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제45회 서울연극제 자유참가작 500자 리뷰

극단 전원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

백승무(TTIS 편집장, 연극평론가)

무대는 빈상자로 둘러싸여 있다. 상자는 그 ‘무언가’이고 그 ‘무언가’가 가득 찬 무대는 세계 전체에 해당한다. 세계는 사물로 이뤄져있으니 결국 무대는 사물의 세계, 온 세계의 사물들이다. 사물은 무엇인가? 사물은 본질이다. 칸트의 ‘물 자체’에 가장 가까운 개념이다. 사물임을 저항하는 존재, 즉 인간과 언어와 행위는 모두 사물화 대상이다. 인간이 사물화되었을 때 물질로서 인간을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다. 언어 또한 마찬가지. 사물로 가득한 무대와 사물화된 배우들, 하지만 객석은 결코 사물화되지 못한다. 그것은 사물의 한계인가, 사물화의 한계인가.

프로젝트그룹 낙타 <별(에스트레야)>

선연 김수미(연극평론가)

 

연극을 보고 대본이 궁금해지는 작품들이 있다. 대개는 감동이 클 때나 좋은 대사를 기억하고 싶은 경우인데, 연극 <별>은 좀 더 특별했다. 도박꾼에 술주정뱅이였던 아버지 때문에 남성에 대한 편견과 트라우마를 가진 딸이 아버지의 흔적을 좇다가 자신과 화해하게 된다는 작품의 내용은 자칫 진부해보일 만큼 평이하다. 그런데 작품의 흐름은 이러한 사실과 현상 너머, 인류애를 향해 있다. 자신의 정체성에 집중하느라 좁게 갇힌 딸의 시선을 몸 밖으로 향하게 만든 것은 ‘놀이’다. 너와 나의 경계를 지우고 시간과 공간의 경계를 지워버리는 놀이. 사람 간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누구에게나 있을 법한 내면의 아이에게 주목한 작가의 선택은 훌륭했다. 어떤 연극은 이렇듯 눈에 보이는 사실 너머의 보이지 않는 것들을 만나게 해준다. 스페인 작가 팔로마 페드레로와 프로젝트그룹 낙타의 이름을 기억하고 싶은 이유이기도 하다.

극단 불 <엔트로피>

백승무(TTIS 편집장, 연극평론가)

온갖 소도구가 즐비한 무대는 극장 무대 자체를 의미한다. 배우의 행위는 그 자체로 하나의 공연이다. 움직임 하나 하나는 매순간 선택과 결단으로 이뤄지는 삶의 연속체이다. 그 과정이 하나의 공연으로 탄생한 것이다. 특별한 줄거리는 없다. 인물의 성격도 불분명하다. 특정 주제에 관련된 인물들의 의식이 그대로 쏟아진다. 몰락을 향한 긴장의 축적, 엔딩을 향한 갈등과 감정의 무질서한 응축, 그것이 제목 ‘엔트로피’가 의미하는 바이다. 하지만 심드렁한 관객들의 냉랭한 엔트로피 상승은 어찌할 것인가.

흑과 백, 비극과 희극, 웃음과 눈물, 탄식이 뒤엉킨 이야기

극단 노을 <갈매기>

이연심(TTIS 편집위원)

 

극단 창단 20년을 바라보는 노을이 어리석은 인간들의 어긋난 사랑과 욕망을 그린 <갈매기>를 정기 공연으로 선보인다.

배우의 숨소리가 들리는 작은 극장에 세워진 무대는 소박하고 간결하다. 객석에서 바라본 무대 정면에는 아주 작은 단(壇)이 놓여 있고 그 위로 흑(黑)과 백(白) 커튼이 내려져 있다. 좌우로 화이트 벽이 세워져 있으며 무대에는 8개의 작은 흰 의자가 놓여 있다. 커튼이 열리면서 공간이 확장되고 무대장치는 탁자 두 개가 전부다. 무대를 뒤덮은 흑과 백은 작은 무대를 크게 사용하는 효과를 만들어 낸다.

