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극단 골목길 <쉘터>

글_배선애(연극평론가)

 

공연을 보고 난 후 꽤 오랫동안 마음이 무거웠다. 그만큼 잔상이 오래 남았다는 얘기인데, 왜? 무엇이? 몇 번을 복기하면서 내린 결론은 참담함과 안타까움 때문이었다. 연극을 보며 생겨난 이 감정이 가슴을 무겁게 짓눌렀던 것이다. 연극 <쉘터>(안소영 작·연출, 극단 골목길, 삼일로창고극장, 2024.3.21.~31.) 이야기다. 무한경쟁과 각자도생으로 파편화된 개인들. 그들은 아니 우리는 이 세상을 왜 살아갈까? 살아가는 이유가 무엇일까? 연극 <쉘터>는 이렇게나 무거운 질문을 관객들에게 들려주는데, 참담하고 안타까운 건 작품의 주요 인물들이 모두 10대라는 점이다. 20년도 채 살지 않은 아이들이 왜? 비극을 향해 치닫는 아이들도 아이들이지만, 끝끝내 아이들을 품어주는 어른 한 명 등장하지 않는 싸늘함이 더 가슴 아팠다. 극단 골목길의 젊은 배우들과 창작진이 주축이 된 <쉘터>의 잔인함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먹먹한 마음으로 들여다 보기로 한다.

 

사진 제공: 극단 골목길 ©김봉진

 

세상에 내던져진 아이들, 세상을 내던지다

연극 <쉘터>는 안소영 작, 연출의 작품이다. 안소영은 극단 골목길에서 극단의 단원이면 으레 그러하듯 배우로, 기획으로, 조연출로 다양하게 활동해온 단원이다. 이번엔 과감하게 작가와 연출로 영역을 바꿨다. 그런 후배에게 극단 골목길은 워크숍이 아닌 극단의 정기공연 타이틀을 걸어주었다. 후배들의 작업에 대해 제대로 고민하면서 꼼꼼하게 만들어보라고 멍석을 깔아 준 셈이다. 그 멍석 위에 안소영 연출을 비롯해 극단의 젊은 배우들이 그들의 에너지를 충만하게 펼쳐냈다.

<쉘터>는 30대의 장첸과 20대의 정환을 제외하고는 모든 등장인물이 10대다. 그런데 이 청소년들이 평범하지 않다. 정수의 집에 하나둘씩 모여드는 아이들은 16세, 17세. 초등학교를 졸업하면서 가출한 은별, 부모님께 탬플스테이 간다고 거짓말을 하고 찾아온 가희, 처음부터 혼자였던 동훈, 형이 있지만 보호받지 못하고 늘 맞고 있는 정수.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네 명의 아이는 말 그대로 세상에 그냥 내던져졌다. 부모 혹은 가족이라는 최소한의 울타리, 학교라는 제도에 어떤 보호나 돌봄도 받지 못한 채 하루하루 자신의 삶을 자신이 책임져야 하는 아이들이다(가희는 부모가 있긴 하지만 그들은 가희의 성적에만 관심이 있다).

이들이 정수의 집에 모인 이유는 간단하다. 동반자살. 살고 싶은 이유보다 죽고 싶은 이유가 더 컸던 아이들은 서툴지만 그들의 목표를 실천한다. <쉘터>의 서사는 이렇게 간단하다. 복잡한 갈등이 있거나 사건이 빵빵 터지지 않는다. 세상에 내던져진 네 명의 청소년이 함께 모여 죽음을 맞이하는 과정만 있을 뿐이다.

어떤 방법을 선택할지 토론하는 장면이나 경험 있는 선배에게 조언을 구하러 가는 것을 보면 이들은 영락없이 아이들이다. 모르는 것이 너무 많아서 주저하기도 하고 그러면서 무모하기도 하고, 처음 해보는 것이기에 두려움만큼이나 신기함도 있었다. 죽음의 무게가 아이들에게는 절대적이면서도 여전히 낯설고 체감되지 않는 것이다. 창문에 테이프를 붙이고 번개탄을 피우고 그렇게 죽음을 맞이하면서도 이게 정말 죽는 것인지, 살아있는 것인지, 눈앞에 보이는 우주와 지구를 보면 죽은 것 같긴 한데 그 공간 속에 현실의 인물들이 보이는 것을 보면 살아있는 것도 같다. 꿈인 듯 현실인 듯 그렇게 죽음을 맞는 아이들은 지구를 떠나 다른 공간의 셸터에 모여 있다가 반짝이는 다른 별을 향해 떠나간다. 셸터를 지키기 위해 남아있던 정수는 혼자 남아 무섭다고 외치는데, 메아리 없는 소리로 끝을 맺는다.

