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극단 행복한 사람들 <나를 잊지 말아요>

글_배선애(연극평론가)

 

2023년 연극계 중요한 화두 중 하나는 ‘돌봄’이었다. 페미니즘의 관심이 간병과 돌봄으로 확장되면서 사회적 담론의 연극화가 적극적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올해 초 공연된 <장녀들>이 그랬고, 최근 <정희정>(작년 제1회 서울예술상 연극분야 우수상 수상)이 주목받았다. 돌봄을 다루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돌봄의 대상이 등장해야 한다. 두 작품이 돋보였던 것은 대상이 아닌 돌봄 주체에 대한 환기였다. 치매 걸린 엄마를 돌보는 비혼의 딸, 어린 딸을 양육하는 엄마 등. 끝이 보이지 않는 돌봄을 짊어진 주체, 그것도 여성 주체를 보여줌으로써 돌봄 자체를 어떻게 사회적으로 끌어안을 것인가를 고민하게 한 것이다.

이 작품들은 돌봄의 대상, 구체적으로 치매 걸린 엄마에게 집중하지 않았다. 이들이 주인공이 되는 순간 그 상황은 지나치게 익숙하고, 인물의 관계 역시 너무 뻔하며, 감정은 의도보다 더 과잉되기 일쑤이기 때문이다. 인물에 대한 감정이입의 과도함이 상황에 대한 객관적인 판단을 덮어 버린다. 그래서 돌봄의 대상을 전면에 내세우는 것은 최근 작품들에서는 기피되는 현상이기도 하다.

그런데 연극 <나를 잊지 말아요>(신성우 작, 문삼화 연출, 극단 행복한 사람들, 미마지아트센터 물빛극장, 2023년 11월 22일~12월 3일)에서는 요즘 보기 드물게, 치매 할머니가 주인공이다. 흔하고 익숙한 인물 설정을 그대로 가져왔다. 왜? 무엇 때문에? 그 의문을 풀어가다 보니 이 작품의 독특한 부분들이 눈에 들어왔다. 익숙하고 뻔한 것 같은데 어딘가 아주 색다른 연극이었다.

 

사진 제공: 극단 행복한 사람들 ⓒ김명집

 

치매에 대한 직설적이고 과감한 접근

 

<나를 잊지 말아요>는 신성우 작가의 작품이다. 작가의 이전 작품들을 보면 어디선가 본 듯 익숙한 인물이나 설정이 등장하지만 그것을 다른 방식으로 풀어내는 특징이 발견되는데, 이 작품에서도 그 특징이 드러난다. 주인공 금옥은 치매 남편을 돌보는 70대 노인이다. 망가진 구식 라디오를 들고 다니며 옛날 얘기만 하는 남편을 수발한다. 약도 챙겨주고 밥도 챙겨주고, 흔한 노부부의 일상을 보는 듯하다. 그런데 잔소리하는 금옥에게 남편이 스스로 말한다. “난 작년에 죽었잖아.”

실제로 치매에 걸린 것은 금옥이다. 남편과 사별하고 혼자 사는 금옥. 아들은 집문서를 들고 나간 이후 3년째 소식이 없고, 보험설계사인 딸은 자기 식구들 챙기기도 버겁다. 남편이 집을 나갔다고 생각한 금옥은 불안하고 걱정되는 마음에 찾으러 나서고 싶지만 문밖으로 나가기 전엔 반드시 딸 경희에게 전화하라는 경고문 때문에 경희와 통화만 할 뿐이다. 집안에서 얌전히 기다리라는 경희에게 온갖 역정과 저주를 쏟아내는 금옥을 말린 사람은 집 나갔던 경수다. 그렇게 경수가 금옥을 돌보게 된다.