번역 투의 거추장스러움을 걷어낸 선명한 대사는 관객의 몰입에 일조하고, 주요 인물의 욕망과 갈등을 중심으로 재구성한 이야기는 속도감 있는 흐름을 만든다. 또한 보리스, 마샤, 샴레프 등 인물에서 찾아낸 어리석음과 유쾌함은 관객으로하여금 비극적 사건 앞에서 자기도 모르게 자꾸 실소(失笑)하게 한다. 흑과 백이 뒤엉켜 서로를 더욱 선명하게 하듯, 탄식과 눈물이 웃음과 뒤엉켜 비극과 희극이 제 모습을 더욱 선명하게 드러낸다.

욕망덩어리 작가 보리스를 가볍고 유쾌하게 표현한 정대용의 연기와 뼛속까지 여배우인 이리나를 무게감 있게 표현한 박지우의 연기 앙상블이 볼만하다. 다만 몇몇 장면에서 보이는 몰입을 방해하는 어색한 연기가 아쉽다.

극단 피오르 <우주의 물방울>

수진(연극평론가)

 

한단지몽(邯鄲之夢)이라 했던가. 인생이 한낱 짧은 꿈에 지나지 않는다는 고사처럼 이 작품은 ‘우주의 물방울’같이 작은 존재인 인간의 고단한 삶을 엿보게 한다. 짧은 꿈이라 해서, 작은 존재라 해서, 고단한 삶이라 해서 어찌 가치가 없을까. <우주의 물방울>은 죽음을 앞둔 노부부의 모습을 통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위로를 건넨다. 작품의 주된 메시지가 독백처럼 인물들의 시낭송으로 이루어지고, 병상의 늙은 아내가 가장 예쁜 시절의 모습으로 표현되며 이야기는 현실과 환상을 오간다. 거기서 오는 모호함은 이해보다 그저 감각하면 좋을 듯하다.

극발전소301 <뮤직할 가족>

이연심(TTIS 편집위원)

 

무대는 복싱 체육관의 모습을 무대의 ㄱ자 두 벽면에 사실적으로 구현하여 배치하고, 관객석은 ㄴ자 모양으로 나머지 두 벽면에 배치하여 작은 극장을 효과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작품 제목이 암시하듯 극장에 들어서면 익숙한 뮤지컬 넘버가 연거푸 흘러나와 옹골찬 작은 뮤지컬 한 편을 보게 될 거란 기대를 하게 한다.

오래전 연락이 끊겼던 친모, 그녀의 유산을 받으려면 뮤지컬 한 편을 공연해야 한다. 이런 발칙한 상상이라니! 이야기의 설정은 관객의 흥미를 끌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사업 실패로 뿔뿔이 흩어졌던 가족의 결합, 사춘기 딸래미의 늦은 반항, 땀방울 뚝뚝 떨어지는 뮤지컬 연습, 연습 과정에서 샘솟는 어설픈 멜로 등 각종 클리셰가 뒤범벅된 가운데 우리 사회 소수자 문제와 같은 묵직한 화두가 느닷없이 등장한다.

저마다 다른 모습으로 태어난 사람들이 사회의 정해진 잣대에서 벗어나 각자 자기 기준대로 살아가는 모습은 음악, 안무, 노래, 연기가 각자 제 색깔을 내며 앙상블을 만들어 내는 뮤지컬과 닮았다. 그것이 극중극으로 뮤지컬 형식을 선택한 이유가 아닐까? 그러나 작품의 클라이막스에서 만나게 되는 뮤지컬은 음치, 몸치, 박치의 향연일 뿐, 괜찮은 뮤지컬을 보게 될 것이라는 기대는 여지 없이 무너진다.

그래도 객석은 관객으로 가득 찼고, 관객의 박수와 환호는 후하다. 그러나 끝내 아쉽고 허전하다.

극단 이야기가 〈바쁜데 뭐하러 왔어, 다 똑같지 뭐〉

백승무(TTIS 편집장, 연극평론가)

연극 〈바쁜데 뭐하러 왔어, 다 똑같지 뭐〉는 아버지의 임종을 맞이하는 자식들의 이야기이다. 부자간 애틋한 감정과 교감, 혹은 화해를 묘사하는 여타 임종서사와 달리 이 공연은 아버지의 존재를 봉인하고 자식들의 처지와 변명, 그리고 각성을 서술한다. 독특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했지만, 공연은 구체성 부족과 감정 전달 실패로 인해 무대에 고립되고 만다. 두 아들의 아버지에 대한 적대감이 각각 어디서 기원하는지, 치매 초기인 아버지를 요양원에 모셔야 하는 구체적 이유는 무엇인지, 사촌의 기능은 무엇인지, 며느리의 감정적 급발진은 어떤 것인지 등 관객이 두 아들의 심리적 여정에 동참하기 위해 필요한 구체적 정황설명과 정서적 공감대 형성 작업이 부족하다.

