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국립극장‧파크컴퍼니 <고도를 기다리며>

글_오세곤(연극평론가)

 

작년 말부터 국립극장 달오름극장에서 공연 중인 <고도를 기다리며>(사무엘 베케트 작, 오경택 연출, 신구 박근형 박정자 김학철 김리안 출연, 2023.12.19.~2024.2.18., 국립극장 달오름극장)는 배우들의 연륜이 과연 어떤 힘을 발휘할 수 있는지 잘 알려준 작품이었다. 물론 배우들의 나이가 많다고 무조건 좋은 결과를 장담할 수는 없다. 아마도 그 나이에 이르기까지 연기자로서 치열하게 자신과 싸우면서 관객들의 신뢰를 쌓아온 이들이기에 가능한 보상일 것이다.

객석 1, 2층을 가득 메운 관객들은 대부분 호의적이었다. 이런 호의가 배우들에 대한 깊은 신뢰와 존경에서 비롯된 것임은 물론이다. 배우들의 일거수일투족에 기꺼이 빠져들 준비가 되어 있는 관객들은 끊임없이 웃고 손뼉 치고 탄식했다. 그러나 과연 호의만으로 이것이 가능할까? 그렇지는 않다. 아무리 호의적인 관객이라도 배우들의 장악력이 조금만 약해지면 금세 산만해지기 마련이다. 공연 내내 잠시도 관객을 놓치지 않는 힘, 실제로 관객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이야말로 배우들의 진정한 실력이다. 그것은 세월에 더해 끊임없이 뼈를 깎는 노력을 기울였을 때 비로소 다다를 수 있는 경지이다.

 

사진 제공: (주)파크컴퍼니

 

공연의 성패를 가늠하는 기준은 여러 가지겠지만 관객들의 만족도는 충분히 그 중 앞자리를 차지할 만하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이번 공연은 분명 성공적이라 할 수 있다. 사실 공연을 보러온 관객 대다수가 즐거워한다면 높은 점수를 부여하는 것이 당연하다. 언론에 화제작으로 떠오르면서 대중적 관심이 높아진 덕도 있겠지만 평소 연극을 많이 접하지 않던 관객들마저도 오랜 세월 난해한 현대극으로 간주되었던 <고도를 기다리며>라는 작품을 별 부담 없이 즐기고 있었으니 참으로 대단한 성과라 할 만하다.

그렇다면 이러한 성공에 대한 기여도는 어떻게 보아야 할까? 작가와 연출과 배우, 또 그러한 결합을 이뤄낸 기획에 각기 얼마만큼의 비율을 부여해야 할까? 우선 기획에 대해서는 상업적 발상이든 아니든 상관없이 관객과 참여 예술인 모두에게 만족의 기회를 제공한 공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앞서 밝혔듯 역시 최고의 공로는 배우들에게 돌려야 마땅하다. 그것은 만약 이들이 아닌 다른 배우의 조합으로 과연 이만한 성과를 이뤄낼 수 있었을지 생각해 보면 분명해진다.

물론 이에 더해 베케트라는 작가와 <고도를 기다리며>라는 작품의 명성 역시 기본적으로 기여한 바가 적지 않을 것이며, 연출 또한, 연륜이 높으니만치 개성 또한 제각각일 수밖에 없는 원로 배우들을 한 무대에 조합해낸 역량을 칭찬할 만하다. 그러나 이 지점에서 면밀하게 따져볼 것이 있다. 바로 베케트의 의도가 정확하게 공연에 반영됐는지 여부인데, 특히 관객의 웃음이라는 측면과 극 중 럭키의 장광설 장면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사진 제공: (주)파크컴퍼니

 

이번 공연에서 관객들은 많이 웃었다. 그 웃음의 원천은 상당 부분 넉살맞은 배우들의 연기였다. 그러나 베케트는 부조리한 상황과 등장인물들의 어리석은 행동이 자아내는 웃음을 원했을 것이다. 말도 안 되는 상황이라며, 또 참으로 바보 같다며 실컷 웃었는데 어느 순간 그것이 우리 스스로의 모습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면 결국 자신을 비웃은 꼴이 되므로 웃으면 웃을수록 더욱 심각한 비극이 되고 마는 셈이다.