공연을 보면서, 그래도 아이들인데, 설마 진짜 모두 죽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자살을 다룬 다수의 연극에서 함께 죽자고 해도 상대적으로 젊은 사람들을 어떻게든 살려주는 것을 익숙하게 보아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작품은 그런 바람과 관습을 뒤집었다. 세상에 내던져진 아이들은 스스로 세상을 내던졌다. 죽음의 성공이 너무 잔인했고, 같이 죽었음에도 혼자 남아 무섭다고 외치는 정수의 마지막 대사는 슬픔을 넘어 고통으로 다가왔다. 자신의 생일에 선택한 죽음. 세상이라는 지옥에 떨어진 것은 자신의 의지가 아니었으니 죽음으로 천국에 가는 것은 스스로 선택하겠다는 정수가 결국 마주한 것은 천국이 아닌 외로움의 공포였다.

 

사진 제공: 극단 골목길 ©김봉진

 

‘셸터’든 ‘쉘터’든 중요한 건 마음 붙일 곳

피신, 보호의 의미를 지닌 ‘shelter’는 외래어표기법을 따르면 ‘셸터’이지만 작품 제목도, 극중의 대사에서도 ‘쉘터’라고 말한다. 원칙과 규칙보다는 자신들이 원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메시지다. 10대들을 굳이 죽음으로 귀결시킨 이유도 아이들의 ‘쉘터’가 그만큼 중요하고 간절히 필요했다는 것을 반증한다. 정수보다 두 살 많은 세라가 그래도 살라고, 죽으려는 의지로 얼마든지 살아갈 수 있다고 말하자 가희가 대답한다. 제발 그냥 듣기만 해달라고. 사회가 정해놓은 규범을 따르라는 어른들, 아이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기보다는 기성의 시선을 좇기만 바라는 어른들은 모두 세상을 지옥으로 만든 장본인이다. 그러니 어떤 말을 어떻게 하든 그 자체가 강요이고 억압인 셈이다.

아이들은 각자 저마다의 고민과 생각을 나눌 존재들이 필요하다. 누구나 태어날 때는 세상에 내던져진다. 그 존재들이 성장해가면서 관심과 돌봄, 대화를 통해 독립적인 개인이 된다. 이 과정을 겪지 못한 아이들은, 제대로 손잡아주고 귀를 열어줄 어른을 만나지 못한 아이들은 세상 모든 것이 지옥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버리고 때리고 무관심하고 급기야 아이들을 돈벌이 수단으로 여기는 작품 속 어른들은 어른이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그저 지옥을 살아가는 존재들이었다. 아무도 손잡아 주지 않고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는, 제대로 된 어른이 한 명도 없다는 사실의 참담함, 그래서 결국 아이들이 자발적으로 죽음을 선택한 것에 대한 안타까움. 어른의 한 명으로서, 아니 기성세대로 어느 순간 들어와 버린 한 존재로서 미안함과 죄책감이 무겁게 가슴을 내리눌렀다. 그저 들어주기만 했어도, 아니 그저 한 번 관심으로 바라보기만 했어도. 온전한 ‘셸터’가 아닌 어딘가 부족하고 어설프고 완성되지 못한 ‘쉘터’라도 되었더라면… 언제나 그렇듯 후회는 늘 뒷북이다.

 

사진 제공: 극단 골목길 ©김봉진

 

젊은 단원들의 단단한 호흡

안소영 작가와 연출이 젊기 때문에, 그리고 주요 인물도 청소년이기 때문에 극단 골목길의 젊은 단원들이 작품을 이끌어갔다. 내로라하는 극단 선배들과 함께 할 때는 크게 주목되지 않았는데, 젊은 단원들로만 구성을 해보니 그들의 기량이 한눈에 들어왔다. 정수 역의 김재민, 동훈 역의 홍명환, 은별 역의 김지우, 가희 역의 정단비, 이렇게 네 명의 배우는 관심과 돌봄은 처음부터 없었던 듯이 버려진 청소년을 서로 다른 질감과 색으로 표현했다. 각자 전혀 다른 성격을 가지고 있음에도 생의 마지막을 함께 하는 사람들의 유대감과 친밀감이 조화를 이루었다. 목표한 대로 그저 직진이지만 친구 좋아하고, 호기심 많고, 따뜻함에 녹아내렸던 아이들을 네 명의 배우가 잘 표현했기에 안타까움과 슬픔이 더 컸던 것이다. 실제 배우들은 청소년기를 벌써 지났을 텐데 어리숙하면서도 무모한 청소년 자체로 보였다.