감동프로젝트/창작꿈터 놀이공장 <로미오와 줄리엣 The Clown>

이연심(TTIS 편집위원)

 

너무 잘 알려진 이야기를 구현하는 일은 잘해봐야 본전이다. 연극뿐 아니라 영화, 무용, 뮤지컬, 오페라 등 다양한 종류의 예술로 변주된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은 더욱 그러하다.

이미 대중의 평가를 받은 전작들과 차별화할 수 있는 복안이 없다면 섣불리 선택하기 힘들다.

<로미오와 줄리엣 The Clown>은 발상이 새롭다. 광대가 들려주는 로미오와 줄리엣!

이야기의 구성은 단순하지만 집중력과 순발력을 장착한 두 광대의 연기는 수많은 베로나의 인물들을 멋지게 일으켜 세우고, 원작의 주요 사건들이 해피엔딩을 원하는 광대들의 욕구와 만나 단단하고 환상적인 이야기로 재탄생한다. 판소리의 고수와 같이 극을 끌어가는 악사의 유려한 연주 솜씨는 이야기판을 깔고 두 광대는 창자가 되어 걸판지게 놀이 한 판을 벌인다.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이 빨간 코의 광대를 만나 새롭게 탄생하는 순간이다. 그 순간 관객의 박수는 그칠 줄 모른다.

무대에는 철제 계단만 남아 있는 미끄럼틀이 서로 마주 보고 있고 그 밑으로는 밧줄, 테니스 라켓, 박스 등 잡동사니가 어지럽게 놓여 있다. 심심한 두 광대가 뭘 하고 놀지 궁리한다. 앙상한 나무 한 그루만 서 있는 시골길 언덕 밑에서 고고와 디디, 두 방랑자가 시시껄렁한 광대 놀음을 하며 고도를 기다리듯… 기시감이 들지만 무슨 상관인가? 이제부터 시작되는 두 광대의 놀이터는 무척 사랑스럽다.

창작집단 오늘도 봄 <Be>

선연 김수미(연극평론가, TTIS 편집위원)

 

있는 것과 없는 것, ‘존재’에 대한 다소 철학적인 물음을 기분 좋은 템포와 적절한 중량감으로 깔끔하게 풀어낸 작품이었다. 배우의 앙상블도 좋고, 변형 가능한 목공 오브제를 영리한 장치로 요긴하게 활용한 점도 좋았다. 특히 매력적인 부분은 개념의 현상화다. 작품에서 교차 반복되는 개념들 -우연과 필연, 비극과 희극, 가짜와 진짜가 대척점에 있는 반대 개념이 아니라 하나로 이어진 닮은꼴의 개념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존재함과 존재하지 않음 즉, 삶과 죽음의 개념도 그저 닮은 꼴의 하나의 형태일 뿐이었음이 새삼스럽게 새로운 사실처럼 다가온다. 마지막 장면-관 뚜껑을 열고 살펴보던 수사관이 무심코 관을 열어둔 채 밥을 먹으러 나가는 짧은 순간-이 작품의 메시지를 함축한다. 연극만에서만 가능한 공감각적 사고의 확장, 매력적인 연극 <be>에서 우리는 그 쉽지 않은 경험을 한다.

극단 동숭무대/몽중자각 <가족사진>

이연심(TTIS 편집위원)

자식을 학대하다 죽음에 이르게 한 부모와 가족 동반 자살을 시도하다 자식은 죽고 본인은 살아남은 부모 중 누가 더 나쁠까? 분명한 것은 두 경우 다 자식을 살해한 것은 같다. 아이들에겐 삶에 대한 어떤 선택권도 주어지지 않는 가족 동반 자살은 자식에 대한 부모의 그릇된 소유욕의 표현이며 가정 내 폭력의 극단적인 형태이다. 그런데 왜 우리는 가족 동반 자살에 대해 분노는커녕 “오죽하면 그런 선택을 했을까?”라며 온정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일까? 이는 분명 맥락에 따라 살인을 용납하거나 심지어 동정할 수도 있다는 아동 인권과 생명권에 대한 우리 사회의 잘못된 태도를 증명한다.