이를 위해 베케트는 작품 도처에 부조리한 상황을 배치하였다. 에스트라공은 발이 아파 천신만고 끝에 신발을 벗어 털어 보지만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블라디미르는 모자가 불편해서 벗어 보지만 원인을 알 수 없다. 또 뭔가 시도하면 결과가 있어야 하건만 배뇨를 위한 것으로 추정되는 블라디미르의 행동은 번번이 실패하는 듯하다. 또 럭키가 비틀거리며 힘겹게 들고 있는 가방에는 모래가 채워져 있으며, 그러한 럭키를 부리는 포조의 명령은 잔인할 정도로 비효율적이다. 물론 더욱 근본적으로 기다리고 또 기다려도 오지 않는 고도야말로 노력과 시도가 아무런 결과로 이어지지 않는 부조리의 상징일 것이다.

이러한 상황들이 웃음으로 이어지려면 정확한 계산이 필요하다. 발이 아프다는 것, 머리가 불편하다는 것을 강조하지 않으면 그 해결을 위한 행동이 별 동기가 없는 것으로 여겨질 수 있다. 동기와 목표가 분명한 행동을 했건만 과할 정도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결과가 없을 때 그 어리석음에 웃음이 터지도록 해야 한다. 그러나 실제 공연에서는 발이 아프거나 머리가 불편하다는 것이 표현은 됐지만 관객들이 그런 문제의 해결 여부에 집중·주목할 정도로 강조되지는 않았다.

또 다른 예로 목매달기 놀이 장면에서 누가 먼저 목을 매야 할지에 대한 에스트라공의 논리는 참으로 정확하다. 몸무게가 가벼운 자기가 먼저 매달렸다가 죽고 상대적으로 더 무거운 블라디미르가 나중에 매달렸다가 나뭇가지가 부러지면 한 명은 죽고 한 명은 살게 되니 안 되지 않겠느냐며 자신보다 블라디미르가 먼저 목을 매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정확한 논리의 전제가 되는 ‘에스트라공은 블라디미르보다 가볍다.’라는 것은 블라디미르가 깊은 생각 없이 가볍게 툭 던졌던 말일 뿐 결코 확증이 있는 것이 아니다. 결국 공허한 기초 위에 쌓아 올린 엄격한 논리인 셈인데, 에스트라공의 대단히 정연한 논리가 허무한 전제와 충돌하는 정확한 순간에 웃음이 터지도록 아주 세심한 설계가 필요한 대목이라 하겠다.

 

사진 제공: (주)파크컴퍼니

 

다음으로 럭키의 장광설은 과연 어떻게 처리하는지 늘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 유명한 장면이다. 따라서 당연히 여러 궁금증을 안고 지켜보게 된다. 우리 번역본으로 3쪽에 이르는 긴 대사를 어떤 속도와 에너지로 구사해야 이 장면이 지니는 의미와 중요성이 제대로 드러날까? 통상 갈수록 빨라지고 강해지는 방식을 택하는데 그 속도와 에너지의 정도는 최대치를 어느 정도까지 올릴 수 있을까? 그런데 그렇게 하는 것만이 정답일까? 중요한 것은 위협을 느낀 인물들이 다 덤벼들어 막아보려 하지만 역부족일 정도로 강한 에너지의 형성·축적과 폭발일 텐데 배우의 특성을 살펴 다양한 방법을 찾을 수도 있지 않을까? 등등.

이번에는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베케트 저작권자 쪽에서는 원작에 대한 존중을 무척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래서 심지어 저작권 이용 계약을 할 때 원작에서 제시한 음악만을 사용하라든가, 원작에 음향 지시가 없으니 절대 삽입하면 안 된다든가 하는 조건을 달고 각서까지 받기도 한다. 그러나 기술이 발전하면 연극도 따라서 변하게 마련이다. 요즘 연극 공연에 통용되는 기자재 중에는 베케트가 전혀 경험하지 못한 것들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조심스럽기는 하지만 만약에 럭키의 폭발하는 에너지를 전자기기 등을 활용하여 극대화한다면 연극적으로 더욱 효과적일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관객들이 한 번 본 뒤 다시 보고 싶어진다면 좋은 연극이라 할 것이다. 아마도 이번 공연은 그런 관객들을 상당히 많이 만들어낼 것이다. 그러나 만약 베케트가 의도한 웃음까지 가능하도록 한층 정교한 설계를 할 수 있다면, 럭키의 장광설처럼 연극성이 뛰어난 장면을 더욱 극적으로 처리할 수 있다면 아마도 더욱 많은 이들이 한국의 <고도를 기다리며>를 인생 작품으로 선택하게 될 것이고, 이후 이 작품에 임하는 연출이나 배우들도 분명한 목포점을 설정할 수 있을 것이다. 이번 공연이 그러한 도전 촉발의 분명한 계기가 되기를, 그래서 많은 이들의 인생 작품이 될 <고도를 기다리며>가 탄생하는 날이 오기를 기다리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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