청소년들의 지옥을 구성하는 어른들은 가출청소년으로 돈벌이를 하는 장첸, 마약 운반을 하다 중독된 정수의 형 정환이다. 어른이 되어도 어른처럼 보이지 않는 사람들. 각각 이현직, 김혁민 배우가 연기했는데, 차라리 없었다면 더 좋았을 것 같은 존재감을 만들어냈다. 아이들보다 먼저 자살을 기도했던 선배, 그래서 어떤 방법이 좋을지 조언을 구하는 선배 병철은 이현직 배우가 1인 2역으로 연기했다. 죽음 직전 텐트를 찢은 강아지 망치 때문에 실패했는데, 그 덕분에 망치 주인 세라를 만나서 망치처럼 세라와 함께 다니는 인물이다. 말투에서 이미 장첸과 병철이 구분되었고, 선배라고 해도 더 철없는 모습을 보여주어 신뢰하기 어려운 인물을 잘 구현했다. 세라 역의 최유리 배우는 셸터가 왜 필요한지를 몸으로 실천하는 역할을 연기했다. 병철이 죽인 강아지 망치가 세라에게는 유일하게 마음 붙일 곳, 유일한 피난처 셸터였다. 셸터를 잃은 세라의 분노가 급작스러움에도 이해가 된 것은 최유리 배우의 눈빛과 화술 덕분이다.

배우들의 안정적인 조화가 작품을 단단하게 만들었지만 그럼에도 몇 가지 아쉬운 부분은 있었다. 인물의 측면에서는 장첸이 매우 전형적이기 때문에 극중에 도구적인 역할로만 국한된 듯했다. 네 명의 아이들이 서로 다른 입체성을 갖는 것에 비해 장첸은 어디서고 흔히 보는 부도덕한 어른의 모습이었다, 정수의 형인 정환은 스스로의 성장과정도 지옥이었으면서도 정수에게 지옥일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 대사로만 전달되어 관객들에게 보고하는 듯했다. 그러다보니 극 중 존재감이 상대적으로 약해졌다. 정수가 네 명의 아이들 중심이라면 가족이라는 측면에서 정환이 극 속에 좀 더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것이 어떨까 싶다. 장첸과 만난 후 혼자서 약에 취해있는 모습은 정수와 유기적으로 연결되지 않아서 의미가 강조되지 않았다. 무대 활용의 측면에서는 삼일로창고극장을 구석구석 잘 운용한 편이지만, 셸터라는 공간이 주는 의미가 크기 때문에 공간이 자주 바뀌더라도 공간의 약속은 일관될 필요가 있다. 아직은 시작 단계에 있는 극작이자 연출이기 때문에 거칠고 우둘투둘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꼼꼼하고 차근차근 인물과 무대를 풀어가는 안소영 연출의 태도는 잔인하고 힘든 작품을 견디며 볼 수 있게 만든, 거기에 향후의 작업을 기대하게 하는 미덕이다.

 

사진 제공: 극단 골목길 ©김봉진

 

연극 <쉘터>는 10대들을 모두 죽이는 지독하게 잔인하고 염세적인 작품이지만, 실상은 이렇게 아이들이 떠나가지 않도록 어른들 모두가, 우리 사회 모든 곳이 쉘터가 되기를 바라는 간절함이 더 크게 깔려 있는 작품이었다. 크기나 가치, 값은 전혀 상관없다. 그저 손 한 번 잡아 주고, 이야기 들어주고, 아주 작은 관심만 보여도 그것이 살아가는 이유, 살아야 하는 이유, ‘쉘터’가 되는 것이다. 이 ‘쉘터’가 비단 아이들에게만 필요한 것일까? 제대로 된 어른, 진정한 어른이 부재한 지금 이 시기에는 우리 모두에게도 마음 붙일 수 있는 ‘쉘터’가 필요해 보인다. 이젠 제발 서로의 말을 귀담아 듣고, 손도 서로 맞잡아봤으면 좋겠다. 참담함과 안타까움은 우리 현실이 작품 속 지옥 그대로였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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