 

사진 제공: 극단 행복한 사람들 ⓒ김명집

 

그 이후의 상황은 예상했던 대로 펼쳐진다. 엄마가 엉뚱한 소리를 할 때마다 경수는 짜증을 내고 옆집 여자와 누나에게 도와달라고 투덜거리거나 힘들다고 하소연을 한다. 옆집 여자는 아주 능숙하게 사탕으로 금옥을 진정시키는 능력이 있어서 상당히 도움이 되지만 가끔은 과한 오지랖이 불편하기도 하다. 여기까지의 사건 전개는 치매 주인공을 다룬 다른 작품들과 비슷하다. 결정적으로 달라지는 지점은 금옥이 바지에 똥칠을 하고 등장하면서부터다. 아들 경수와의 갈등이 폭발하는 장면이기도 한데, 치매 걸린 인물을 무수히 봤지만 정말 바지에 똥칠하고 등장한 것은 처음이었다. 걸음걸음 줄줄 흘려가면서도 식탁 의자에 앉아 능청맞게 라면을 먹는 금옥은 이제껏 무대에서 만나보지 못했던 치매 할머니였다.

이 작품의 변별점은 바로 여기에 있다. 익숙하고 뻔한 치매 환자가 주인공인데, 지금까지는 관객들이 견딜만 할 정도로 귀엽거나 안쓰러운 치매 증상만을 보여주었고, 그로 인해 치매 자체에 대해 고정관념과 선입견을 갖게 해주었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는 치매 증상의 여러 가지가 적나라하게 형상화되면서 머릿속으로 알고 있는 것보다 더 아프고 더 끔찍하고 더 가혹한 것이 치매라는 것을 환기시켜 주었다. 작가의 치매에 대한 직설적이고 과감한 접근이었다. 똥칠한 바지를 입고 소파에 앉아있는 금옥의 초점 없는 눈. 우리가 마주해야 하는 치매의 적나라한 모습이었던 것이다.

또 하나 특징적인 것은 치매 노인의 돌봄 주체가 대체로 여성에 한정되었는데, 여기서는 아들 경수가 돌봄을 맡게 되었다는 점이다. 금옥에게 투덜거리고 소리치는 경수의 모습은 비단 아들이어서가 아니라 치매 환자를 대하는 돌봄 주체의 일반적인 태도다. 아들이 엄마를 돌보고 있으니, 그동안 간병과 돌봄에서 당연시되어왔던 것들이 새삼 고단하고 힘들게 여겨지는 효과가 있었다. 엄마의 똥기저귀를 갈아 채우는 것이 경수에게 엄청난 숙제이고 힘든 일이다. 그동안 딸들에게는 자연스럽게 혹은 당연하게 부과되던 일이었는데, 그게 결코 자연스럽거나 당연한 일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이렇듯 뻔하고 익숙한 것 같지만 이 작품의 금옥이 독특하고 개성 있었던 것은 치매에 에둘러 접근하지 않고 정공법으로 대면한 작가의 태도 때문이었다.

 

사진 제공: 극단 행복한 사람들 ⓒ김명집

 

 

복잡한 심리와 동선에 대한 깔끔한 정리

 

치매에 대해 직설적으로 접근했기 때문에 감정의 과잉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화내고 슬퍼하고 고통으로 힘들어하는 상황이 중심이라 질척거리고 많은 것들이 과잉될 것 같지만, 흥미롭게도 이 작품은 전반적인 분위기가 깔끔하고 밝았다. 문삼화 연출이 무대에 대한 현명한 판단을 한 결과로 보이는데, 우선 무대바닥이 인상적이다. 무대 벽면과 바닥이 밝은 하늘색으로 도색되어 있는데, 이 밝은 색은 금옥의 치매에 대한 무게를 덜어냈다. 그저 한바탕 놀이인 듯, 꿈인 듯, 하늘 위에서 노는 모습처럼 보이는 효과를 만들어냈다. 복잡할 것 같은 무대임에도 식탁과 의자 등 간단한 소도구들을 배치하고 활용하면서 공간을 비워냈기 때문에 하늘색 바닥의 가벼움이 강조될 수 있었다.

