것이 그에게 씻을 수 없는 죄가 되어 스스로를 죽게 만들었다는 것을 알게 된 찰리는 심해의 더 깊은 곳으로 내동댕이쳐진다.

 

ⓒ서울문화재단 대학로극장 쿼드 ·Studio AL

 

그 앞이 보이지 않는 깜깜한 바다 속에서 그에게 구원의 빛을 던져 준 것 또한 ‘이야기’다. 엘 리가 들려 준 또 다른 고래 이야기다.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고래 이야기 《모비딕》이지만, 엘리는 그 이야기를 남들과는 다르게 본다. 엘리가 본 《모비딕》은 이스마엘이라 이름한 작가가 다른 남자와 한 침대를 나누어 쓴 데로부터 시작한다. 함께 밤을 보낸 두 남자는 에이해브 선장이 이끄는 포경선에 오른다. 에이해브는 생을 걸고 고래, 모비딕을 죽이려 한다. 평생을 걸친 한 사내의 집념의 이야기 군데군데 나오는 고래의 이야기가 엘리는 더 슬프다. 지루한 작가의 넋두리를 읽을 독자들에 대한 미안함이 거기에 담겨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엘리의 마음을 더 끈 것은 에이해브가 삶을 걸고서 죽이려고 하는 고래가 정작 에이해브에게 아무런 감정이 없다는 점이다. 고래는 그저 고래로서 살아갈 뿐이다. 고래는 에이해브가 이토록 집요하게 자기를 죽이려 하는 이유를 모를 뿐 아니라 죽이려 하는 사실조차 모른다.

찰리는 엘리의 고래에게서 자기 자신을 본 것일까. 죽음의 순간, 찰리는 엘리에게 이 에세이를 한 번 더 읽어 달라고 애원한다. 엘리가 글을 읽기 시작하자, 찰리는 스스로의 힘으로 퉁퉁 부어터진 발로 땅을 밟고 일어서 한 걸음 한 걸음 생의 마지막 걸음을 내딛어 끝내 엘리의 앞에서 구원을 맞는다.

 

ⓒ서울문화재단 대학로극장 쿼드 ·Studio AL

 

<더 웨일>이 그려내는 모순으로 가득 찬, 그럼에도 아니 그렇기 때문에 아름다운 순간은 이 외에도 수없이 많다. 아이를 낳기 위해 자신과 결혼했다고 찰리를 맹비난하는 그의 전 아내, 메리는 찰리를 용서할 수 없이 증오하면서도, 그를 아직 사랑한다. 그녀가 거대한 찰리의 품에 폭 감싸여 안겨 그의 불규칙한 숨소리를 듣는 장면에서는 눈물을 감추기 힘들었다. 찰리의 죽음을 곁에서 하루하루 지켜보며 왜 살기를 포기하려 하느냐고 애원하는 리즈는, 그럼에도 찰리가 원하는 죽음을 방해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그를 도와 닭튀김과 기름진 더블 샌드위치, 과자, 탄산음료수를 사다 준다. 더한 것은 그녀가 찰리의 죽은 연인과 남매지간이라는 사실이다. 오빠의 죽음에 이어 찰리의 죽음까지 끝까지 곁에서 지키며 돌보기를 멈추지 않는 리즈는 관객들에게 길이 기억될 인물이다.

<더 웨일>은 2022년, 고난을 겪고 다시 영화계에 돌아온 배우의 열연으로 세계적으로 큰 화제를 모은 작품이다. 이번 공연은 장면 장면의 숨겨진 은유마저 무대에 펼쳐 내 스크린에서보다 훨씬 더 큰 감동을 안겨 주었다. 이는 다름 아닌 신유청 연출과 찰리 역의 백석광 배우 외 모든 제작진의 역량이 분명하다. 다만 아쉬운 것은 백상예술대상 수상 이후 한국 연극계에 입지를 확고히 다진 신유청 연출이 국립극단 제작의 <엔젤스 인 아메리카>에 이어 또 한 번 대중적 화제성을 이미 어느 정도 담보한 공연을 선택했다는 점이다. 결과를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작품을 선택하는 것도 그의 위치에서 할 수 있는 도전이라 생각한다. 그가 다음 작품으로 무엇을 선택할지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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