작품 <가족사진>은 영정 사진만 찍는 사진관을 배경으로 현실 비관을 이유로 가족 동반 자살을 시도하는 한 가족의 이야기를 희극적으로 풀어낸다. 혹 <가족사진>은 가족 동반 자살에 대해 동정적 공감을 기대하고 있는 것일까? 밑도 끝도 없이 함께 죽어야 하는 이유를 감정적인 대사로 쏟아 낸다.

공연 내내 가족이 함께 죽을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자식은 부모의 목을 조르고 부모는 자식의 머리에 비닐봉투를 씌운다. 그 과정에서 발현되는 웃음의 코드라니……

가족 동반 자살에 대한 우리 사회의 무뎌진 인권 의식을 보여주는 타산지석의 공연으로 보여진다.

극단 신인류 <적의 화장법>

 

수진(연극평론가)

 

인간의 지성도, 의지도 결코 닿지 못하는 곳이 있다면 바로 이 작품 속 ‘적(敵)’이 아닐까. 인간으로서의 윤리와 금기된 욕망 사이에서 자기 생명을 포기해야만 닿을 수 있는 ‘적(敵)’. 이 작품의 적(敵)을 마주하는 것은 뜻하지 않게 흥미롭지만, 그만큼 불편하다. 이는 단순히 작품에서 언급되는 ‘강간’, ‘살인’ 등의 문제적 사건들 때문만은 아니다. 적(敵)과 마주하는 순간 인간의 어둡고 잔악한 본연을 들여다보게 되기 때문이고, 그 적(敵)이 타인이 아닌 바로 자기 자신임을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타인과의 관계를 통해 인간의 본성, 특히 잔인한 내면을 그리는 것에 탁월한 아멜리 노통브의 동명소설을 원작으로 한 이 작품은 ‘타인’이 아닌 화장한 듯 다른 모습으로 숨겨둔 어둠의 ‘자아’가 곧 지옥임을 보여준다.

작품은 호텔방과 공항으로 표현된 단순한 무대에서 두 배우의 빠르고 역동적인 대화로 펼쳐진다. 서로 다른 인물이었던 두 배우가 미스터리한 만남을 통해 결국 한 사람이었음을 깨닫게 되는 순간, 갑자기 무대 소품들이 쓰러지거나 떨어지는 다이나믹한 연출을 통해 인물의 각성과 변화를 극적으로 표현했다. 내면의 또 다른 자아와의 갈등은 꽤 자주 무대에서 보아왔던 소재 중 하나이기 때문에 어느 정도 반전이 예상된다. 그러나 정반대의 캐릭터를 현실감 넘치게 표현하는 두 배우의 밀도 있는 연기가 팽팽한 긴장감을 주어 관객들의 몰입도를 높였다.

극단 춘추 <쥐덫>

이연심(TTIS 편집위원)

 

중장년층의 관객에게 문화적 향수를 자극하는 작품 <쥐덫>은 1952년 초연 이래 전 세계적으로 공연되고 있는 아가사 크리스티의 대표작으로, 작품에 등장하는 모든 사람이 수상하게 느껴지며 심지어 아내와 남편까지 서로 의심하게 되는 고전 추리극이다. 최다 공연 횟수로 기네스북에 오를 만큼 <쥐덫>은 이미 대중에게 잘 알려진 작품이므로 추리극답게 범인을 찾아내는 재미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70년이나 더 지난 오늘도 <쥐덫>의 공연장을 찾는 이유는 극장 문이 열리기 전까지 빠져나올 수 없는 살인의 공포, 극한의 공포 속에서 드러나는 인간성의 상실을 창작자들이 얼마나 차별화하여 구현하는지 체험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폭설로 덮혀진 하얀 세상에 핏빛 살인이라는 진부함을 넘어선 새로운 이미지가 어떻게 관객 앞에 펼쳐질지 모르니, 베스트셀러가 스포일러 역할을 할지언정 다시 극장을 찾는 것이 아닐까?