거기에 무대 속으로의 출입은 문 모양을 한 철 프레임을 통해서 이루어졌는데, 이 두 개의 프레임은 무대 천정에 고정된 원형 틀에 연결되어 있어서 자식들의 심사가 복잡해지고 갈등이 격앙될 때 프레임을 붙잡고 회전시켰다. 묵묵히 프레임을 돌리는 모습은 끊임없이 바위를 산으로 밀어 올리는 시시포스와 닮았다.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형벌. 간단한 철 프레임의 회전이 그 막막함을 잘 표현해낸 것이다. 하늘색 무대와 밀며 돌아가는 철 프레임. 이 두 가지로 작품 속의 감정들을 과잉되지 않게 충분히 잡아낼 수 있었다. 적나라한 치매를 보여주어도 과하게 슬프지 않았던 것은 깔끔하게 정리하고 다듬은 무대와 움직임 덕분이었다.

지난 7월, <베르나르다 알바의 집>으로 제4회 여주인공페스티벌 대상을 받은 문삼화 연출은 올해 광폭의 행보를 보여주었다. 연출한 작품 수도 많지만 각각의 작품을 자신의 색깔로 만들어낸 것이 주목되었는데, <누란누란>의 경우 마오리족 동작을 따와 대학교수들의 허위의식을 풍자했으며, <베르나르다 알바의 집>에서는 옛날 여자들 이야기를 벗어나 현재와 공명하고자 작품 전체의 콘셉트를 수정했다. 연극은 재미있어야 한다는 것이 연출의 원칙인 문삼화 연출은 이 작품에서도 절대로 무겁지 않게, 과잉되지 않게 무대를 구현하는 방법들을 찾아낸 것이다.

 

사진 제공: 극단 행복한 사람들 ⓒ김명집

 

그 덕분에 배우들의 연기도 눈에 띄었다. 무표정하게, 온 얼굴의 근육을 써가며 사탕을 먹는 금옥 역의 김담희 배우는 능청스러우면서도 아무렇지 않게 치매의 증상들을 보여주었다. (금옥을 제외한 나머지 인물들은 더블캐스트였다. 필자가 관극했을 때 남편 역엔 정성호, 딸 경희는 정소영, 아들 경수는 서신우, 옆집 여자 수연은 유정은 배우가 연기했다. 다른 캐스트의 연기를 보지 못한 것은 큰 아쉬움으로 남는다.) 정소영 배우는 엄마도 중요하지만 자신의 가족들도 중요한 딸의 복합적 심리를 잘 보여주었고, 엄마에 대한 애증의 감정을 노골적으로 표현하는 아들 역의 서신우는 얄밉지만 이해되는 캐릭터를 연기했다. 금옥의 기억에 남아 있는 남편 역 정성호의 힘을 뺀 편안한 연기는 금옥이 끝내 붙잡고 싶어했던 마음을 이해하게 한다. 금옥에게 친절한 이웃집 여자 수연은 나도 저렇게 늙을까봐 무섭다는 말의 공감을 이끌어냈다.

치매라는 익숙하지만 까다로운 소재를 정면으로 마주하면서, 연극적 방법들을 활용해 감정을 절제한 채 진지하게 바라보게 만든 연극 <나를 잊지 말아요>. 이 작품은 극단 행복한 사람들의 창단 10주년 기념 공연이다. 묵묵히 연극을 해온 세월이 벌써 10년. 그 기념 작품이 <나를 잊지 말아요>라는 것은 여러모로 의미심장하다. 우선 제목에서, ‘잊지 말아요’가 ‘꼭 기억하고 앞으로도 지켜봐 달라’는 당부로 들린다. 또한 정공법의 접근을 통해 우리가 마주하는 현실의 문제를 결코 외면하지 않을 것이라는, 연극적으로 끊임없이 발언할 것이라는 의지를 보여주기도 한다. 거기에 연극미학적으로도 다양한 고민을 통해 큰 울림을 주겠다는 포부도 읽힌다. 10년을 걸어온 극단의 묵묵함이 앞으로의 10년도 견뎌낼 수 있는 힘이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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