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극단 사개탐사 <다이빙 보드>

글_윤서현(연극평론가)

 

지역 예선을 앞둔 열일곱 살 다이빙 선수 애니가 잠시 운동을 쉬고 있는 건 얼굴 없는 남자들의 환영이 보일 정도의 불안감 때문이다. 같은 팀에서 활동 중인 티어난은 학점을 위해 무엇이든 하겠다는 생각으로 수학 선생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었는데 이 사실이 발각되어 대학 진학에 지장이 생길까 두렵다. 애니 대신 시합에 출전하게 된 후배 조앤나는 교회 공동체 활동을 통해 삶에 대한 긍정적 에너지를 충전한다. 말레나 페니쿡의 <다이빙 보드 Diving Board>는 청소년들이 세계로 진입하는 과정 중 겪게 되는 심리적 불안과 그 극복 과정을 다양한 성격의 또래 소녀들을 통해 보여주는 성장 드라마다. 작가는 프로타고니스트 대부분을 ‘십대’, ‘라틴계’, ‘퀴어’, ‘여성’으로, 안타고니스트 대부분을 ‘남성’, ‘백인’, ‘3, 40대 이상’으로 설정하는데(모레나 코치만이 이 분류에서 제외), 이 때문에 소녀들의 진영과 그들을 둘러싼 세계는 일견 서로 적대적인 관계처럼 보인다.

 

사진 제공: 서울연극협회 (촬영. FOTOBEE)

 

작품을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무엇보다도 핸드폰을 들여다보는 ‘얼굴 없는 남자들’의 환영일 것이다. 역시나 백인 남성으로 형상화된 이 존재들은 이 작품이 단순히 ‘소녀들 vs 억압적 세계’라는 단순한 이분법적 세계관 위에 구축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방증한다. 왜냐하면 희곡의 초반 부정적인 이미지였던 환영이 시간의 흐름과 함께 점차 그 성격을 달리하기 때문이다. 침묵의 스토커 같았던 음침한 환영들은 애니의 발작적 공격을 제압하면서도 그녀가 다치지 않게 보호하기도 하고, 서로 껴안고 있는 소녀들을 감싸안기도 하더니 결국 피날레에 다다라서는 소녀들의 도전과 승리를 축하하는 인파 속에 섞여 있다. 즉 ‘얼굴 없는 남자들’은 실제 존재하는 적대적 세계가 아니라 익명의 시선이 가득한 미지의 세계에 대한 애니의 막연한 두려움이 만들어낸 결과이다. 작가는 이러한 불안이 어른들의 계도에 의해 극복된다고 보지 않았다(모레나 코치의 형상이 ‘계도하는 어른’이 아니라 스스로의 불안-부상의 기억-을 떨치지 못한 존재로 제시되고 있는 것을 보라). 작가는 좌충우돌을 겪는 소녀들 각자가 지닌 내면의 힘을, 그리고 그들 사이의 정서적 연대를 믿는다. 세상살이가, 모레나 코치의 말처럼, “멘탈 게임”이라면 이제 소녀들은 세계 진입의 출발선에 선 것이다.

트랙을 연상시키는 긴 수조와 자개 빛이 너울처럼 일렁이는 가벼운 직물, 물그림자 조명, 공간감을 표현한 백색 소음 등이 이 작품의 배경인 수영장과 애니의 내면을 인상적으로 표현한다. 특히 물 이미지와 보랏빛 조명은 십 대들의 유동하는 심리를 효과적으로 제시한다. 무대 정면 영사막 뒤에 설치되어 있다가 공연의 마지막에만 모습을 드러내는 다이빙 타워 또한 두려움과 욕망의 대상인 세계를 상징하는 명확한 기호다.

 

사진 제공: 서울연극협회 (촬영. FOTOBEE)

 

흠잡을 데 없는 발음과 대사 전달력에도 불구하고 소녀들 각자가 지닌 불안의 다양한 정서와 색조가 연기 안으로 스며들었는지는 의문이다. ‘얼굴 없는 남자들’의 강렬한 이미지와 움직임이 소녀들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섬세한 드라마의 흐름을 가린 것은 아닐까. 부상이 두려워 경쟁 상황과의 대면 자체를 회피하는 애니의 소극성과 쭈뼛거림, 무엇이든 저지르고 보는 티어난의 충동성, 세계의 모순에 실망감을 느끼면서도 ‘바른’ 생활을 하기 위해 애쓰는 조앤나의긍정성 등 세계를 향한 태도의 차이가 대사의 내용뿐 아니라 그 발화 속에 정서로 녹아들어야 한다.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소녀들의 형상이 다채로울수록 이 작품이 포용하는 청소년의 범주 또한 확장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티어난의 주도로 아이들이 수학 선생을 납치해 협박하는 장면이 사라진 것은 아쉽다. 촉법 소년 이슈와 관련해 민감한 부분이 될 수 있는 장면이기는 하지만, 이 사건이 티어난의 성격과 태도를 가장 극명하게 드러내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후 티어난은 수학 선생과 있었던 일을 스스로 학교에 고발하는 용기를 발휘하기도 하니까 말이다.

<다이빙 보드>는 다채로운 인물 캐릭터와 무대 이미지의 측면에서 매력적인 작품이다. 이 두 영역의 중간에 존재하는 ‘얼굴 없는 남자들’의 형상에 대한 견고한 해석과 드라마와 이미지 사이의 균형감각을 보강한 사개탐사의 다음 다이빙이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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