 

무대에는 고풍스러운 유럽의 거실을 정성껏 옮겨다 놓은 듯 섬세하다. 특히 극장에 들어서면 서 눈이 마주치는 벽난로 위의 초상화는 마치 무대 위에 ‘지켜보는 눈’이 있는 것처럼 섬뜩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데 제격이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살인의 단서, 속속 파헤쳐지는 사건의 내막, 배우들이 풍부하고 섬세한 연기, 극적 긴장감을 고조시키는 조명과 음향, 이 모두가 ‘아는’ 작품을 ‘다시 또’ 보게 하는 요소일 것이다.

하지만, <쥐덫>은 폭설에 갇혀 버린 몽크스웰 게스트하우스처럼 흔들리는 연기,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부자연스러운 어조, 무대장치의 정교함을 따라가지 못하는 조명과 음향, 극적 긴장감을 방해하는 리듬과 템포 등 사방에 놓인 덫에 걸려 무대 위에 고립되어 버린다. 쥐덫에 걸린 것은 ‘세 마리 눈먼 생쥐(Three Blind Mice)’가 아니라 끝내 채워지지 않는 관객의 기대감이다.

창작그룹 피네 〈광야The Wilderness〉

박연숙(연극평론가/숭실대 교수)

창작그룹 피네의 〈광야The Wilderness〉(작/연출 김국희)는 첫 장면부터 우리 사회의 굵직한 참사들을 보여준다. 삼풍백화점 붕괴와 세월호 침몰, 이태원 압사 뉴스 보도가 이어지고 유골함을 든 지수의 등장으로 <광야>의 주제를 짐작하게 한다. 한때 연극 배우였던 지수는 가정생활을 꾸리느라 배우로 활동하지 못하다가 홀로 키운 아들이 대학생이 된 후 재기의 기회를 잡는다. 그러나 <페드라> 오디션에 합격하여 그녀가 꿈꾸던 무대에 다시 오를 기대에 부푼 상황에서 아들이 이태원 압사 희생자가 됨으로써 재기의 기회를 놓치게 된다.

<페드라>는 이 작품에서 여러 상징성을 갖는다. 지수가 극 중 의붓아들인 이폴릿트 역의 남자 후배에게 이성적 감정을 갖는 점에서 그 자신이 페드라와 동일시 될 여지가 있다. 그러나 비운의 죽음은 페드라 역의 자신이나 이폴릿트 역의 남자 후배가 아닌 아들에게 닥친다. 지수는 아들의 죽음을 자신의 욕망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고 생각할까? 김국희 연출은 살아남은 자의 죄책감을 덜어준다. 지수의 욕망이 자연스러운 것이듯 아들의 죽음 또한 누구의 탓이 아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우리의 바람에 답하지 않는 광야에서 삶이라는 여행을 위해 묵묵히 걸어 나갈 뿐이다. 광야에는 목마름만 있는 것이 아니다. 마침내 지수는 화려한 금빛 의상을 걸치고 페드라 공연을 올릴 수 있었다. 어둠이 깊어지면 광야에서도 빛나는 별을 볼 수 있듯이.

극단 제3무대 <광화사>

 

수진(연극평론가)

 

무대 정면 세로로 길게 늘어뜨린 여러 갈래의 흰색 천이 마치 화공의 화폭처럼 보인다. 그 위에는 광기 가득했던 역사 속 인물들이 영상으로 투사된다.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한 원작 소설 『광화사』의 이야기는 영상을 통해 오늘 우리의 이야기로 변화를 모색했다. 배우들이 반복해서 부르는 가요 “내일은 해가 뜬다(사노라면)” 역시 동시대 관객에게 손을 내미는 의도적인 시도이다. 작품의 전체적인 이야기를 이끌어가며 주인공 솔거의 삶에 개입하는 작가의 존재 또한 작품과 관객의 거리를 좁혀준다. 이러한 각색과 연출은 광기 서린 예술가 솔거의 비극적인 삶에 초점을 두지 않는다. 오히려 한바탕 신명나는 굿판처럼 관객이 솔거와 소경 처녀의 죽음을 함께 애도하며 그들을 저승길로 잘 보내주는 것에 집중하는 듯 보인다.

그러나 작품이 전제로 하는 인류의 역사가 광기에 휩싸였던 이들에 의해 이어져 왔다는 명제는 영상 속 독재자들의 모습에서 설득력을 잃는다. 뿐만 아니라 작품이 이야기하고자 했던 ‘아름답다’의 원 뜻 ‘나답다’를 향한 인간의 광기는 작품에서 찾아보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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